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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영 Apr 19. 2024

경윤의 아버지를 만나다.

초여름날의 저녁 바람은 정겹고 선선하다. 둘은 주말을 이용해 아버지의 농장을 찾는 길이다. 그동안 경윤은 전시회 준비와 작가 섭외, 홍보 활동을 하느라 눈코 뜰 새 없었던 바쁜 나날을 보냈다. 영진은 경윤을 만난 날을 기다리면서 녹초가 되어 있을 안쓰러운 마음이 들어 보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아야만 했다. 그렇더라도 출근하면서 안부를 묻고 중간중간 톡을 하고 퇴근 시간 되면 통화를 하고 집에 가서도 전화를 하는 패턴은 계속되었으며 하루의 시작은 통화할 이유부터 먼저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궁하면 통하고 두드리면 열린다.”           

요즈음 들어 영진이 가장 좋아하는 말이다. 부처님이 해탈하듯이 머릿속에 반짝 스치는 것이 있으면 곧바로 경윤에게 전화를 해댔다. 그런데 어제는 뜻밖에 경윤에게서 먼저 전화가 온 것이다.          

“경윤 씨! 밀양 산내는 왜?”          

“아빠 농장에 가보려고.... 내일 시간 낼 수 있어?”          

“시간이 없어도 만들어야지. 어느 분의 분부시라고요.... ”     

“내가 시간 맞춰 데리러 갈게.”          

“알았어요. 내일 봐~~~”          

이제 기획전시회도 성황리에 끝났으니 당분간은 좀 쉴 수 있을 것이다. 한 시간 거리의 밀양에서 홀로 농장을 운영하며 지내시는 아버지를 보러 갈 작정이었다. 경윤은 자신도 모르게 영진에게 마음이 끌리고 있음을 알았다.      

처음에 연구원 최 박사로부터 소개팅 제안이 들어왔을 때 완곡히 거절했었지만 여러 번 부탁하는 바람에 마지못해 “딱 한 번만.....”이라는 조건을 붙여 승낙했다. 최 박사와 아버지는 유독 친하게 지낸 분이라 경윤도 이미 어렸을 때부터 알던 사이었다.     

그러나 대충 시간이나 때우고 말 요량이었는데 어찌하다 보니 영진과 조금씩 농담도 하고 웃을 수 있는 감정표현까지 하게 된 것이다. 당초 결혼까지는 전혀 생각지도 않았기에 조금은 냉정해져야 한다고 스스로를 거듭해서 마음의 단속도 했었다.     

그러다가 지금은 자신을 위해서 모든 정성을 다하는 그의 마음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영진은 경윤과의 사랑을 위해서라면 지고지순한 충성심을 보였고 데이트를 할 때는 언제나 사람 좋은 미소로 반겨주며 영락없는 보호자 역할을 자처했다. 무엇보다도 끔찍하게 애지중지하는 영진의 마음 씀씀이 진실이란 걸 알게 됐다.     

“언제부터 사랑하는 마음이 생겼던 것일까?.....”          

경윤은 이제 영진의 검증단계를 생략해도 되었다. 그의 곁에 있을 때 자신이 행복했고 ‘불행도 이 사람과 함께 라면 충분히 짊어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도 영진의 체취를 맡음으로써 성욕이 올라간다는 것이다.      

예전에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둘의 접촉도 이제는 전율을 타고 가슴 깊은 곳에서 전해지며 달달한 사랑의 속삭임을 들을 때면 속옷이 흠뻑 젖을 정도로 흥분되었다. ‘젖어야 썸이다.’'라는 신조어가 괜히 생긴 게 아니다. 영진도 경윤을 만날 때마다 혀를 뽑아낼 듯한 격정적인 키스부터 퍼부었다. 그리고 말재주도 타고나 언제나 그녀를 행복하고 즐겁게 해 주었다.       

어제 아침에도 심각한 목소리로 전화를 해 엄살을 떨었다.           

