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름칠을 못한 로봇이 삐거덕거리며 힘들게 몸을 돌리듯 나는 돌아봤다
다음 날, 평상시와 다름없이 일곱 시에 일어나 삶은 달걀 두 개와 땅콩잼 바른 식빵 두 조각으로 오전의 허기를 달랬다. 세수와 양치를 하고, 간단한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대문을 나섰다.
나는 복도에서도,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같은 동 사람들과 눈을 잘 마주치지 않았다. 되도록 두 귀에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듣는 척했다. 그리고 고개를 살짝 돌리고 서 있거나, 팔짱을 낀 채 엘리베이터 벽에 기대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있거나 했다.
우편함엔 흰 봉투가 꽂혀 있었다. 웬일로 오전 일찍 꽂혀 있었다. 그 봉투 안에는 오만 원짜리 새 지폐 한 장이 어김없이 들어 있었다.
나는 잠시 우편함 앞에 서서 흰 봉투를 여기저기 살폈다. 내 이름 석 자 빼고는 다른 글씨는 적혀 있지 않았다. 나는 잠시 그 봉투를 들고 서 있다가 오만 원권 지폐를 그대로 봉투 안에 집어넣고 우편함에 다시 꽂아 놨다. 우편함에 다시 꽂아 놓은 흰 봉투를 잠시 내려다보고 있다가 돌아섰다.
나는 그날, 평상시와 다름없는 하루의 일과를 보냈다. 그리고 밤 12시가 돼서야 집으로, 나만의 집으로 돌아갔다.
집으로 올라가면서 나도 모르게 우편함을 쳐다봤다. 우편함에는 흰 봉투가 그대로 꽂혀 있었다. 누가 건드린 흔적도 없어 보였다. 오전에 내가 꽂아 놓은 그 자리, 그 각도 그대로 꽂혀 있었다.
나는 건드리지 않았다. 그대로 두고 집으로 올라갔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는데 집 안에 누군가 들어와 있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닫힌 대문 앞, 현관에 서서 신발도 벗지 못하고 그대로 서서 집 안을 들여다봤다.
그 누구도 함께 살지 않는 곳이다. 나 혼자 사는 내 집에서 왜 다른 사람의 흔적이 느껴지는 걸까.
그 누구의 숨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 누구의 신발이나 옷깃 같은 것도 발견되지 않는다.
나는 욕실로 들어갔다. 거울을 쳐다보는 내 눈에 계속 주변을 의식하는 불편함이 담겨 있다. 나는 잠시 욕실 거울을 마주 보며 서 있다가 천천히 옷을 벗고, 양치를 하고 샤워를 했다. 다른 때와 달리 벗은 몸 앞에 수건을 길게 대고 수검이 바닥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한 팔로 움켜잡았다. 욕실 옆 작은 방으로 들어가 잠옷을 갈아입었다. 나는 옷방 안을 천천히 둘러봤다.
나는 한 손에 젖은 수건을 챙겨 쥐고 천천히 집 안을 살피며 걸어서 거실 겸 큰 방으로 들어갔다. 베란다에 있는 세탁기로 다가가 수건을 세탁기 안에 던져 넣고 잠시 서 있었다. 바깥의 어두움만 가득 들어차 있는 베란다 한쪽에 아파트 단지 샛길 옆 나무들 사이로 서 있는 가로등 불빛 한 줄기가 비쳐 들어오고 있다. 처음 보았다. 낮에는 하늘에 떠 있는 햇빛으로 인해 밝은 빛이, 밤에는 낮의 모든 것들이 져 버린 어두움만 가득 들어차 오는지 알았다. 어느 쪽에 떠 있는지 집 안 베란다에서는 보이지 않는 달빛은 햇빛처럼 베란다를 비춰 준 적이 없다. 그런데 밤의 어두움이 들어찬 베란다 한 켠에 나무들 사이의 가로등 불빛 한 줄기가 비춰 들고 있었다. 나는 그 가로등 빛줄기를 이제야 본 것일까.
나는 그 가로등 빛줄기를 쳐다보고 있다가 퍼뜩 내가 누군가가 집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던 걸 깨달았다. 나는 돌아섰다. 아직 전등을 켜지 않은 거실 겸 큰 방을 쳐다보고 있다가 빠르게 전등불 스위치를 때리듯이 내리쳤다.
