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역국 대신, 내 생일이니까 오늘 하루만 허락한 카푸치노의 따스한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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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뭔가를 해야만 마음이 놓이는 사람도,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는 걸 낯설어 하는 사람도,
어느 순간 무기력해지고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거 같을 때가 있다. 항상 생기와 열정이 담겨 있던 얼굴과 두 눈이 텅 비어 있다. 그럴 땐 그냥 누워 버리고 싶다.
때로는 쉬어 가도 된다고,
때로는 게을러져도 된다고,
때로는 한없는 무거움으로 바닥에 눕혀지는 지쳐 있는 몸을 잠 속으로 몰아 넣어도 된다고 달래고 싶은 그런 때가 있다.
(카카오톡 이모티콘 캡쳐해 온 그림입니다.)
내일을 살아갈 여유가 남아 있다면 그럴 땐 그냥, 잠시 무너져 있어도 된다고 말하고 싶다. 내일의 먹을 것이 남아 있고, 내일의 나를 두려움과 한숨으로 몰아쳐지는 걱정이 없다면 잠시 무너져 있는다고 세상이 무너지진 않는다. 내가 사라지진 않는다. 잠들어도 다시 깨어나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일을 살아갈 여유가 지금 내게 허락 되고 있지 않는다면 쓰러질 때까지 버티고 걸을 수 밖에 없다. 쓰러져 두 눈이 다시는 떠지지 않는 잠에 빠져 들더라도, 내일을 살아갈 여유가 0.1%도 남아 있지 않다면 잠시 무너져 있는 것조차 또 다른 내일의 굶주림이다.
여유와 가난의 차이는 그런 거다.
나는 MZ 세대가 아닌 게 맞다. 곧 죽어도 얼죽아는 안 그래도 차가운 겨울에 나의 빈 속까지 움츠러 들게 만든다.
따스한 김이 스믈하게 잠시 올라와 주는, 갓 내린 커피에 우유 거품과 시나몬 가루가 듬뿍 뿌려진 카푸치노가 좋다. 얼음이 들어가면 안된다.
영하로 떨어지고 있는 아침 바람의 차가움을 비웃듯 카페 창가로 비쳐드는 밝은 햇살처럼 따스해야 한다. 그래야 그 어느 때보다도 시리도록 차갑게 움츠러드는 겨울 바람을 위로 받을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오늘 카푸치노를 마신다. 나를 위해, 미역국 대신 따스한 카푸치노 한 잔을 마시며 5,000원의 사치를 부리고 있다.
나는 갓 내린 뜨거운 커피에 하얗게 우유 거품을 얹고 시나몬 가루를 듬뿍 뿌린 카푸치노를 좋아하는 편이다. 예전에는 이 카푸치노 한 잔을 모닝 커피로 마셔지는 하루의 여유가 그렇게 소중한 건지 몰랐다.
오늘은 그 소중함을 카페 창가로 비춰드는 밝은 햇살과 함께 듬뿍 느끼고 있다. 새벽부터 축하 메시지와 모바일 선물을 전송한 지인들이 나에게 주는 눈물 몇 방울과 함께.
아무래도 갱년기가 바짝 다가온 거 같다. 눈물이 많아진다. 주책 맞은 40대의 오버 되는 감정이라고 해도 좋다. 나이가 주는 자연스러운 흐름이기 때문에 나는 그런 내 모습도 낯설음 없이 받아들이고 있다.
겨울 바람이 차가워졌다. 아침에 아들과 롱패딩을 챙겨 입고 나왔지만 영하로 떨어질 거라던 아침 바람은 패딩 잠바의 자크까지 꽁꽁 잠그게 만들었다.
어릴 때는 내 주변에 되도록 많은 사람들이 있어야 어깨가 높아지는 거 같았다. 하지만 나이가 한살 한살 들어 가고, 계절과 해가 바뀌어가면서 점점 조용함을 추구하게 된다.
화려함 보다 소박함을,
북적되는 머릿 수 보다는 손가락으로 다 세어지는 소수의 진심과 편안함을,
나를 내세우는 주인공 의식 보다는 조용히 내 할일 하면서 앞에서 빛나는 사람들을 쳐다보는 뿌듯함을,
귀를 가득 메우는 시끄러움 보다는 카페 창가 앞 자리에 앉아 조용히 비춰드는 햇살의 조용함을,
매일 전화하고 매일 조잘 되는 열정 보다는 각자의 바쁨 속에서 오랜만에 만나고 별 말이 없어도 어색하지 않은 편안한 느긋함을,
나는 어느 새 그런 나이가 됐다. 아니, 생각지도 못했던 삶의 일들을 겪으며 나는 어느 새 그런 내가 돼 있다.
힘들게 버텨지는 일상만 아니라면,
내일의 텅 빈 하루의 불안함만 아니라면,
오늘도 한숨으로 시작해 한숨으로 끝나는 버거움만 아니라면,
삶은, 우리의 인생은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세월의 스믈한 변화도 어찌 보면 나의 그림자다. 그 그림자가 살아가는 순간순간의 모든 이유와 의미를 바라보게 만든다.
때로는 당연하다 믿었던 것들에 대한 배신감과 분노가 나를 감쌀 때가 있다. 제일 힘들때 제일 먼저 손 잡아 줄줄 알았던 가족의 존재가 타인 보다 더 나를 비참하도록 외롭게 외면 한다.
그럴 땐 그냥 끊어라.
나는 미련하도록 붙잡고 있는 관계의 속절 없음이 더 깊은 상처를 남기는 거 같아 싫어진다.
나이 마흔이 넘고 나서는 이것저것 나를 더 힘들게 하는 인간관계에 대한 미련이 걸러지는 거 같다. 붙들고 있는 게 더 힘든 관계에 대해 매달리는 거 자체가 의미 없다.
내가 살아가려면,
내가 나아가려면,
매달리지 마라. 미련의 끈을 내 온 몸에 휘감고 더 깊은 상처로 나를 밀어 넣지 마라.
나이 들면서 필요한 건 경제적 여유와 일적으로 나의 이름이 빛날 수 있는 자부심이지 인간 관계가 아니다. 할 수 있다면, 하늘이 내게 운을 허락한다면 나에게 경제력을 안겨 주는 일의 행운을 기도해라. 나의 이름을 조용히 빛나게 해 줄, 내 이름이 빛남으로 인해 외로움을 위로 받을 일에서 기쁨과 보람을 찾아라.
나를 아프게 하고 슬프게 하는 인간 관계는 끊어라. 그것이 가족이라도.
내가 지켜야 할, 내가 꼭 잡고 놓지 말아야 할 관계의 선을 분명히 해라.
나에게는 그 관계의 분명한 선이 쌓여가는 거 같다.
나는 더 이상 드넓은 인간 관계의 미련함에 매달리고 싶지 않다.
내게 내 나이에 맞는 경제력과 자부심을 안겨 줄 일의 운명이 더 간절해진다. 살아진다면 다시 돌보게 되는 거 또한 인간 관계다. 일단 살아지는 게 먼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