소개팅 필패의 역사
난 영화광이다. 지금이야 바쁘기도 하고 극장 티켓값이 많이 올라서 자주 못 가고 있지만 과거에는 볼만한 영화만 개봉하면 바로 극장행이었다. 그 당시에는 넷플릭스 같은 OTT가 없던 시절이니 영화를 제대로 보려면 극장에 꼭 가야만 했었다. 모든 장르를 가리지 않고 즐기는 편이었지만 특히 공포 영화를 즐겼었다. 공포영화는 TV에서 해줄 가능성이 없었기에 더욱 애착이 갔을지도 모른다. 장르의 특성상 이성과 함께 영화를 보기에는 무리이기도 했다. 때문에 공포영화를 볼 때는 늘 혼자서 봐야 했다. 친구들도 공포 영화는 꺼려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직업은 간호사였다. 소개팅으로 만난 그녀는 피곤에 절어 있는 얼굴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외과 수술을 담당하는 간호사였기에 연신 피를 보는 일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응급실 근무라도 할라 치면 거의 반 죽음이 된 상태에서 나와 만났었다. 피를 자주 보는 환경에 있어서 그런지 공포 영화를 같이 보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영화를 보고 밥을 먹을 때면 이런 말을 했다.
"오빠, 아까 그 장면 말이야. 너무 분장티가 나지 않아? 사람을 칼로 베면 그런 식으로 상처가 벌어지지 않거든요. 피가 쏟아지고 내장이... 어쩌고 저쩌고..."
내 착각이었을지는 몰라도 이런 이야기를 할 때면 그녀의 눈빛이 묘하게 빛나는 듯했다. 피비린내 나는 응급실 생활을 하다 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고 이해를 하려고 노력했다. 그 부분 외에는 나와도 잘 통하는 편이었으니까. 훗날의 소개팅 굴욕의 역사를 생각하면 그녀를 어떻게든 잡았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녀를 만날 때의 나는 어렸고 철이 없었다. 공포 영화를 같이 봐주는 것만 해도 절을 해야 할 일인데 조금씩 마음이 멀어져 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사람의 마음이란 게 참 이상하다. 좋아하는 장르도 같이 봐주고 영화 이야기도 함께 할 수 있는 사이였는데 왜 딴마음이 생기게 된 것일까? 아마도 3교대를 하는 그녀의 여건상 기다림에 익숙하지 않았던 내가 지쳐버린 모양이다. 내가 보고 싶을 때 볼 수 없다는 이유로 조금씩 마음의 벽이 생기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무런 문제도 아닌데 말이다. 그녀가 시간이 될 때 맞춰 주면 될 것이 아닌가?
이렇게 사람은 아무것도 아닌 것에 트집을 잡아서 과오를 저지르게 된다. 그녀와 원하는 시간에 볼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조금씩 멀어지다가 결국에는 만남의 종지부를 찍게 된다. 누가 먼저 헤어지자고 한 것은 아니었다. 조금씩 연락의 횟수가 줄어들면서 결국에는 서로 연락을 안 하게 되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녀가 과연 공포영화를 좋아했었는지도 의문이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라고 하니 맞춰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당시의 나는 어렸고 철이 없었다. 이해심도 부족했다. 지금의 나라면 그렇지 않았을 텐데... 훗날 이어진 소개팅의 실패의 역사는 굴러들어 온 복을 차버린 과거의 내가 저지른 과오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니 주위에 나를 챙겨주는 사람이 있다면 꼭 잡아야 한다. 기회는 자주 오지 않는 것이니 말이다. 시기를 놓치면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 더 이상의 기회가 없을 수도 있다. 소개팅 실패담이 아닌 아쉬운 만남에 대해 쓴 것은 내 실수를 반면교사로 삼아서 곁에 있는 반쪽에게 소중히 하라는 말을 전하고 싶어서다. 그녀는 공포영화를 보고 나서 선짓국도 잘 먹었는데... 갑자기 선짓국 당기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