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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영 Apr 19. 2024

어린이 미술관 선배 윤은선에 대하여

미술관 주차장으로 막 들어섰을 무렵 경윤의 휴대폰이 울린다. 이 시간 때 걸려 오는 전화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발신 번호를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경윤 씨! 나야”          

“네. 선배님.”          

윤은선 선배다. 무슨 일이 생겼는지 몰라도 최근에는 걸핏하면 지각이고 그렇지 않으면 휴가를 내는 날이 많아졌다. 경윤과 같은 사무실에서 어린이 미술관 관리 업무를 맡고 있다.          

“나, 오늘도 못 갈 것 같아. 휴가 좀 내줄래?”          

“네. 선배님 알겠습니다.”          

“그래. 고마워. 자기한테 미안해!”          

“괜찮습니다. 근데 어디 몸이 안 좋아 그러십니까?”          

“아냐. 그냥 일이 좀.....”          

경윤이 되물었을 때 은선 선배는 미처 말도 다 하지 않고 전화를 끊어 버렸다. 분명 좋은 일은 아닐 것이다. 윤은선 선배는 큐레이터 경력 5년 차로 얼마 전까지 소장품자료 연구팀에서 근무하다가 어린이 미술관이 개관되자 신입인 경윤과 같이 이곳에서 일하고 있다.

피부가 하얗고 참하게 생긴 외모지만 워낙 말수가 적었다. 묻는 말에 겨우 대답했다.      

큐레이터란 직업은 전시해설을 전담하는 건 아니지만 가끔은 마이크를 들고 작품 설명을 하는 도슨트 역할도 해야 하기에 억지웃음도 지어야 하며, 말도 많이 해야 할 때도 있다. 그렇지만 은선은 전혀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 때문에 주로 그런 일들은 경윤이 감당해야만 했다. 당초 은선이 이곳 근무를 지원했을 때 인사팀에서 발령을 망설인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고 한다.          

경윤이 첫 발령을 받고 어린이 미술관 사무실에 들어가니 은선이 앉아 있었다.          

“반갑습니다. 최경윤입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선배님!”          

첫인사를 했을 때도 은선은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업무에 필요한 것이 아니면 하루종일 있어도 입을 닫고 살 정도다. 간혹 휴식 시간에 혼자 커피를 마시기가 민망해서       

“커피 한잔 드릴까요?”           

경윤이 물어도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혼자 커피를 들고 사무실 밖으로 나가서 마시고 왔다. 다른 학예사들과도 어울리지도 않았고 점심시간이나 휴식을 취할 때는 귀에 이어폰을 꽂고 책상에 엎드려 있었다. 또한, 자주 한숨을 쉬고 자주 눈물을 보였다. 경윤은 혼자서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종종 보았다.      

동료들은 그런 그녀를 우울 증세가 있다고도 했고, 가끔은 휴대폰을 들고 외진 공간에서 심각하게 전화를 받는 모습을 보면서 가정에 문제가 있을 것 같다는 추측을 하기도 했다. 그런 그녀가 최근에는 지각과 휴가를 번갈아 내고는 잠적 아닌 잠적을 한다. 원 팀이 되어 같이 일을 하는 경윤도 정확히 그 이유를 모른다. 직장 상사와 동료들이 궁금해하며 물어도 속 시원하게 말해줄 것이 없었다.          

토요일인 오늘은 3개 팀의 관람 예약이 있다. 한 팀에 어린이와 보호자로 구성된 총 50명이 참여를 희망해 종일 150명이다. 그것도 단순 관람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 감상과 함께 족자에 잉크를 뿌리는 기법으로 나만의 작품을 완성하는 『잉크 온 패브릭』 체험도 있다. 보조 인원은 고작 미술학과에 재학 중인 아르바이트생 3명이다.      

경윤에게는 오늘 하루도 “알찬 하루”가 아니라 사는 게 사는 게 아닌 “정신없는 하루”가 시작된 것이다.           

전시작품 보호 및 관리 업무를 맡아하면서 경윤이 느낀 것은 아이들은 정적인 것보다는 동적인 것을 좋아한다는 사실이다. 즉 액자에 고정된 그림보다 터치 스크린이나 움직이는 모형물 등의 관람을 더 좋아하고 환호했다. 

어린이들이 미술에 대한 친근감을 지원하기 위해 대산시립 미술관에서는 드물게 어트랙션들을 운영하고 있다. 이럴 때 민물고기, 바다고기 등의 살아 숨 쉬는 위주의 대형수조 쪽으로 우르르 몰려다니며 사진을 찍는 경우다.          

