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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디쓴 에스프레소의 그 맛

인생이 때론 에스프레소의 그 압축된 맛을 닮은 거 같다.

by O Ri 작가



나는 이십 대부터 임신 전까지는 커피 하면 에스프레소만 마셨다.


손바닥의 3분의 2 크기 만한 작은 잔에 담긴, 살짝 황금색이라 해도 될만한 크레마가 얹어진 압축된 커피. 쓰디쓰고 일축된 커피가 담긴 에스프레소.



친구들은 그 쓴 커피를 무슨 맛으로 마시냐고 타박을 했었다.

솔직히 나도 무슨 맛으로 마신 건지는 모른다. 멋으로 마신 것도 아니었다. 그냥 무슨 맛인지도 모르고, 저 앙증맞은 작은 잔에 담긴 풍부한 크레마와 그 속에 감추어진 블랙 커피가 마음에 들었을 뿐이다.


그저 그렇게 마음에 들어 했던 에스프레소 커피를 출산하고 나서는 끊었다. 마실만 했고, 음미할만 했던 에스프레소 커피가 출산하고 나서 도저히 입에 대기가 부담스러운 맛이 돼 버렸다.






오랜만이다. 에스프레소 커피를 마주한 건 10년 만이다.


건조기, 전자렌지, 다이슨 무풍 선풍기 등 왠만한 전자 제품은 전부 당근에서 팔았다.

아들의 한샘 장난감 정리함, 수납장 등 가구도 팔 수 있는 건 당근에서 다 팔았다. 아들이 너무 아끼는 피아노랑 레고 책상만 빼고.


부동산에서 이삿 날 짐을 못 뺄까 봐 이사 전날 결국 창고 보관 이삿짐 센터 계약금을 빌려 주셨다. 침대도 버리고, 소파도 버리고. 책상도 버렸다.


나는 이사 전날 동네를 미친듯이 걸어다니다 시청 앞 길거리에 주저 앉아 펑펑 울었다.


세 달 동안 제대로, 든든히 챙겨 먹은 것도 아니고 건강 관리가 잘 된 편이 아니라 몸이 힘들었다. 아르바이트를 하는데 원래의 내 체력이 아니었다. 내가 생각해도 이렇게 버거워할 정도인가 싶었다.

온 몸이 몸살 끼가 올 듯, 바닥에 주저 앉을 거 같은 휘청거림을 이 악물고 참느라 내 스스로가 버거움을 절실히 느낄 정도였다.


6시간 동안 1초도 쉴 틈 없이, 간단하게라도 점심밥을 챙겨 먹을 시간도 없이 밀려드는 주문을 감당하지 못했다. 결국 일한만큼의 알바비를 입금 받고 정중히 짤렸다.




세탁기가 없으니 일주일 치 빨래를 모았다가 겨우 구한 싸구려 웨건을 끌고 세탁방으로 간다.

잠바에 달린 모자를 푹 눌러 쓰고, 고개를 살짝 숙이고, 한 손으로 빨래감이 가득 든 웨건을 끌고 생전 처음 세탁방 경험을 한다.


세탁방 한 번 가면 세탁기 30분 돌리고, 건조기 30분 돌려야 세탁이 다 마무리 된다. 하루에 만원 조금 넘는 돈이 훅 빠져 나간다.


세탁방 세탁기에 빨래를 집어 넣어 놓고, 갈곳은 없고 동네 돌아다니기 싫었다. 산책하는거 좋아하는 내가 우연히 마주친 동네 큰 사거리 앞, 불편하다 못해 피해서 돌아가던 어쩔줄 몰라하던 그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CCTV 화면을 따놓고 싶을 정도였다.

자식을 그 정도로 불편해하는 그 얼굴과 다신 부딪히기 싫어 바로 옆 카페로 들어갔다. 제일 싼 거 마시자 하고는 그냥 에스프레소를 주문해 버렸다.


풍부하게 얹어진 황금색 비슷한 크레마를 바라보는데, 내 인생이 부드럽고 황금색을 닮은 풍부한 크레마 같았음 좋겠단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인생은 그 크레마 속에 감추어진 블랙 커피의 쓴 맛을 더 닮은 거 같다.


아니, 항상 그런건 아니고 지금이 그렇다.


인생의 쓰디씀이 극에 달했을 때의 자존감은 그저 무너져 버린 멍 때리는 텅 빈 뇌다. 뭔가 내 힘으로, 내 손으로 뭔가를 더는 할 방법이 없어져 버린 거다.


사람들의 시선도 싫다. 나를 한심하게 쳐다보고, 나를 하위로 판단하는 거 같은 이상한 잡생각이 치고 올라온다. 누군가에게 다가가는 게 버거워진다. 누군가를 믿는 게 힘들어진다.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어도 기대는 게 무서워진다.





인생의 쓰디쓴 맛을 경험하고 있을 때는 그냥 더는 쓰러지지 않고 싶어서 버티는 게 다다.


그럴땐 그냥 실컷 울어라.

혼자서라도 일단 그냥 울고 싶은 거 너무 참지 말고 단 한번이라도 속의 울분을 다 토해내듯 펑펑 울어라. 토해낼 땐 토해내야 버틴다.

얼마나 버틸지 가늠할 수 없더라도 너무 꾹꾹 눌러 참지만 말고 세상 무너질 듯 펑펑 소리내 울어라. 그렇게 울러서라도 일단 속병 안 걸리게 토해낼 수 있으면 토해낼 땐 토해내는 것도 건강을 지키는 방법이다.


울고 싶은 걸 무조건 꾹꾹 눌러 참지만은 말아라. 참는 것도 한계가 있다. 결국엔 터지게 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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