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의 배에서 내리는 법

사랑의 기술 / 에리히 프롬 / 문예출판사

by 솔솔부는 책바람

사랑하는, 곧 나 자신을 주는 행위에서, 다른 사람에게 침투하는 행위에서 나는 나 자신을 찾아내고 나 자신을 발견하고, 나는 우리 두 사람을 발견하고 인간을 발견한다.


사랑의 기술 p.53~54


중학교 때 유난히 좋아하던 발라드 곡이 있었는데 멜로디도 좋았지만 유독 마음에 남았던 것은 가사의 한 구절이었다.


"진정한 사랑을 하고 싶다면 오로지 주려고만 하랬지.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면서~♬"


그 시절의 나는 사랑이란 희생을 전제로 한 고귀하고 아름다운 감정이라 믿었다.

받지 않아도 괜찮고, 오히려 받지 않는 것이 더 성숙한 태도처럼 느껴졌다.

사랑은 그저 숭고한 ' 자기 비움'인 줄로만 알았다.




사랑은 수동적인 감정이 아니라 활동이다. 사랑은 '참여하는 것'이지 '빠지는 것'이 아니다.

가장 일반적인 방식으로 사랑의 능동적 성격을 말한다면, 사랑은 본래 '주는 것'이지 받는 것이 아니라고 설명할 수 있다.


사랑의 기술 p.40


시간이 흘러 독일의 사상가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을 읽으며 오래전 그 노래의 가사가 다시 떠올랐다.

에리히 프롬은 사랑을 수동적인 감정이 아니라 배워야 할 기술(Art)이라고 말한다.

사랑은 자연스럽게 솟아나는 감정의 상태가 아니라 의지와 훈련이 필요한 능동적인 행위라는 것이다.

그는 사랑의 네 가지 요소로 돌봄, 책임, 존경, 지식을 꼽았는데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주는 것'에 대한 정의였다.




나 자신이 포함되지 않은 인간 개념은 있을 수 없다.

(중략)

나 자신의 자아에 대한 사랑은 다른 존재에 대한 사랑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다.


에리히 프롬 p.90


하지만 프롬이 말하는 '주는 것'은 내가 알고 있던 희생과 달랐다.

그것은 나를 소진시키는 무조건적인 헌신이 아니라 단단히 세워진 자아에서 흘러나오는 생명력의 나눔이었다.

그제야 중학생 시절 내가 아름답다고 믿었던 '주기만 하는 사랑'은 사랑 그 자체라기보다 사랑에 대한 동경이 만들어낸 이상화에 가까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자신을 돌보지 못한 채 건네는 헌신은 고귀해 보일 수는 있어도 오래 지속될 수 없다.




내가 참으로 한 사람을 사랑한다면 나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세계를 사랑하고 삶을 사랑하게 된다.


사랑의 기술 p.75


에리히 프롬은 유대계 독일인으로 태어나 유대교 전통 속에서 성장했다.

성경과 탈무드에 둘러싸여 자란 그의 사유에는 성경 속 인물들이 자주 등장하는데 그중에서도 '요나'의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아시리아의 수도 니느웨로 가서 회개를 선포하라고 명령하신다.

그러나 요나는 배를 타고 정반대 방향인 다시스로 향한다.

요나는 하나님이 니느웨를 용서하실 것을 알았고 바로 그 사실을 견딜 수 없었다.

자신의 민족을 억압해 온 니느웨는 요나에게 '사랑 받아서는 안 되는 대상'이었다.

그는 정의를 원했지만 그 정의가 자비로 완성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의 삶에 대해 책임을 느끼지 않았고 그 결과 고래 뱃속이라는 고립의 공간에 갇힌다.



성경에는 요나와 대척점에 서 있는 또 다른 인물이 있다.

요나가 하나님의 마음과 니느웨의 현실을 마주하기를 거부했다면

예수는 죄인 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라는 참혹한 현실을 피하지 않았다.

요나는 자신 안으로 움츠러들었지만 예수는 고통의 한복판으로 걸어 들어가 사랑을 인류 전체로 확장했다.




사랑한다는 것은 누구든지 자기 혼자서 몸소 겪어야 하는 개인의 경험이다.


사랑의 기술 p.155


프롬이 말한 것처럼 사랑은 언제나 확장하는 힘을 가진다.

그리고 이 말의 의미를 나는 아이를 낳고서 이해하게 되었다.

아이를 낳고 처음 든 생각은 '모든 사람은 귀하다'는 것이었다.



배 속에서 열 달을 품고 있다가 죽을 것 같은 진통 끝에 세상에 나온 내 아이가 그렇게 소중했듯이 이 세상 모든 사람 역시 누구나 그런 고통과 사랑의 과정을 지나 태어난 존재라는 사실이 새삼 또렷하게 다가왔다.

엄마가 아니었다면 결코 알 수 없었을 이 마음이 나를 이전보다 더 넓은 세계로 데려다주었다.

한 생명을 품고 길러내는 수고로움조차 결국 타인의 귀함을 배우는 여정이었다.



프롬이 말한 것처럼 누군가를 온전히 사랑한다는 것은 내 안에 잠들었던 사랑의 능력을 깨우고 그 사랑을 세상으로 넓혀 가는 과정이다.

내 아이를 향한 시선이 모든 생명의 귀함으로 확장될 때 우리는 비로소 요나의 배에서 내려 예수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사랑은 여전히 어렵다.

나의 안락함을 포기하고 내가 세워온 편협한 정의를 무너뜨려야 하는 기술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늘 요나와 예수 그 사이 어딘가에 서 있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그 자리에서 외면하고 싶던 '나의 니느웨'를 대면한다.

이 불편한 마주함이 결국 나를 진정한 자유로 이끌어줄 것임을 믿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