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응원 대글을 받았다. 1,000원과 10,000원의 너무나도 소중한 응원 대글에 큰 감동이었다.
주말극 식으로 집필 시작해 연재하기 시작한 소설 '돌아온 세자매 01'도 갑자기 요즘 뜨는 브런치 북 14위에 오르더니 오늘은 7위다.
브런치 알람이 울려서 봤더니 POD 출판 신청이 가능하다고 떴다. '그게 뭐지?' 싶어서 내용을 살펴 보고는 어차피 무료로 해 준다는데 해 보자 하고 부크크라는 곳을 클릭해 봤다.
나는 이제 다시 작가가 될 수 있을까?
어릴 땐 겁도 없고, 다 되는 줄 아는 철 없는 소녀였다. 노력하고 인정 받으면 다 되는 거라고 믿었다. 그런데 세상이 그리 꿈이 큰 소녀의 마음을 순순히 받아 주지 않았다.
공무원 아빠와 알뜰살뜰 살림만 하는 엄마 밑에서 세상 물정 모르고 자란 나는, 아빠 덕에 경마장 VIP 실에서 편하게 아르바이트를 했다. 친구들 한 달 아르바이트 한 돈보다 일주일에 두 번만 일하고 받은 내 아르바이트 비가 좀 더 많았다. 아르바이트 하면서 점심 때 밥도 일하는 티켓 실로 다 날아다 줬고, 간식도 날아다 줬었다.
하지만 방송 작가 일은 세상 물정 모르는 나한테는 별 세계였고, 어느 부분에서는 충격이었고, 어느 부분에서는 상처였고, 어느 부분에서는 인정 받았으니 꼭 성공하고픈 꿈의 터전이었다. 그 터전은 참, 말 많고 탈도 많고, 별 일이 다 있는 쉽지 않은 바닥이기도 했다.
나는 하루에 2시간만 자며 모든 장르를 잘 쓰고 싶어 전력을 다해 노력 했다. 요령 없이, 눈치 없이 열심히만 뛰어 다녔다.
술도 잘 못 마시고, 담배도 못 피고, 글 쓰는 것만 인정 받았지 별 세계 사람들과 어울려 노는 법에 너무 서툴러서 인맥을 다지지 못했다. 난 결국 미끄러지며 절망하고, 길을 찾지 못한 채 늦은 결혼을 했다.
결혼에서 얻은 건 소중하고 뭐든지 다 해 주고 싶을 정도로 세상 보석 같은 아들 한 명이었다. 내가 부모님 밑에서 살아 보지 못한 또 다른 세상 경험이었다. 나는 그제야 어른이 돼 가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 내 인생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결정 속에서 힘든 시간들을 보내고 있다. 여태껏 겪어 보지 못한 또 다른 경험을 해 내고 있다. 점점 집 안으로 쪼그라 들어 언제 끝날지 모르고, 앞이 안 보이는 시간들을 보내고 있다.
어제 밤, 아들이 거실에 있는 화장실에 갔다가 다시 내가 있는 침대 방으로 들어 오려다 남의 편에게 잠시 붙들렸다. 침대 방에 들어와 아들이 해 주는 말에 어이가 없었다.
"아빠가 자기 전에 와서 '안녕히 주무세요.'라고 매일 인사 하래."
"아빠가 시키는 대로 하고 싶어?"
"하기 싫은데 해야돼."
나는 화가 났다. 하기 싫은데 해야 된다는 말을 하는 아들의 모습나로서는 받아 들이기 힘들었다.
본인은 생전 나와 아들에게 기본적 예의도 지키지 않고, 상간녀에게 했던 다정한 말 같은 걸 가족에게 해 본 적이 없이 매일 무뚝뚝하고 강압적이고, 자기 중심적이었다. 그런데 이 상황에, 안그래도 중간에서 눈치 보느라 힘든 어린 아들에게 또 다시 강압을 행사 했다.
어린 아들과 경찰서에 가서 형사와 상담 했던 내용들이 기억 난다. 형사 분은 어린 아들에게 때리고 욕을 하는 것만 폭력이 아니라고, 당연한 보호를 받아야할 미성년으로서 도움이 필요하면 와도 된다고 어깨를 토닥여 주셨었다. 더는 참고 싶지가 않다. 조금이라도 아이를 건드리고 불편하게 하면 접근 금지 신청도 불사하려 한다.
이 상황에 매일 집에 들어와 되려 자신을 건드린게 화가 난다고 진상 짓을 하는 남의 편에게 실망과 실망과 상처가 깊다 못해 차가울 정도로 차가워져 있다. 눈꼽만큼도 소소한 것조차 용서는 절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