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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돌아온 오리 Oct 24. 2024

그림자 독자 02

‘어제는 왜 저장 안 했어요?’ 누구일까?




도청 감지기를 샀다. 살면서 그렇게 큰돈을 써 본 건 처음이다. 전문가용이라고 했다. 칠십만 구천구백육십 원을 주고 구입했다.

일하는 내내 내 몸과 손은 자동으로 할 일을 찾아 움직였다. 일 년 삼백육십오 일을 쉬지 않고 하는 일이 생각 따위나 망설임 따위는 필요 없다. 몸과 손은 내가 할 일을 로봇처럼 자동으로 알고 있었다. 일을 하면서 밤의 두 시간 동안 저장할 글에 대해서만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은 흰 봉투에 적혀 있던, 물음표가 붙어 있던 그 글씨들만 생각이 났다.     


‘어제는 왜 저장 안 했어요?’


나는 모든 일과가 끝나고 타지 않던 버스를 탔다. 가 보지 않은 동네로 갔다. 그리고 처음 사 보는 도청 감지기를 샀다. 생전 처음 백만 원이 안 되지만 오십만 원이 넘는 돈을 한 번에 결제했다.

다시 처음 타 보는 버스를 탔다. 내가 항상 내리던 정류장이 아닌 반대편 정류장에서 내렸다. 곧장 집으로 걸어 들어갔다. 대문 앞 신발장 위에 가방을 올려 놨다. 다른 날과 달리 도청 감지기를 가방 옆에 놓았다. 언제나처럼 작은 방으로 곧장 들어가 샤워할까 싶어 외출복을 벗으려던 손을 멈췄다.

나는 가방 옆에 놓아둔 도청 감지기를 손에 들었다. 아저씨가 쓰는 법을 짧게 설명해 줬다. 나는 아저씨의 설명대로 전원을 켰다. 안테나를 벽 구석구석에 갖다 댔다. 대문 앞부터 작은 방으로, 박은 방에서 부엌으로, 부엌에서 침대 방으로, 침대 방에서 베란다로 안테나를 갖다 대 보았다.

나의 하루는 매일 매일이 거의 다를 바 없다. 내가 움직이는 내 시간의 움직임조차 한 치의 오차도 없다. 정해진 일과의 시간표대로만 살고 있는 편이다. 어쩌다 몸이 아파 병원에 간다거나 하는 내 의지와 몸으로 어쩔 수 없는 변수들이 있을 때만 빼고 무미건조할 만큼 한결같다. 친구들을 만나는 일도 거의 없다. 연애도 잘 안 하게 된다.

한 번 더, 처음 보다 더 구석구석 꼼꼼하게 온 집안을 훑었다. 도청 감지기는 아무 신호도 없었다. 나는 신발장 위의 가방 옆에 다시 도청 감지기를 놓아두었다. 작은 방으로 들어가 외출복을 벗고 욕실로 들어갔다. 샤워하고 나와 작은방으로 가 잠옷을 꺼내 입었다. 침대 옆 작은 책상 앞에 앉았다. 노트북을 펼치고 전원을 켰다. 전원을 켜면 비밀번호를 입력해야 한다. 그래야만 메인 화면으로 전환된다.

나는 노트북 자판에 두 손을 갖다 대고 비밀번호 입력하는 직사각형의 네모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분명히 이 직사각형의 네모 안에 나만 아는 비밀번호를 눌러야만 내가 쓴 글들을 찾아 읽을 수 있다. 이 비밀번호를 정확하게 입력하지 않으면 노트북 안에 저장된, 나만이 볼 수 있는 내 글들을 읽을 수 없다.

나는 다시 작은 방으로 갔다. 바지 주머니 안에 반으로 접어 밀어 넣었던 흰 봉투를 꺼냈다. 다시 침대 옆 작은 책상 앞에 앉았다. 노트북 자판 위에 그 흰 봉투를 쫙 펼쳐서 올려 놨다.      


‘어제는 왜 저장 안 했어요?’     


물음표가 달린 저 글씨들이 나의 머리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어떻게 아는 걸까? 그냥 떠 보는 걸까?

나는 일어나서 베란다 창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베란다 바닥 위에 섰다. 베란다에 서서 건너편 아파트 동을 가만히 쳐다봤다. 동과 동 사이에 삼 차선 도로를 그을 수 있을 정도의 거리가 있다.

나는 건너편 아파트 동을 쳐다보고 침대 옆 작은 책상을 돌아 보기를 반복했다. 망원경을 대고 보면 보일까? 내가 매일 잠들기 전에 노트북 앞에 앉아 두 시간씩 저장한다는 것을 망원경으로 매일 감시할 수 있을까?

나는 한참 베란다에 서 있다가 베란다 창문을 닫고 다시 침대 옆 작은 책상에 앉았다. 노트북 자판 위에 쫙 펼쳐서 올려놓은 흰 봉투를 다시금 뚫어져라 내려다봤다.     


‘어제는 왜 저장 안 했어요?’     


내 글을 본 걸까? 내 글들을 읽은 걸까? 내 글을 읽었다면 어떤 느낌을 받았을까?

나는 흰 봉투 안에 든 빳빳한 오만 원짜리 새 지폐를 흰 봉투에서 반만 꺼냈다. 그 빳빳한 오만 원짜리 새 지폐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매일 우편함에 꽂혀 있는 이 흰 봉투 안의 오만 원짜리 지폐는 그러면 내 글을 읽은 값일까? 왜 하루에, 매일 오만 원일까?

나는 팔짱을 끼고 눈을 감았다. 아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정말로 내 글을 읽었다면 어떻게 읽었을까? 내가 매일 두 시간씩 글을 써서 저장하고 잠든다는 것을 도대체 어떻게 아는 걸까?

나는 두 눈을 뜨고 일어섰다. 나는 방 안을 둘러봤다.

내 방엔 텔레비전이 없다. 한쪽 벽이 빈틈없는 붙박이 책장으로 짜여 있다. 그 책장 안에는 책들이 빼곡히 꽂혀 있다. 그 책장 반대편에 더블 침대가 놓여 있다. 그리고 그 침대 옆에 작은 책상이 놓여 있다.

나는 방 안을 돌아다니며 책장 안의 책들을 살폈다. 벽에 구멍이 뚫렸거나 내가 모르는 틈이 있는지 살폈다. 발견 하기 힘든 몰래카메라나 발견하기 힘든 아주 작은 CCTV라도 박혀 있는지 살피고 살폈다. 침대 위 이불과 커버도 들쳐 봤다. 흔들어도 봤다.

나는 작은 책상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노트북과 노트북 자판 위에 놓인 흰 봉투와 오만 원짜리를 한참 내려다보다가 오만 원짜리가 든 흰 봉투를 옆으로 밀어 놨다. 나는 노트북 화면의 중앙에 떠 있는 직사각형의 네모를 쳐다봤다. 나는 쳐다보고 있다가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노트북 하단에 떠 있는 시간을 봤다. 잠들 시간이 삼십 분밖에 안 남았다. 나는 파일을 열어 글을 썼다. 삼십 분 동안 노트북의 자판을 빠르고 막힘없이 쳐 댔다.

나는 흰 봉투에 적힌, 물음표가 붙은 그 글씨들 때문에 한 시간 삼십 분을 빼앗겼다. 누구일까?

나는 잠드는 순간에도 흰 봉투에 적힌, 물음표가 붙은 그 글씨들을 생각했다.


‘어제는 왜 저장 안 했어요?’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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