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광역시 시립 미술관 건물은 밝고 화사한 화이트 톤으로 다양한 상징성을 표현해 건축물 자체로도 가치가 있으며 실내 천장은 유리로 처리해 빛이 다량으로 들어와 과거와 현재의 차이가 빛으로 표현되고 있다.
전체적으로는 파리의 세느강변에 위치한 오르셰 미술관을 많이 닮았다.
낙동강을 따라 경사진 언덕길을 끼고 올라가면 오래된 수목들이 우거진 아름다운 야외공원에서 멋진 조경과 조각품, 대지 미술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실내공간도 오르셰 미술관처럼 중간중간 유리로 꾸며 바깥 뷰도 볼 수 있고 1층에는 베이커리 카페도 운영해 다양한 디저트를 즐길 수 있다.
경윤은 이곳에서 전시작품 해설도 하지만 연구기획 업무도 한다. 사실 연구기획 업무는 미술관에 소속된 모든 학예연구사와 같이한다. 전시, 교육, 소장품, 아카이브, 보존 등 모든 학예업무는 연구를 기반으로 기획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직업의 특성상 다양한 작품을 연구하고 공부해야 하며 작품하나 구하려고 작가를 만나서 직접 설득하기도 한다. 결코 돈을 많이 벌려고 생각하면 할 수 없는 일이다. 특히, 일부 군소 규모 갤러리의 경우 도슨트(전시 해설)와 에듀케이터(교육 프로그램)의 업무를 모두 진행하면서 일반 행정에 청소까지 해야 하는 일도 다반사다. 그나마 국․시립 미술관은 공립으로 6~7급 상당의 공무원 신분이기에 정년이 보장된다는 장점은 있다. 시립 미술관은 지방직 공무원이다.
경윤은 미술을 전공한 사람으로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연결 지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지속적으로 예술에 심취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자신은 언젠가는 갤러리스트로 뛰어들 막연한 꿈을 갖고 있다.
미술관 계열은 본인의 경력, 영업력과 자본까지 갖춘 상태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당장, 국내 유명한 갤러리의 오너들 중에도 학예연구사 출신도 몇 명 있다.
“경윤 씨! 그간 고생했어.”
“고마워요. 선배님들.... 모두 도와준 덕분이에요.”
“그렇게 자신의 공을 남에게 돌리면 안 되는 거지요....”
오랜만에 학예실의 사람들이 모여 1층의 카페테라스에서 커피와 케이크, 쿠키 등을 푸짐하게 시켜놓고 수다를 떠는 중이다. 고마운 마음으로 경윤이 준비한 것이다.
“첫 작품인데 이 정도면 땡잡은 거지.
네가 워낙 적극적인 성격이니깐 이만한 작품도 만들 수 있었어.”
박예라 학예연구관이 웃으며 위로와 격려의 말을 건넨다. 평소에도 말 한마디에서 위트와 센스가 넘칠 뿐만 아니라 배려까지 넘친다. 나이는 경윤보다 여섯 살이나 위다. 서양화를 전공했으며 학예연구사로 입사하여 지난해 연구관으로 승진했다. 남편과 3년 전에 이혼했고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들 하나가 있다고 들었다. 쌍꺼풀이 없는 맑은 눈에 묘한 분위기의 여자다.
예술계는 일의 특성상 인맥과 연륜을 중요시 생각한다. 그중에 큐레이터는 텃세가 심한 편으로 초보들이 제대로 자리를 잡기 어렵다. 경윤이 소속된 학예연구실에는 12명의 직원이 있다. 기획전은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야 전시 프로젝트가 완성되기 때문에 서로의 소통은 필수지만 더러는 얼굴 붉히며 서운한 감정이 생길 수도 있다. 박 연구관은 경윤이 갓 입사해 어린이 미술관에 근무할 때부터 든든한 후원자를 자처했다.
경윤의 첫 번째 작품인 《어린이를 위한 갤러리》 기획전을 무사히 마쳤다.