그리고 곤혹스러운 것 중의 하나는 일반 관람객들이 제대로 작품을 감상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물론, 동행한 부모에게도 주의를 주었지만, 잠시뿐이다. 전시실을 운동장처럼 뛰어다니며 친구들과 큰 소리로 떠들어 대는 통에 전시실이 마치 도떼기시장처럼 시끄러워진다는 것이다.      

남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 관람 예절은 어른들도 마찬가지다. 플래시를 터트리며 사진을 찍기도 하고 음료나 간식을 먹는 일도 있다. 더러는 삼삼오오 몰려다니며 거리낌 없이 떠드는 모습은 아쉽게도 익숙한 풍경의 하나가 되었다.       

그중에 경윤이 가장 신경 쓰이는 것은 전시작품 손상이다. 관람 예절이 실종되다 보니 전시작품이 손상되는 일도 발생한다. 경윤이 초보 시절에는 초등학생 두 명이 서로 점프 실력을 뽐내다가 작품을 건드려 유리로 된 액자가 깨지고 작품이 훼손되는 큰 사고가 있었다. 

그 일로 인해서 경윤은 뒷수습에도 꼬박 열흘이 걸렸으며 업무태만으로 상사로부터 주의 처분을 받기도 했다. 문화에 대한 욕구가 높아지면서 미술관·박물관을 찾는 사람들은 늘어나고 있지만, 마음만큼 성숙한 관람 자세가 자리 잡지 못한 것을 미술관 직원들은 늘 아쉬워한다.     

미술관의 휴무일은 월요일이다. 만사를 제쳐두고서라도 이번 휴일에는 은선 선배 집을 한번 찾아가 봐야겠다며 생각했다.          

은선은 어젯밤에도 남편으로부터 협박과 폭행을 당해 경찰이 집에 출동했다. 남편 박승민은 한때 잘 나가는 증권회사에 다녔다. 둘은 대산국립대학 동기로 유명한 CC 커플이었다. 준수한 용모에 깔끔했든 승민은 상대 출신으로 졸업 후 증권회사에 취직해 성실한 샐러리맨의 모델처럼 인식되기도 했다. 또한, 투자고객도 꾸준히 유치해 나름대로 회사에서도 인정받는 직원이었다.     

오랜 연애 끝에 둘은 결혼식을 올리고 2년 뒤, 딸 승은을 낳아 행복하게 살았다. 딸의 이름을 승민의 승, 은선의 은자를 한자씩 따서 이름을 지을 정도로 서로 사랑했었다. 주위 사람들은 그런 그들의 모습을 한결같이 부러워했었다. 그 당시에는 은선에게 승민은 존경과 사랑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결혼한 지 3년이 지났을 무렵부터 갑자기 승민의 돈 씀씀이가 헤퍼졌으며 친절하고 배려 깊던 그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또한, 과할 정도로 자신의 몸치장에 많은 투자를 했으며 귀가 시간도 늦었고 무엇보다도 항상 술에 취해 있었다.     

승민의 갑작스러운 변화에 자욱한 안개에 갇혀버린 듯한 은선은 그저 두렵기만 했다.       

“자기야! 요즈음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뭔가 삐걱거리는 듯한 그의 행동이 걱정스러워 물어보아도 대답 대신에 한결같이 버럭 하며 화를 내었다.       

“뭘 꼬치꼬치 캐묻고 그래. 일일이 내가 너한테 얘기해야 해?”          

자신의 답답한 심정을 어디든 하소연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는 일이기에 혼자 마음을 다스리며 애써 냉정을 유지했다. 미술관에 출근해서도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리고 가끔 남편은 밤늦게 밖에 나가 통화하고 들어오는 일도 잦았다.          

“이 밤중에 누구랑 통화한 거야?”          

“쓸데없는데 신경 쓰지 말고 잠이나 자.”          

부부간의 대화가 이런 식으로 지속되었다. 갓 돌이 지난 승은이는 친정집에 맡기고 주말에만 집으로 데려왔다. 그런 생활이 열 달 정도 지났을까?     

은선은 남편이 직장에서 해고당한 것을 알았다. 고객의 투자 예치금을 빼내어 개인적으로 유용한 것이다. 자신의 투자 실패를 고객의 돈으로 임의대로 돌려 막다가 들킨 것이다. 회사에서는 수사기관에 고발하려다가 회사의 신용 문제도 걸린 만큼 사표를 수리하는 선에서 덮었다고 했다.     