“경윤 씨! 나 이러다 상사병으로 요절하지 싶어.”          

경윤의 나이 6살 되던 해 어머니는 어린 딸과 남편을 두고 농장에서 일하는 직원과 눈이 맞아 행복 둥지를 떠났다. 그래서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을뿐더러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부모님의 나이 차는 띠동갑이었으니 경윤이 태어났을 때 어머니의 나이 겨우 스물둘스물셋 그 정도 되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이제 평생을 어미 없이 살아야 할 어린 경윤을 생각하면 슬픔도 사치라고 여기고 억척스럽게 농장 일에만 매달렸다. 그 덕분에 고생도 아쉬움도 없이 대학을 다녔다.     

다행인 것은 아버지의 사과 농장은 싱싱한 나무에서 자라서인지 사과의 육질이나 당도가 좋아 인기가 많았다. 보통 사과를 재배하는 방법은 나무를 크고 넓게 키우지만 아버지는 곧고 길게 키우는 밀식 재배법으로 키워내 수확량도 엄청 많았다. 그러다 보니 항상 일손 부족은 고질병이 된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그 한해 전에 농장 일을 하다가 사과나무에서 실족해 허리를 다치는 바람에 인부들 중 책임자를 선임해 전적으로 농장의 모든 일을 맡기며 기대게 되었다.     

경윤의 어머니는 새하얀 피부를 지닌 농염하고 탱탱한 여자였으며, 나이가 어려서인지 기교는 미숙했지만, 색을 무척이나 밝히는 여자였다. 또한, 집안에서 귀여움만 받아 자라서 어려서부터 손끝에 물 한 방울도 묻히지 않아 고생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어찌 보면 세상의 때가 묻지 않았던 순수한 사람이었다.      

농장 인부들의 책임자는 30대 초반의 산적같이 생겼지만 키가 크고 몸집이 큰 편으로 처음에는 무척 성실했었다. 경윤 엄마는 어느 때부터인지는 몰라도 그를 부를 때 “오빠”라고 불렀으며 둘은 가끔씩 생활용품이나 농장에 필요한 물품을 사기 위해 차를 타고 읍내로 나갔다 오기도 했다.          

처음 둘의 관계는 농장 관리인과 주인집 사모님이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둘이 배를 맞추었다. 후에 동네에서 떠도는 말로는 “경윤 엄마가 먼저 꼬리 쳤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아마도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그녀가 끓어오르는 성욕을 더 이상 주체하지 못해 읍내 모텔에서 처음으로 그놈에게 가랑이를 벌렸을 것이다.     

그녀는 날마다 사람들 눈을 피해 그를 방으로 불러들이기도 했고 때로는 사과나무 아래에서 노루같이 울부짖으며 그 짓거릴 해대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놈 앞에서 몸을 배배 꼬며 엉덩이를 살랑거리고 애교가 뚝뚝 흐르는 모습으로 둘이 같이 있는 것을 봤다는 목격담이 이어졌다. 아내 문영미는 젊은 인부의 탄탄한 배며 굵은 허벅지에 빠져 짐승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그리고 일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니 작당을 해 야반도주를 했다. 그냥 몸만 간 것도 아니었다. 결혼할 때 가져온 패물은 물론, 한해의 사과 판매금도 모두 갖고 튄 것이다. 세상 끝까지라도 뒤쫓아 가서 데리고 오고 싶었지만 단념했다.      

아버지는 사흘 밤낮을 온몸이 불덩이가 되어 열이 내리질 않았다. 심한 고열과 함께 헛소리로 아내 문영미의 이름만을 불렀다. 농장 인부들이 저러다 죽는 게 아닌가 싶어 교대로 얼음 냉찜질을 해줬다. 어린 경윤은 아버지의 손을 꼭 잡고 밤낮으로 곁에 앉아 울고만 있었다.          