빛을 테마로 어린이들에게 예술적 감성을 일깨우고 상상을 열어주자는 의미다. 국내외 7명의 작가를 섭외해 회화, 입체, 설치, 영상작품으로 구성했다. 빛을 새롭게 인식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라 불리는 어린이들의 삶에 영향을 주자는 마음에서 기획한 전시다.
물론 경윤의 아이디어로 진행한 만큼 그동안 교육프로그램을 짜고 작품 해설, 진행도 주로 혼자서 감당해야만 했다. 경윤에게는 어린이 미술관 근무 경험이 큰 도움이 된 것이다.
반면에 지난 근 한 달을 이번 일에 매달리느라 헬스장 한 번 가지 못한 경윤은 몸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아침에 일어나서 거울을 보니 얼굴 살이 좀 빠지고 눈 밑에 다크서클이 생겼다. 피부까지 푸석푸석해지니 화장도 제대로 먹히지 않는다.
“경윤 씨 일어나. 도착했어.”
학예연구실의 서무 일을 보는 김민우 주무관이 깨우는 바람에 눈을 뜬 경윤은 기지개를 켰다. 4시간을 비행하여 필리핀의 수도인 마닐라 공항에 도착했을 때는 시계가 오전 10시를 좀 지나고 있었다. 필리핀 시차는 한국보다는 1시간 느리다. 단일 타임 존(time zone)을 쓰고 있는데 인도네시아처럼 옆으로 넓게 퍼진 게 아니라 위아래로 섬들이 퍼져 있어 단일 시간대를 쓰는 게 편해서 일 것이다.
공항에는 필리핀 국제 문화교류 재단의 현지 직원이 나와 있었다. 옷차림도 말끔했고 친절했다. 직책은 과장이다.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저는 신수범입니다.”
우리 일행에게 명함을 내밀면서 인사를 했다. 박 연구관과 이미 서로 아는 사이였다. 출발 전에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오지 않겠다는 예라를 경윤이 여러 날 공방전을 벌인 끝에 간신히 꼬드겼다.
“미안해. 경윤 아! 이번에는 같이 못 가.”
미술관 야외 흡연실 벤치에 앉아 담배 한 개 피를 깊숙이 들여 마신 예라가 처음에는 이유도 밝히지 않고 무작정 그렇게 말했을 때 경윤은 서운함에 눈물이 핑 돌았다.
“언니! 그건 아니지.... 나한테 이러면 안 되는 거지. 언니!”
언제 어디서나 후원자라며 자처해 놓고 막상 익숙하지 못한 자신을 혼자 보낸다며 무서울 정도로 같이 가자고 졸라대는 경윤의 결연한 의지와 불굴의 정신에 결국 예라는 항복한 것이다.
“이번 주말 같이 쇼핑하자. 필리핀 가려면 이것저것 챙겨야 할 것도 있으니깐. 언니가
도와줄게....”
큐레이터로서 업무 처리 경험과 노하우를 필리핀에서의 4박 5일 동안의 짧은 일정이지만 현장에서 직접 배우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기 때문이다.
청바지에 속살이 은은하게 비추는 얇은 셔츠를 걸친 예라의 어깨에는 나비 두 마리가 마치 살아 있는 듯 생생하게 깊게 새겨져 더욱 육감적으로 보였다. 언젠가 나비 문신의 의미가 무엇인지 물어본 적이 있었다.
“화려함 속에 갇힌 반쪽짜리 인생이 되지 말자.”
나비는 알에서 애벌레로, 애벌레에서 번데기로, 그리고 나비로 변태를 거쳐 아름답게 태어나는 곤충이다. 그래서 나비 문신은 재생과 변화, 또 영원한 부활의 의미가 있을 것이다. 경윤은 예라의 나비를 볼 때마다 “자유”를 소리 높여 외치고 싶었다.
사석에서는 경윤의 우상이기도 한 예라는 40대 초반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건강미와 탄력이 넘치는 농염한 몸매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누구에게나 당당했으며 알면 알수록 신비한 매력을 가진 여자다. 경윤은 그런 예라의 모든 것들을 부러워했다.