거실 겸 큰 방에 전등이 켜졌다. 나는 아직도 느껴지고 있었다.
분명히 내가 아닌 누군가가 들어와 있는 느낌은 드는데 집 안의 모든 것들이 너무도 아무 일 없는 듯 그 자리 그대로 놓여 있다. 조금이라고 건드려진, 단 0.5cm라도 흐트러 놓은 곳 하나 없다.
나의 괜한 느낌인지도 모르겠다. 대문 디지털 도어락도 멀쩡했다. 누군가 들어올 리 없다. 동네 사람들하고 인사조차 안 하고 산다. 동창들이나 친구들하고도 서로 연락을 안 하고 산 지 몇 년째다. 친척들은 내가 부모님 집에 산다는 걸 어렴풋이 알고 있지만 절대 찾아올 리 없다. 나를 찾아 올 사람은 없다.
일을 하는 곳에서도 나는 말없이 일만 하는 벽이었다. 동료들은 나를 감정도 없고, 숨소리만 조용히 들락날락할 듯 존재감만 나타내는, 길고 딱딱한 벽돌 같다고 했다. 말 한마디 없이 일만 하는 벽 같다고만 했다. 분명히 눈앞을 지나다니는데 터치할 필요도 없고, 마주 쳐다볼 필요도 없는 길게 틈틈이 쌓아 올린 벽돌로 부른다.
그런 나를 찾아올 사람은 없다. 그런 나의 집 안에 발을 들일 사람은 없다. 나의 공간 안에서 나를 마주할 사람은 없다.
나는 그게 편해서, 엄마 아빠가 남기고 간 그 고독이 좋아서 이 집을 팔지 않았다. 그 외로움이 차라리 나를 보호한다고 생각해서 이사 가지 않았다.
그러니 나는 혼자다. 이 집안에서는 철저하게 나 혼자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침대 옆 작은 책상에 앉았다. 노트북을 켜고 화면이 밝아지는 걸 지켜보다 노트북 터치 패드를 살짝 눌렀다. 길고 하얀 직사각형이 화면 중앙에 떴다. 나는 커서를 그 직사각형 안에 클릭해 놓고 비밀번호를 쳤다.
나는 이때가 제일 좋았다. 노트북 화면 중앙의 직사각형 안에 비밀번호를 누르고 노트북 화면이 본격적으로 로그인 되는 이때가 너무 좋았다. 나 혼자만의 공간에서 온전히 나 자신하고만 마주 보는 시간이라고 생각됐다. 세상의 그 어떤 시공간도 나를 방해할 수 없을 거라는 나만의 충만함이 있었다.
나는 잠시 노트북 자판을 내려다보고 있다가 두 손을 갖다 댔다. 그리고 내 안에서 혼자 중얼거렸다.
그래, 아무도 없다. 나 혼자다. 누군가 있을 리 없다. 나는 편하게 나의 마지막 하루의 두 시간을 즐기면 된다. 그러고 잠들면 된다.
“넌 정말 내가 안 보여?“
그 순간 어떤 목소리가 나의 등 뒤에서 나를 톡톡 건드렸다. 나는 노트북 자판 위에 올려놓은 두 손을 멈칫했다. 가늘고 조그맣게 작은 울림을 만든 목소리였다. 아니다 내가 잘못 들었을 거다.
”우편함에 있는 흰 봉투 오늘은 왜 안 빼 갔어? 내가 너만을 위해 일부러 준비한 빳빳한 새 지폐인 오만 원 짜리를 들고 들어 왔어야지. 너 나를 느꼈잖아, 너 내 목소리 들리잖아. 그런데 왜 외면해?“
아니다. 또 들린다. 잘못 들은 게 아닌 거 같다. 나는 뒤 목이 빳빳하게 펴지며 굳어지는 느낌이었다. 등줄기에 서늘한 바람 한 줄기가, 딱 한 줄기가 얇은 선을 긋듯 싸하게 스치는 거 같았다.
나는 서서히, 기름칠을 오래도록 못한 로봇이 삐거덕거리며 힘들게 몸을 돌리듯 그렇게 나는 뒤를 돌아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