아버지는 유순한 성정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의지가 대단했다. 사흘 아프고 나서는 평소와 다름없이 태연하게 행동했다. 그 때문에 주위의 사람들이 오히려 더 안절부절 눈치를 봤다. 건강을 걱정하던 친척들과 마을 사람들의 방문도 이어졌지만 내색 한번 하지 않았다.      

그 후에도 다친 허리가 도질 때는 며칠이고 일을 하지 못하고 병원 신세를 지기도 했지만, 경윤의 재롱에 한없는 행복감에 젖어들었다. 그리고 무등을 태우고 사과 농장 이곳저곳을 데리고 다녔다. 사실 그동안 주위에서 여러 번 재혼을 권했지만 아버지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경윤을 다른 여자를 엄마로 부르며 살아가도록 만들지는 않을 거라며 거절했다.          

“내일 지구가 멸망을 한다고 해도 절대 그런 일은 없다.”          

더러 날씨가 좋은 날에는 농장 사람들과 사과나무 아래에서 큰 식탁을 갖다 두고 음식을 차려 숯불에 익힌 고기를 안주 삼아 술잔들을 서로에게 건네주며 마시고 기분 좋게 웃고 떠들면서 축제 같은 분위기를 내기도 했다.     

어느 날 경윤의 외할머니가 농장을 찾아왔다. 그 며칠 뒤면 경윤의 생일이었다. 외할머니는 경윤을 안고서 가슴에 품어 한참 동안 오열을 터트렸다.          

“그래 내 새끼. 불쌍한 내 새끼.”           

그리고선 아버지와 따로 무슨 말씀인가를 더 나눴다. 아버지의 무릎을 베고 누웠던 경윤은 설핏설핏 “잠이 들었다 깼다.”를 반복했다.          

“인연인 사람은 우연히 탄 지하철에서도 마주치지만, 인연이 아닌 사람은 집 앞 어귀에서 기다리고 있어도 길이 어긋나게 되는 거라고 합니다.”     

“어머님. 그 사람과 인연이 된다면 어떤 식으로든 다시 만나게 되겠지요.”          

아버지는 외할머니에게 그렇게 말씀드렸다. 아버지의 잘못이 있다면 자신의 아내를 다스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찌 됐든 자신과 몸을 섞어 딸까지 낳은 사람이다. 무엇보다 아직은 남이 아닌 공식적인 부부다. 저 멀리 한 줄기 빛 같은 것이 비치고 있는 느낌으로 아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빠, 나 졸린다. 그만 잘래.”          

아버지와 외할머니의 이런저런 말이 오갈 때쯤 어린 경윤은 잠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 후로 외할머니는 두 사람의 행방을 수소문했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그들의 행방에 대해서 아는 사람들이 없었다.     

어디 멀리 가서 둘이 식당을 열었다는 둥, 같이 도망친 남자에게 버림받았다는 둥 이런저런 말만 들었지 더 이상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염치라고는 알았는지 떠난 뒤에 그들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하니 밀양 언저리에는 얼씬도 안 했을 것이다. 하물며 친정에서 조차 인연을 끊었다고 했다.          

“아빠! 배고파. 밥부터 주세요.”           

모처럼 아버지를 만난 경윤은 마치 어린 시절로 되돌아간 듯이 곧바로 품에 안겼다. 아버지는 만면에 웃음을 띄우며 두 팔을 크게 벌려 딸을 안았다. 둘은 아버지를 번거롭게 할까 싶어 사전에 연락하지 않고 왔다.          

“미리 연락이라도 했으면 이모한테 미리 준비를 시켰을 것 아니냐?”          

다행스럽게도 아버지의 농장에는 시설을 관리해 주는 아저씨 한 분과 살림살이를 도맡아 해 주시는 이모님이 한 분 있었다.          

“그냥 있는 대로 간단하게 먹으면 되죠.”          

영진도 역시 저녁 시간이라서 인지 시장끼가 들었다. 그러나 부녀의 감격스러운 상봉을 지켜보며 그동안 말없이 서 있었다.     