차는 공항을 벗어나 시내로 들어섰다. 마닐라 거리의 모습은 전형적인 동남아시아 거리의 모습이었다. 지금은 낮 시간대라 다소 도로가 한산해 보이지만, 저녁 다섯 시부터는 악명 높은 교통난이 시작된다니 사람 사는 곳은 어디든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스페인의 오랜 식민지였던 탓으로 마닐라 대성당과 성 어거스틴 대성당 등의 건축과 종교는 물론, 단순히 거리의 이름조차 스페인 감각을 갖고 있다.
일행들의 숙소는 “그랜드 하얏트 마닐라” 호텔로 마닐라의 부촌 중 한 곳인 『보니파시오 글로벌 시티 BGC』에 있었다. 대개는 필리핀을 GDP를 기준으로 경제소국으로 분류하지만, 이곳은 마치 한국의 청담동처럼 회사가 많고 유동 인구가 많은 곳으로 고급 식당과 고급 카페들이 밀집해 있어 접근성이 좋다는 장점과 함께 특히, 번화가 대로변이라서 도보로 다니기에도 매우 안전한 곳이다.
신수범은 가이드로서의 자격도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 그의 본업이기도 한 문화적 식견은 물론, 필리핀이라는 나라와 사람들에 관해서도 하나에서 열까지 자세히 소개하며 친절하게 안내했다. 또한, 이들의 방문 목적이기도 한 유쳉코 박물관에 대한 모든 정보를 제공하고 질문에 대한 답변과 도움을 주었다.
“우선 숙소에 들러 짐을 푸시고 좀 쉬시다가 오후 2시에 식사 후 곧바로 미술관으로 이동하겠습니다.”
호텔에 도착했을 때 앞쪽에 앉은 그가 몸을 뒤로 돌리며 말했다.
모두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했다. 어차피 일정은 재단 측에서 정하지 않았겠는가? 따지고 보면 이번 여행은 크게 서두를 일도 없다.
대산시 시립 미술관은 국제 문화 교류 활성화 차원에서 매년 일본과 동남아 지역의 미술관과 협약을 맺어 정기적으로 작품을 일정기간 동안 임시 대여하는 방식의 상호 교류 전시를 개최한다.
올해는 필리핀의 유쳉코 뮤지엄과 기획전시를 준비 중이다. 특히 이번 전시회는 필리핀을 대표하는 풍속화가 페르난도 아모르솔로의 작품전이다.
학창 시절 경윤은 농촌 마을을 따뜻한 색감으로 소박하게 그려낸 그의 작품을 보면서 마음이 편안해졌다는 사실을 기억했다.
이번 여행은 경윤이 미술관에 입사한 후, 코디네이트로서 필리핀의 현지 수요와 문화적 특성도 미리 익히고 이런저런 작품을 보면서 안목도 넓힐 겸, 처음으로 직원들과 같이 온 것이다. 앞으로 출국할 일이 가끔 생길 것이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사전 공부를 많이 했다. 유쳉코 뮤지엄은 큰 미술관은 아니었지만 현대 미술을 감상하기엔 충분한 공간이었다.
경윤은 자신의 첫 작품인 《어린이를 위한 갤러리》 전을 작업하면서 몇 명의 작가를 만나보았지만 다른 학예사들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작가마다 성향이 달라 어떤 작가는 잠시 잠깐의 미팅으로 끝내기도 하고 또 어떤 작가는 거침없이 자신의 작품 설치 위치와 방향까지 지정하며 고집을 부리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딱히, 어떤 작가가 쉽고 어렵다기보다는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면서 현장의 여건에 맞추는 방법도 터득해야 한다. 이번 기회에 기획·작품전시를 위한 비즈니스 감각도 배울 생각을 했다.
일행은 숙소에 잠시 머물다가 마닐라 시내에 위치해 있는 “마남 컴포트”를 찾아 시시그(sisig)로 점심을 먹었다. 시시그는 필리핀의 고기 요리로 돼지머리나 삼겹살, 닭의 간 등을 칼라만시, 양파, 고추 등과 조리해 내는 음식으로 필리핀 국민 음식의 하나로 여겨진다. 다양하게 시켜 조금씩 나눠 먹었다. 한국인의 입맛에는 딱 맞았다.
