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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돌아온 오리 Sep 10. 2024

잠수 6화

아무 잘못이 없다. 상처 받고 싶지 않았다.


“됐어. 차라리 잘됐어. 너 결혼하고 그쪽 집 사연 알고 우리 다 너무 충격이었잖아. 얼마나 찝찝했는지 알아?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겠지.”     


은주의 말이 맞다. 임신 막달에야 혼인 신고하러 가자는 한기의 손을 잡고 구청에 갔을 때부터 알기 시작한 시댁의 사연은 막장 그 자체였다. 희진으로서는 찝찝하고 쉽게 이해가 안 가는 충격이었다. 문제는 이미 배 속에 있는 호진이가 나올 때가 다 된 시기였다. 내 인생에 이혼은 없다는 생각으로 살아온 희진은 배 속에 있는 호진을 생각해 참았다. 결혼했으니 숨기는 거 없이 다 말하라고 한 번 다그쳤을 뿐이다. 그러고 나서도 한기 때문에 이래저래 속을 썩으며 살았다. 똘에 대단치도 않은 사업 한답시고 밖으로만 도는 한기를 내조하고 호진이 케어와 교육에 신경 쓰며 집안일에 최선을 다했다. 그런데 이제 희진은 지쳤다. 한기의 무표정에 질려 버렸다. 희진과 호진에게 타인보다 더 무지한 한기의 숨소리조차도 치가 떨리기 시작했다.     


“엄마 이거 어때?”     


희진은 거울을 쳐다봤다. 전체적으로 남색 계열에 소매 끝에 포인트를 준 게 마음에 들었다.      


“괜찮네. 그걸로 할 거야?”     


희진의 핸드폰 벨이 울렸다. 희진은 얼른 뒤돌아서 은주 옆에 놓아둔 백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호진의 전화였다.     


“응, 아들? 끝났어? 태권도로 바로 가. 이따 봐.”     


희진에게는 이제 호진이뿐이다.

자신과 호진에게서 한기의 먼지 같은 흔적도 다 끊어 버리고 싶었다. 다 지워 버리고 싶었다. 자신이 뭘 잘못했냐며 뻔뻔하도록 이기적인 그 목소리조차 다시는 듣고 싶지 않았다.

한기는 그럼 사람이었다. 항상 무표정한 그 얼굴만큼이나 상대방의 표정들을 읽지 못한다. 상대방이 한기에게 느끼는 감정들을 한기만 들여다보지 못한다. 구석진 그늘을 보는 듯하다. 한기에게 따스함이란 없다. 한기의 두 눈 속에는 상대를 통해 비추어지는 반사라는 게 없다.                         







“어디야?”     


한기는 대답하지 않았다. 날이 서 있는 선화의 목소리가 반갑지 않았다.

민기는 마지막 젓가락질을 냄비 안으로 향하며 한기를 쳐다봤다. 전화를 받긴 받았는데 말이 없다. 핸드폰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건 여자의 목소리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형수님 목소리는 아닌 듯하다.     


“어디냐고?”     


한기는 젓가락을 신경질적으로 내려놨다. 마주 앉아 있는 민기가 신경 쓰였다.

한기는 냄비 안을 힐끔 들여다봤다. 민기가 얼마 남지 않은 라면 면발을 젓가락질하고 있었다. 한기는 아직도 배가 고팠지만 그만 일어났다. 아무 말 없이 그대로 핸드폰을 귀에 댄 채 슬리퍼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                         






선화의 손에는 소장이 쥐어져 있다. 찢어 버릴 수도 없고 손안에서 구깃구깃하게 구기는 중이다.

한기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한기는 대답이 없다. 숨소리조차 들려주지 않는다. 평소에도 말이 별로 없었다. 말은 별로 없지만 선화의 깔깔거리는 숨소리와 신음소리를 너무나도 좋아했다.

무표정한 얼굴로 선화의 얼굴을 쓰다듬던 한기의 손길은 살아가느라 애쓰는 선화에게는 휴게소였다. 그런데 그 휴게소가 폐업으로 인해 불빛조차 비추지 않게 된, 도망치고 싶은 폐건물이 되어 버렸다.

그뿐만이 아니다. 선화는 이제 과부에서 상간녀로 낙인 찍히게 생겼다. 선화는 잘못한 게 없다. 혼자서 이 세상을 버티고 살아 보겠다고 두 아이의 가장이 된 지 팔 년이다. 사고로 죽어 버린 남편의 숨결조차 희미해져 갔다. 그 희미해져가는 숨결을 다시 느끼고 싶었을 뿐이다. 거기까지만이다. 그 이상의 현실도 원하지 않았다.     

한기와 선화의 공간은 둘만을 위한 공연 무대였을 뿐이다. 선화가 그 위에서 깔깔거리며 춤을 추면 한기가 선화를 안아 올려 주는 무대에 불과 했다.


“어디냐고? 어딘지 말하라고.”     


선화는 거실 바닥에 주저앉으며 소리쳤다.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방울이 아닌 줄기가 되어 흘러내렸다. 그렇게 주저앉아 눈물 줄기를 쏟아내는 선화의 모습 앞에 선화를 그대로 반사하고 있는 거울이 놓여 있었다.

선화는 뿌연 눈물 줄기 틈으로 거울을 들여다봤다. 자연스럽게 S 컬로 파마를 한 긴 머리카락들이 흐트러져 있다. 리프팅 시술을 한 좁지만 아담한 이마가 천장의 가로등 불빛에 반사되어 빛나고 있었다. 눈 밑 애교 시술을 한 두 눈은 처절하도록 상처받은 채 눈물 줄기를 흘러내리고 있다. 자홍빛 립스틱을 쳐 바른 입술은 이미 번져 있었다.     


“왜? 어쩌라고?”     


신경질적인 한기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기의 와이프를 본 적이 있다. 연예인처럼 빛나도록 예쁜 미모는 아니지만 눈, 코, 입이 안 예쁜 곳이 없었다. 선화보다 다 여섯 살 많다고 들었지만 원래 나이보다 많이 어려 보였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백화점의 상표 가격이 떠올랐다.

선화는 모든 것을 한기 와이프 탓으로 돌리고 싶었다. 선화는 그저 한기를 느꼈을 뿐이다. 한기를 가진 게 아니다. 한기를 가졌던 건 한기의 와이프였다. 선화는 그저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 한기를 느끼며 기대었을 뿐 아무 잘못이 없다. 상처 받고 싶지 않았다.

한기와 한기 와이프의 일이다. 선화의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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