경윤은 오랜 세월,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살았다. 그런 딸이 바쁘다는 핑계로 자주 오지 않아 서운했지만 오늘 이렇게 괜찮아 보이는 남자 친구와 같이 온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격스러웠다. 경윤이 처음으로 남자 친구를 집으로 데리고 온 것이다.     

잠시 후 영진은 아버지와 눈길이 마주치자 큰 소리를 내어,          

“경윤 씨 남자친구 김영진! 처음으로 아버님께 인사 올립니다.”          

그리고는 깍듯이 예의를 갖춰 인사를 드렸다. 아버지는 자신을 당당하게 내세우는 것이 무척 마음에 들었는지 영진의 얼굴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경윤의 성품이 자신을 닮아 너무 온순한 것 같아 은근히 걱정했었는데 이제는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기댈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으로도 기분이 좋아진 것이다.      

아버지의 집은 흰색 계열의 벽지로 엔틱가구와 소품들로 깔끔하게 인테리어가 되어 있었다. 청결하게 꾸며진 집에서 아버지의 성품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아빠! 드세요.”          

“그래. 차린 건 없어도 많이 먹어라.”          

“아닙니다. 아버님! 너무너무 맛있습니다.”           

“그래. 말이라도 고맙다.”          

음식이란 서로 좋아하는 사람과 마주 앉아서 먹을 때가 제일 맛있다. 괜히 불편한 사람과 같이 앉아 먹으면 없던 가시가 생겨 목에 걸린 것처럼 삼키기가 어려운 것이다.     

식사가 끝나고 후식으로 국화차를 마셨다. 정확히는 감국의 꽃을 말려서 만든 차로 청두명목(淸頭明目)이라 하여, 머리를 맑게 하고 눈을 밝게 하는 효능이 있어 조선시대에도 많이 음용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은은하고 부드러운 꽃 향이 난다.          

차를 마시면서도 아버지는 영진의 얼굴을 잔잔한 미소를 띠고 바라본다. 그의 얼굴에는 온화함이 한가득 넘친다. 경윤은 아버지의 웃음만으로도 무척 행복하다고 느꼈다. 그 미소에는 영진의 사람됨을 눈치채었다는 뜻이 있기 때문이다.      

“내 딸이지만 부족한 게 많아서 항상 걱정스러웠는데 옆에서 많이 챙겨줘.”     

“안 그래 아빠! 내가 얼마나 능력자인데....”     

경윤이 약간은 애교스럽게 호들갑을 떨며 말했을 때, 영진이 같은 말이라도 두 사람을 모두 배려하며 대답했다.     

“아버님이 항상 궁금했습니다. 이렇게 예쁘고 훌륭한 경윤 씨를 낳아주신 분은 어떤   분이신가 하고요. 막상 이렇게 뵈니 절로 존경스러운 마음이 듭니다.”     

바람에 싱그러운 풀 내음이 한꺼번에 거실로 날아 들어오니 모두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났다.

앞으로는 여기 있는 이 젊은 친구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고 사랑하는 내 딸 경윤의 “아빠가 되고 남편이 되고 또한, 친구가 될 것이다.”라는 생각을 하니 갑자기 힘이 불끈 솟아난다.     

저녁을 먹고 둘은 2층에 있는 경윤의 방으로 들어와 창문을 활짝 열어젖힌다.      

묵은 공기가 빠져나가고 신선한 공기가 들어온다. 샤워를 마치고 막 나온 경윤의 젖가슴이 팽팽했다. 그리고 침대로 넘어지는 영진을 따라 포개어 입술을 헤집고 들어온다.     

경윤의 등 뒤로 보이는 여름날의 저 하늘엔 초롱초롱 빛나는 별들이 눈꽃처럼 바람에 이리저리 날린다.          

“사랑은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고 영원히 계속되는 것도 아니라고.....” 했지만 그 말은 틀렸다. “사랑은 하나만 있고 그리고 영원히 계속된다.”가 맞다며 생각할 때 경윤이 애타는 신음으로 영진의 이름을 마음껏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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