“첫술에 배부를 수 있을까요”
이렇게 말하는 여자는 유쳉코 뮤지엄 관장 카렌(Karen)이다. 50대 중·후반 정도 되었을까? 큰 눈에 짙은 쌍꺼풀을 띄고 있으며 피부는 어두운 톤이다. 전형적인 필리핀 여성의 특징을 갖고 있었다. 필리핀에서는 여성들이 꼽는 미적 기준 중의 하나가 작고 찢어진 눈이다. 그래서인지 동양인의 무쌍 커플의 눈을 선호한다고 알려져 있다. 아마 이것은 희소성에 의한 결과로 필리핀 여인들은 모두가 쌍꺼풀과 큰 눈을 갖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속담에 “말 많은 사람은 믿을게 못된다.”라고 했듯이 능글맞다는 편이 맞을 것 같은 이 여자는 시종일관 웃음 띤 얼굴로 많은 말을 했지만 결국은 “더 협의해서 결정하자.”는 것과 자신의 이런 주장이 정당하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뿐이었다.
그녀의 무책임과 고민 없는 모습에 일행들은 답답함을 넘어 막막함으로 이어졌다. 더 이상의 대화나 의논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이미 오기 전에 양측에서 사전 조율까지 끝내 도장만 “꽝”하고 찍으면 될 걸로 믿고 모두들 가벼운 마음으로 더운 이곳 필리핀까지 날아왔는데 졸지에 엄동설한의 분위기로 만들어 버렸다.
그녀의 옆에서 민망해하며 시선을 외면한 채 서 있는 사람은 이번 교류기획전의 책임자 나다니엘이다. 스페인계의 사람으로 박예라 학예연구관과 연령대가 비슷하며 그동안 몇 번의 전시회를 같이 맞춘 적 있어 둘 사이에는 신뢰가 꽤 깊었다.
통상적으로 상호 교류 전시는 규모와 장소, 일정, 예산 등을 미술관끼리 미리 협의해 작가와 전시작품을 결정해 함께 준비하는데 뮤지엄 관장은 보험가입, 운송 비용, 작품 수량을 터무니없이 줄였다. 물론, 전시 작가 핑계를 대었지만 결국 이윤을 더 남기겠다는 뻔한 속셈으로 이미 협의해 결정된 사항을 번복하려는 것이다. 또한 대산 박물관을 더 초조하게 만들어 이번 판을 주도하면서 더 이상의 것을 요구할 것이다.
우리 측 대표 격인 정광효 연구실장은 흥분한 듯 얼굴이 달아올라 지금까지 협의한 서류를 카렌의 눈앞에다가 흔들어 보이며 따졌지만, 그녀는 우리말은 끊어 버리고 자신의 주장만을 기계적으로 반복했다.
필리핀 사람들의 나쁜 습성 중의 하나는 거짓말을 잘한다는 것이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몇 분 후에 밝혀질 뻔한 일도 일단 거짓말부터 하고 본다. 자주적이지 못했던 식민지의 역사를 오랫동안 가졌던 사람들은 면책을 위해 쉽게 거짓말을 해댄다고 해석하지만, 필리핀인들의 특징이 히야(hiya)라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이때 우리 일행 측에서 뜻밖의 강경한 제안을 하며 관장의 말을 자른 것은 박예라였다.
“그럼 이번 상호 교류 기획전은 하지 않기로 합시다.
이런 상황이라면 우리는 빠른 시일 내에 다른 파트너를 정해서 다시 하겠습니다.”
“예?”
우리 일행은 물론, 카렌과 나다니엘이 동시에 멍한 표정으로 박예라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당장 오늘 결정할 일은 아니었다. 옆에 앉은 경윤은 예라의 한쪽 팔을 잡아당기며 그녀를 진정시켰다.
그러자 동시에 나다니엘이 예라의 표정을 살피며 침착하게 말을 이어받았다.
“연구관님! 지금 협의하는 단계이니 충분히 의논하면 잘 될 것입니다.
성급하게 결론을 내지 마시고 더 의논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그렇게 말하고는 일행을 보며 눈을 찡긋했다. 관장의 말을 그러려니 하라는 뜻이다.
