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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돌아온 오리 Nov 27. 2023

방송작가는 배고프다

결혼전 10년 넘게 프리랜서로 해 본 방송작가에 대한 그리움


요즘 굉장히 부러운 여자가 있다. JTBC 드라마 '힘쎈 여자 강남순'에 나오는 강남순의 엄마인 황금순이다. 힘 쎄고, 돈 많고, 날씬하고, 얼굴 예쁘고, 착하고 다정한 전 남편도 있고, 예쁜 딸과 아들도 있다. 학력만 고졸이지 안 가진 게 없다.

여자가 이 대한민국 사회에서 저렇게 다 가지고 당당하게 파워 있다는 게 어떤 걸까 싶어 부럽기만 하다.


결혼 전, 방송 작가 10년 넘게 쉽지 않았다. 집에서는 반대하시고, 나 혼자 말 많고 탈 많은 그 바닥에서 어떻게든 성공해 보겠다고 겁도 없이 돌아 다녔다. 글만 잘 쓰고 아이템만 잘 내면 되는 줄 알았다. 아니다. 절대 아니다.


더구나 나는 프리랜서 메인 작가였다. 시부터 쓰기 시작한 나는, 방송국 직원으로서 일명 새끼 작가인 막내 작가부터 시작한 게 아니다. 뮤직비디오 시나리오 작가로 프로그램 구성, 대본 메인 작가로서 프리랜서였다. 그나마 성공 못한 아주 화려한 경력은 아니지만, 방송국 직원인 막내 작가부터 시작한 것도 아니지만 아주 초라하기만 한 프로필은 아니다.


글이라면 다 잘 쓰고 싶었고, 어떻게든 드라마 작가로 이름을 올리고 나서 결혼하자 싶어 결혼도 늦어졌다. 물론, 바란대로 드라마 작가로 이름을 올리지는 못했다.


술도 잘 못 마시고, 담배도 못 피고 그랬다.


아리랑 TV에서 하는 미팅 프로 때문에 첫 미팅 하는데 회의를 하다가 PD가 잠시 나가서 쉬었다 하시자고 했다. 나는 몰랐다. 그때 그 말이 그냥 진짜 쉬다가 하자는 줄만 알았다. 그런데 다들 당연하다는 듯이 담배들을 꺼내고 방송국 건물 실외 테라스로 나가는 거다. 나는 담배를 못 핀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다들 말은 안 하는데 낯선 듯 '뭐야?'하는 눈빛으로 쳐다들 봤다. 나는 뻘쭘했다.

그렇다고 나만 회의실에 있기 그래서 프림 때문에 잘 먹지도 않는 자판기 커피를 꺼내서 조금 있다가 뒤따라 나갔다. 다들 실외 테라스에서 PD, 회의 스텝들, 보조 작가들이 담배를 피며 조근조근 대화도 하고 있었다. 그때 담배를 굳이 배워야 하나 고민도 했었다. 친구한테 말하고 그 날 밤 친구랑 맥주 한 잔 마시러 가서 담배 한 갑을 사서 테이블 위에 올려 놓고 한참을 쳐다 보고 망설이다 한 개비 꺼내 불을 붙여 봤다.

강력계 형사 일을 한 아빠와 약속한 게 있었는데, 그런 친정 아빠 밑에서 교육 받고 자란 게 있는데, 이걸 안 피면 단체 생활에서 나만 계속 뻘쭘해 지나 싶은 갈등에 한 참을 쳐다만 봤다. 그러다 용기내 한 입 물어 봤다.

그때의 그 기분은 진짜 다신 생각하기 싫다. 매캐하고, 입 안에 뭔가 들어 오면 안 되는 맛이 들어와 나를 괴롭히는 거 같았다. 친구가 웃었다.


"너 절대 안되겠다. 오빠가 그러는데 담배는 속 담배를 펴야 제대로 피는 거래. 너는 겉담배 피는 거 보니 절대 담배 못 펴."


그 다음부터는 담배는 손에 대지도 않았다.  그런데 나는 술도 잘 못 마셨다. 술 자리 자체가 부담이고 스트레스였다. 친구들과 객기로 술 마시고 서너 번 필름이 끊겨 본 적이 있다. 내가 길바닥에 주저 앉아 울면서 집에 안 간다고 하더란다.

서너 번 업혀 들어 가 보니, 그 다음 날 속은 속대로 쓰리고 머리는 머리대로 아프고, 도저히 할 짓이 아니었다. 아무리 먹어도 안 늘었다. 소주는 아예 입에도 못 댄다. 양주 같은 건 말할 것도 없다. 입에 대는 순간 얼굴이 찡그려지고 속이 안 좋다. 그래서 밤 12시 넘어 그  당시, 나이트 뉴스 진행하시는 아나운서 분이 여의도 방송국(나 20대 때에는 방송국이 다 여의도에 있었다.) 앞 포장마차에서 몇 명이 한 잔 중인데 나오라고 전화가 와도 나가지 않았다. 새벽에 가수 분이 전화가 와 통화를 하고, 술 한 잔 하자는 것도 하지 않았다. 지금은 조금 후회된다.

왜냐하면 방송국도 인맥이 중요하다. 인맥이 넓은 게 좋다는 걸 나중에 깨닫고 후회 많이 했다. 그때는 내가 너무 고지식하고 유도리가 없었다. 아줌마가 된 지금처럼 털털하니 유하지가 못했다. 여자로서 남자들도 많고, 워낙 화려하기도 하지만 반대로 또 바닥도 보이는 방송 바닥을 혼자 대면하며 긴장돼 있었다.


