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무슨 일 있어?
한기는 밖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몸을 일으켰다. 방문도 닫지 않은 채 잠들었다. 이 시골 방에 도착한 옷차림 그대로 씻지도 않고 잠들어 버렸다.
활짝 열려 있는 방문 너머로 민기의 옆 모습을 봤다. 남색 추리닝을 아래위 세트로 입고 있다. 양말도 신지 않은 맨발로 삼선 슬리퍼를 신고 있다. 허리를 구부리고 라면 봉지를 들어서 살피고 내려놨다 또 다른 라면 봉지를 들어서 살피고 있었다.
한기는 가만히 앉아서 쳐다만 봤다. 그러고 보니 허기가 졌다. 어제 낮부터 아무것도 먹지를 않았다.
“호진이 아빠 없는 애 만들려고? 내가 뭘 잘못했는데? 처가랑 수준 맞춰보려고 밖에서 열심히, 발에 땀이 나도록 돈 버느라 열심히 산 죄밖에 더 있어? 나 외로웠다고.”
“미친놈. 너만 외롭니? 네가 언제 나랑 호진이랑 가족 여행을 한 번 간 적이 있어? 남들 다 아빠들이랑 놀이터에 놀 때 너 호진이랑 공 한 번 차 준 적 있어? 남의 아빠들이 놀아 줬어. 나나 너나 밖으로만 도는 네 덕에 너 없어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아. 오히려 너 없는 게 더 익숙해. 그게 더 편해. 너 땜에 십 년을 네 전 여친하게 압류까지 당하고, 네가 숨겼던 막장 같은 너네집 사연 알고도 호진이 땜에 참았어. 여태 참았어. 얼마나 더 참아? 이제 내 변호사랑 얘기해. 나한테 전화하지 마. 네 목소리만 들어도 혈압 올라. 당장 그 집에서 나가.”
희진은 전화를 끊어 버렸다. 호진이도 희진이도 한기와 얘기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한기는 두 손으로 핸들을 격하게 두드렸다. 화가 났다. 너희들이 뭔데 나한테 이러냐고, 너희들이 뭔데 나를 거부하냐고 소리치고 싶었다. 너희들이 뭔데 나를 내쫓냐고 소리 지르고 싶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무슨 일 있어?”
민기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민기의 얼굴을 쳐다봤다. 민기는 한 손에 라면 봉지를 들고 피식 웃으며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뭔가 수상쩍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했다.
민기는 손에 든 라면 봉지를 흔들어 보였다.
“끓일 건데, 같이 먹을래?”
“그래, 그러자.”
한기는 마지못해 대답을 하면서도 배가 고파서 잘됐다고 생각했다. 엉덩이로 바닥을 쓸 듯이 문 앞으로 다가가 두 발을 작은 슈퍼 바닥에 내려놓았다. 민기는 방 옆에 있는 문을 열고 부엌으로 들어가며 한 마디 툭 던졌다.
“좀 씻어라. 옷도 좀 갈아입고.”
부엌에 불이 켜졌다. 한기는 그제야 이 집안에도 불을 켤 수 있는 스위치가 있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빛 있는 곳으로 가려고. 난 어둠이 지겹거든.”
엄마가 그 새벽에 나가면서 한기에게 했던 말이 다시 떠올랐다. 여기도 이렇게 빛이 있는데 무슨 빛을 찾겠다고 했던 걸까? 그래서 엄마는 그 빛을 찾았을까?
민기가 라면을 끓이려고 부엌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한기는 작은 슈퍼 안 한 쪽 벽에 걸려 있는 긴 거울 앞에 가서 섰다. 스포츠형 머리카락들은 기름기가 돌고 있다. 눈에는 눈곱이 끼어 있고, 무표정한 얼굴빛은 그늘져 있었다. 맨 위 단추가 두 개나 풀려 있는 셔츠는 구겨져 있고, 턱에 수염은 며칠을 깎지 않은 사람처럼 거뭇거뭇 껄끄럽게도 솟아나 있었다.
한기는 집 밖으로 나왔다. 내리쬐는 햇살이 두 눈을 깜빡이게 했다. 똑바로 뜰 수 없게 만들었다. 한기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안 갔냐? 안 갈 거냐?”
한기 앞에 작음 엄마가 서 있었다.
“민기랑 라면 먹으려고요.”
한기는 집 뒤에 주차해 놓은 차 쪽으로 걸어갔다. 차 뒤쪽으로 가 트렁크 문을 열였다. 한기는 트렁크 안에 있는 여자 구두 몇 켤레와 자신의 신발과 슬리퍼, 아무렇게나 던져 놓은 속옷과 새 옷들을 쳐다봤다. 속옷과 새 옷들 속에는 여자들 것도 섞여 있었다. 모임이나 행사에 갔을 때마다 챙겨 놓은 것들이다. 희진이 몰래 구입한 것들도 있다. 트렁크 구석에는 모텔이나 호텔에 갔을 때 챙겨 나온 콘돔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라면 다 끓였어.”
민기가 안에서 소리쳤다. 한기는 속옷 한 벌과 옷 한 벌을 챙겨 손에 들었다. 신고 있던 운동화를 벗어서 트렁크 안에 던져 넣고 슬리퍼를 꺼내 신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