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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련 덜어내기

소개팅 필패의 역사

by 검마사

예의가 바르다라는 이미지는 평소에는 긍정의 의미일 것이다. 웃는 얼굴에 침을 못 뱉는 것처럼 예의 바른 사람에게는 자연스럽게 정중히 대하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예의 바름이 때로는 오해의 소지가 되기도 한다. 아는 후배의 소개로 만나게 된 그녀는 지극히 예의가 있는 여성이었다. 첫 만남에서부터 나를 배려해 주는 것이 느껴졌으니 말이다. 처음에는 다소 거리감이 느껴지기도 했지만 몇 번을 만나고 보니 그녀의 성격이라고 생각해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당시의 나는 눈치가 빠른 편은 아니었다. 그저 만나기만 해도 좋다고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자주 만나는 것은 무조건 좋은 신호 일 것이다라는 순진한 생각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보통은 한두 번이면 차이거나 연락이 두절되었는데 이 아가씨는 4번이나 만날 수 있었다. 3번만 만나도 고백을 해야 한다던 시절에 4번이나 만났으니 희망을 품는 것이 당연하지 않았을까?


기다리던 4번째 만남이었다. 이번만큼은 고백을 하려고 마음을 먹었었다. 분위기 좋은 곳에서 만나서 고백을 하고 싶었는데 영화를 보자고 제안을 했다. 고백이야 영화를 보고도 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해서 당시에 유행하던 영화를 예매했다. 영화를 예매했으니 밥은 그녀가 산다고 했다. 이 역시 좋은 신호로 판단되었다. 지금까지의 만남은 거의 다 내가 냈기 때문이다. 그녀가 저녁을 산다니 고백에 좀 더 가까워진 것이라는 희망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저녁도 비싼 메뉴를 고르라는데 고백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했던 나는 영화관에서 가까운 곳의 음식점을 서둘러 골랐다. 밥보다도 술을 한 잔 하고 싶었다.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와인을 한 잔 하면서 고백을 하면 좋지 않을까란 상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나의 생각을 비웃듯이 저녁을 먹고 나서 술을 한 잔 하는 것이 아닌 커피를 마시자는 것이 아닌가? 심지어 커피도 그녀가 산다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살짝 느낌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지금까지 주로 내가 낸 것이 마음에 걸린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그녀가 산다고 하니 밥도 먹고 커피도 잘 마셨다. 오늘 얻어먹은 것은 다음에 내가 사면 괜찮겠지라는 생각을 했다. 아쉽게도 고백 타임은 잡지 못했다. 커피를 마시고 나자마자 오늘은 이만 헤어지자는 것이다. 그 상황에서 사귀자고 이야기하는 것도 모양새가 영 좋지 않았다. 그래도 밥도 얻어먹고 커피도 얻어 마셨으니까, 다음에는 내가 주도하면서 고백을 하면 되겠지라는 희망을 품을 수 있었다. 헤어지고 돌아오는 길에 소개팅 주선자에게 잘 되고 있었거 고맙다는 메시지를 보낼 정도였다.


그런데 말이다. 뭔가 싸한 기분은 귀신 같이 맞아떨어지는 경향이 있다. 그것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 터지는 경우가 많다. 그날도 그랬다. 소개팅 주선자에게 메시지를 보내기가 무섭게 새로운 메시지 알람이 떴다. 그녀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기쁜 마음에 메시지를 열었다. 순간 나는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메시지의 내용이 너무도 뜻밖의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감사했고 좋은 분 만나시기를 빌어요. 우리 인연은 여기까지 인가 봐요."


방금 전까지 분위기가 좋았었는데 이런 메시지가 온다고? 한동안 머리가 멍한 상태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메시지가 날아왔기 때문이다. 내가 얼어붙는 것도 당연했다. 그렇다면 오늘 그녀가 밥도 사고 커피도 산 것은 그동안 내가 쏜 것에 대한 답례였을까? 이런 친절은 그다지 반갑지 않은 상황인데 말이다.

한동안 충격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마음에 안 들면 차라리 문자나 전화를 하는 게 나았다. 4번이나 만난 상황에서 이토록 허무하게 차일 줄은 몰랐다. 미련 떼어 내기일까? 그동안 고마웠다는 표시였을까? 아니면 본인의 마음의 부담을 내려놓기 위한 요식행위였을까? 어떤 이유이건 간에 내 마음에 상처를 남기고 말았다. 이럴 거면 미리 신호라도 줄 것이지. 갑자기 이렇게 빨간 불을 켜버리면 마음이 적응을 할 수가 없지 않은가? 하긴 4번이나 만났는데 내가 확신을 주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그만큼 내 매력이 별로라고 느낀 모양이다.


잘 얻어먹은 식사가 속에서 요동을 쳤다. 이대로면 체할 것만 같았다. 근처 약국에 들러서 급히 소화제를 사 마셨다. 술이라도 마셨으면 큰일 날 뻔했다. 술기운이 올라왔으면 억울한 마음이 더 크게 느껴졌을 것이 아닌가? 이때의 경험으로 인해 한 동안은 소개팅 상대가 밥을 산다고 하면 긴장부터 하게 되었다. 이것이 헤어지자는 신호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후로는 나서서 밥을 산다는 아가씨는 만나보지 못했다. 내가 밥을 사면 커피를 사는 정도? 이와 같이 예의가 바르다는 것이 항상 좋은 결과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괜한 상상을 하지 않도록 매정하게 끊어 주는 것이 차라리 나을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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