“물론 알고 있습니다만, 저희는 다른 일정이 촉박합니다.
계속 관장님께서 약속과는 다른 말씀을 하고 계시니 우리 박물관에서는 다른 대
안으로 가겠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말한 박 연구관이 관장과 실장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정광효 실장은 마음의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었다. 박 연구관의 말이 백번 맞다 쳐도 다른 파트너를 쉽게 구하기도 쉽지 않을 것이고 무엇보다도 올해 기획전이 막힌다면 앞으로 몇 년간은 필리핀과 같이 일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더 부담으로 와닿을 것이다.
“지금 필리핀에는 한국의 가요와 드라마 등이 열풍을 이끌면서 양국의 문화가 활발히 교류하고 있습니다. K-팝을 이제는 그림을 통해서 양국 국민의 관심을 유도하고자 하는 것이 이번 전시의 목표이기도 합니다.
단순히 미술전 하나가 취소된다고 생각하면 큰 실수를 하게 됩니다. 이 일로 인해 필리핀 국민들에게는 실질적인 한국문화의 혜택을 누리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시면 좋겠습니다.”
박 연구관은 얼굴에 별 표정 없이 차근차근 말을 잇는다.
”물론, 우리는 내일 오전까지 관장의 확답을 기다리겠습니다. 다만 그때도 지금처럼 협약서를 번복하신다면 양쪽의 이견을 사실대로 보고할 것이며 이에 따른 책임 또한 유쳉코 뮤지엄에서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
상대가 이렇게 나올 때의 방법은 하나뿐이다.
“복잡할 필요가 없이 사고는 단순하다. 세게 나가는 수밖에 없다.”
제까짓 것들이 동의 안 하면 어떻게 하겠는가? 자신의 분수를 잘 아는 인간이 출세한다. 카렌이 관장의 위치에 오른 것도 지금까지는 제 나름대로 분수를 알고 지켜왔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사익은 그다음이다.
무중생유(無中生有) 지혜로운 자는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 행사를 공동으로 추진하면서 이런 비슷한 유형을 경험했던 적이 어디 한두 번이었던가? 그럴 때마다 상대에게 휘둘리지 않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다.
성과 없는 회의를 마치고 호텔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박 연구관이 일행들에게 말했다.
“진실 속에 거짓이 있고, 거짓 속에 진실이 있어,”
나다니엘의 집은 아파트 4층이다. 필리핀 중산층 정도의 사람들이 거주하는 곳이다. 불을 켜자 깨끗하게 정리된 집안이 드러났다. 방 두 개에 거실과 주방이 있었다.
나다니엘은 예라에게 빙그레 웃으며 갈아입을 옷이 없다고 말했다.
시간은 밤 11시다. 일행은 지금쯤 호텔로 돌아가는 중일 것이다. 어차피 경윤에게는 미리 언질을 두었다. 물론, 각자의 룸에서 지내기 때문에 기다릴 일은 없을 것이지만 혹시나 무슨 일이라도 있을까? 하는 염려스러운 마음에 알려두었다.
저녁 식사를 한 후 신수범 과장이 한국식 가라오케가 있다며 이참에 언짢은 기분을 풀자고 제안을 했을 때 일행들도 모처럼 해외에서 단합된 기분도 낼 겸 겸사겸사 동의해서 들린 곳이 “르네상스” 주점이다.
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 우리나라 노래주점 정도의 가게 수준으로 한국인 여자에 의해 운영되고 있었다.
일행 여섯 명이 막 도착해 자리를 잡고 앉을 때 나다니엘이 예라의 휴대폰으로 전화를 해 같이 합석하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어색한 분위기가 연출되었지만 내일 협의가 잘될 것이라는 확신에 찬 그의 말에 냉랭했던 분위기는 사라지고 금방 부드러워졌다.
술좌석이 끝났을 때는 밤 10시 반. 시간도 적당했다.
“That's it for today(오늘은 여기까지)! ”
술병이 거의 비워지고 방안에 장치된 노래방 기계로 떠들썩하게 논 후에 박예라 연구관이 마무리 선언을 한 것이다.