그 뒤로 승민은 집에만 있었다. 그리고 아침부터 술을 마시는 게 일상으로 은선이 퇴근해 가면 이미 취해 방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요즈음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술에 잔뜩 취해 인사불성으로 사는 것이었다.     

어쩌다 은선의 퇴근이 늦어지면 두 눈을 번들거리며 닥치는 대로 집안의 물건을 집어던지면서 폭언을 해댔다.          

“어느 놈과 눈 맞아서 뒹굴다가 이제 와. 응?”           

“일이 바빴어. 미안해.”           

은선은 대충 건성으로 사과하는 시늉을 하며 묵묵히 남편의 말을 들어주었다. 대꾸할 기운도, 정신도 없었지만, 남편이 자신 속에 들어 있는 울분을 어디에다 풀어놓을 곳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어떤 날은 술에 취해 있는 모습을 보면 연민도 있었다. 그녀도 덩달아 점점 황폐해졌다. 또한, 술로만 의지해 하루하루 살아가는 승민의 몸도 나날이 야위어갔고 정신은 미쳐가는 듯 보였다.     

“야! 가서 술사와!”          

“네년이 재수가 없는 년이라서 내가 이렇게 신세를 조진 거야 알아?”           

승민의 폭언과 폭력적인 성향이 심해졌다. 처음에는 술이 깬 다음 날에는 “미안해”하다는 말도 했었지만, 이제는 몸을 밀치기도, 주먹으로 방바닥을 내리치기도 했다. 밖에서 누가 듣는다면 사람 잡는 줄 알 것이다. 어떤 날은 지나가던 행인과 시비가 붙어 경찰서에서 데려오기도 했다.     

이런 생활이 지속될수록 은선은 점점 말이 없어졌다. 누구든지 부를 사람도 없고,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아픔을 혼자서 삼켜야만 했기에 남몰래 울기도 했다. 무지막지한 결혼 생활은 둘 모두에게는 참으로 잔인했다.     

은선은 진심으로 믿고 싶다. 아니 믿고 있었다. 그의 부드러운 눈빛과 매너, 그리고   예전의 따뜻하고 어진 마음의 승민으로 다시 자신 곁으로 돌아올 것이라며.... 단지, 지금은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서 자기 자신을 괴롭히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어제는 퇴근해 집에 가니 승민은 이미 술에 잔뜩 취해 비틀거리며, 붉게 충혈된 눈동자를 굴리면서 은선을 향해 뭐라고 얘기를 했지만, 혀가 꼬일 대로 꼬여 말이 중간중간 끊기기 시작했다.          

“승민 씨!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알아듣도록 해줘.”          

이렇게 되물었을 때 승민의 목소리가 우는 듯 웃는 듯하더니 갑자기 은선을 향해 달려들며 주먹으로 때리고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그 순간에 본 승민의 얼굴은 남편의 얼굴이 아닌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악마의 얼굴 그 자체였다.           

“그래. 제발 나를 죽여라....”          

“사랑의 괴로움도 이별의 고통도 없는 그곳으로.....

 너와 나 둘이 사랑했었던 그 순간으로 돌아가고 싶어. 승민 씨!

 우리 젊은 날의 그 시절로 당신과 꼭 다시 한번 가보고 싶어.

 그러니깐 승민 씨! 우리 같이 떠나자......”     

은선은 차라리 눈을 감고 가만히 있었다. 너에게 매달렸고 너만을 사랑했기에 이 순간, 너의 손에 죽어도 나쁘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와의 이별은 늘 낯설고 두렵기만 했었는데....     

 인연의 끈을 차마 끊지 못해 이렇게라도 버티고 있었어. 승민 씨.....”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렀다. 그러나 다음 순간 자신을 보며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는 사랑스러운 딸 승은의 얼굴이 눈에 아른거렸다.          

“그래. 살아야지. 우리 승은이를 위해서라도 나는 살아야겠다.”            

그런 생각이 들자, 은선은 알 수 없는 분노를 느끼며 젖 먹던 힘을 짜내 남편을 밀쳐내고 목욕탕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승민은 밖에서 욕실 문을 발로 차고 손에 잡히는 대로 거실의 물건을 집어던지며 고함을 질러댔다.      

은선은 112를 누르고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에 목욕탕 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울고 또 울었다. 그리고는 샤워기를 틀었다. 

목욕탕의 욕조에 물이 반쯤 찼을 무렵 앵앵 거리며 달려오던 사이렌 소리가 그들의 집 앞에서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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