그리고 둘은 대화를 더 나눈다며 나다니엘의 집에까지 오게 된 것이다.
“와인 한잔 하시겠어요?”
그는 대답도 하기 전에 이미 예라의 잔에 와인을 가득 채웠다. 안주는 망고 말린 것이다. 둘은 이미 주점에서 술을 많이 마셨다. 그들이 마신 술 만해도 한국의 “참이슬”과 “처음처럼” 뿐만 아니라 사탕수수로 만든 필리핀의 국민소주 “탄두아이럼” “쏘 나이스(So Nice)라는 글씨 아래 '행복한 자몽 ', '행복한 청포도' 등 '행복한+과일 이름'이 적힌 소주”도 있었다.
필리핀의 주류회사인 엠페라도르(Emperador)라는 곳에서 만든 한국식 소주라고 한다. 일행들은 많은 종류의 술을 여러 병 비웠는데 예라는 정신이 멀쩡했다. 프로가 되어야 이 수준에 닿는 것이다.
“가서 꼭 해명을 해 드리라고 관장님께서 저를 보낸 겁니다. 그래서 이렇게 왔습니다.”
노래주점에서 나다니엘이 우리 일행들을 만난 후에 한 첫마디 말이었다.
“서로 다 아는 선수들끼리 이제 앞뒤 잴 필요는 없지, 그 정도면 대충 알아들었고
우리 사이의 업무에는 앞으로 전혀 지장이 없을 거라고 전해주세요.”
정광효 실장이 머리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적당 선에서 흙탕물을 끼얹지 말고 마무리까지 “으쌰으쌰 잘해보자.”는 말이다.
“욕심이 생겼기 때문인지도 모르지.”
나다니엘이 와인을 한잔 다 마시고 식탁 위에 잔을 내려놓으며 관장의 컴플레인에 대해 얘기한 것이다. 하긴 욕심이 과했을 때는 꼭 후유증이 일어났다.
“각종 수수료, 마케팅 비용 등을 고려하여 관례적인 마진을 붙이는 걸로 결정하죠.”
박예라도 마시던 잔을 내리며 말했다. 갸름한 손가락도 예쁜데 손톱에는 블루칼러가 잘 입혀져 있었다. 바다가 아름다운 대산시의 큐레이터로서 딱 어울리는 색이다.
“오랜만에 왔으니깐 자고 가야지?”
나다니엘이 웃으면서 예라를 보았다.
예라는 걸핏하면 자신의 이름을 가지고 놀렸다. 영화 『마법에 걸린 사랑』의 등장인물로 에드워드 왕자의 시종이면서 동시에 그의 계모 나리사 여왕의 시종이기도 하지만 나리사를 흠모하여 짝사랑하는 인물이다. 예라는 현실에서도 자신을 여왕으로 모시고 시중을 들어야 한다며 우겨대었다.
사실 다니엘은 성경에 나오는 어마무시한 인물이라는 것을 예라는 이미 알고 있다.
“일단 샤워부터 할게. 더운물 나오지?”
와인의 그윽한 향취가 서서히 퍼지며 온몸에 감겨든다. 예라가 원피스를 벗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다니엘이 그 순간 손을 뻗어 예라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리고는 그녀의 허리를 감아 안는다. 상반신이 그의 가슴에 안겨졌다.
나다니엘의 입에서는 시면서 달콤한 필리핀 망고의 맛이 났다. 서로의 숨결이 가빠졌다. 뜨거운 입김이 뿜어진다. 손을 뻗어 예라의 원피스를 걷어 올렸다.
엉덩이를 쓸던 손이 그녀의 망사 팬티 안으로 들어간다. 그러다 그의 큰 손이 브래지어에 닿았고 이내 훅을 풀었다. 이제 예라의 예쁜 젖가슴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는 그녀의 젖꼭지를 입에 넣고 혀를 돌려가며 빨아대었다. 마치 맛있는 사탕을 빨아먹듯이......
동시에 예라 등 뒤의 나비 두 마리가 우아하고 아름다운 날갯짓을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