그러면서도 또 성질이 은근 보통 아니었다. 촬영 장에서 누가 아프다 하면 보조 스텝에게 따스한 물만 챙겨 주라는 둥 챙긴다. 그때는 미팅 프로도 알려지지 않은 단역이나 연예인 지망생들이 출연하고 작가가 직업, 나이, 컨셉을 다 설정해 주던 시기다. 촬영하며 출연자들이 내가 원한 방향의 연기가 계속 안되면 10번을 계속 설명하고 설득하다가 10번의 인내심이 다하면 화를 내고 촬영장 분위기를 다 뒤집어 엎었었다.

출연자들 섭외해 주는 대행 엔터 회사들도 잘 확인해야 한다. 고등학생이 성인이라고 주민등록 속여서 왔는데 확인 안해 줘서 촬영은 마친 상태고 난리 난 적도 있다.


M.net 음악 프로 구성안 짜고 대본 쓸 때는 신사동 사무실까지 가서 후딱 일만 해 주고 왔던 적도 있다. 일을 하고 나면 일한 날짜와 내가 일한 여부를 메모해 놔야 한다. 일하고 바로 돈을 입금 받는게 아니라서 잘 적어 놓고 돈이 잘 입금 됐는지 확인을 꼭 해야 한다.

청담동 녹음실에 한 번 들렸을 때 악기 세션맨 분이 작은 미니 수첩에 자기가 일한 날짜와 일한 장소와 일한 내역을 쭉 적어 놓고 돈이 입금된 거는 선으로 그어 표시해 놓은 것도 봤다. 내 돈은 내가 챙겨야 한다.

계약서가 없는 뮤직비디오 같은 일은 글을 써 주고도 돈을 못 받는 경우도 많아서다.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제작 대행 회사에서도 간혹 돈 입금을 안해 주는 경우가 있다. 그러니 자기가 일한 돈을 자기가 잘 챙겨야 한다.


뮤직비디오 전승호 감독님 밑에서 1년 일할 때는 감독님이 여동생처럼 잘 챙겨 주시고, 광동제약 홍보영상 PT도 임원들 앞에서 해 보는 기회도 주셔서 꽤 재밌게 배려 받으며 일한 거 같다.


작가로서 제일 중요한 건 저직권 등록이다. 자신이 쓴 글, 자신의 기획서, 자신의 아이템을 저작권 등록 하기 전에는 어디에 공개하지 않는게 좋다. 물론, 저작권 등록해도 힘 있는 제작사에 도용 당하는 경우가 있다.

김수현 작가님이 설립하신 여의도 방송 작가 협회에서 수업 받을 때 같은 반 언니들이 얘기해 줄 정도였다.


"뭐야? 네 기획안 카피까지 똑같이 갖다 썼네."


하지만 나는 반박하지도 그 제작사에 전화해 따지지도 못했다. 힘이 없으니까 어쩔 수 없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차피 작가로 이름도 못 올릴 거 가서 진상이라고 부리고 따지고 난리나 쳐 볼 걸 그랬다 싶다. 작사도 유명 작곡가님 작가 공모에서 최종 심사까지 오른 적이 있다. 최종 심사에 나랑 다른 남자 분 한 분이 올랐는데 내 작사글은 글을 잘 쓰는데 노래 가사라고 하기엔 조금 어려워서 떨어졌다고 한다.


작가도 구성작가, 작사, 소설가, 대필 작가, 드라마 작가, 영화 시나리오 작가, 시, 동시, 동화 등의 각 분야 별 글 쓰는 법이 다르다는  걸 확실하게 인지해야 한다.

드라마 작가도 마찬가지다. 코믹, 스릴러, 가족 드라마, 로맨스, 사극 등 장르마다 대사 쓰는 법과 호흡법과 구성법이 다르다는 걸 잘 캐치하고 써야 한다. 그 감각 없으면 안된다.

구성작가도 마찬가지다. 다큐, 예능, 미팅 프로 등 그 프로그램의 분위기나 특성을 잘 알고 구성하고 대본을 써야 한다. 구성 작가는 되도록 방송작 막내 작가부터 시작하라고 권한다. 처음엔 페이도 작가. 밤샘에, 외부 촬영에 스케줄은 빡쎄고 힘드니 본인이 진짜 좋아서 즐기며 버틸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요즘은 작사가를 키우는 학원, 방송 작가를 키우는 여의도 방송 작가 협회 등의 기관들이 있다. 그 기관들을 찾아가 수업에서 살아 남아 커 가면 좋다. 기관도 제대로 된 정보로 제대로 된 곳으로 가라. 아무 곳이나 찾아 들어가지 마라. 아무 인맥 없이, 아무 연고 없이 할 수 있는 바닥이 아니다. 드라마 공모전도 평창동에 기존 인기 드라마 작가 분이 공모전 당선 수업을 하는 곳이 있다. 혼자서 맨 땅에 헤딩하려고 하지 말라는 거다. 절대 성공 못한다. 절대 이름 못 올린다.


방송 바닥도 빈부 격차가 큰 바닥이다. 성공하지  못하면 배고프다. 성공하지 못하면 나 좀 한 번만 봐 달라고 해도 안 봐 준다. 성공한 선배들이 나를 쳐다봐 줄 거란 기대 따위는 버려라. 쉽지 않다. 그리고 열심히만 한다고 성공할 수 있는 바닥이 아니다. 실력 있고 끼 있는 사람들은 널리고 널렸다. 운도 따라 줘야 한다. 인맥 운, 성공 운, 기회가 주어지는 운, 인기 운 등이 따라 줘야 한다. 작가는 글만 잘 쓰면 된다고 생각하지 마라.

인기 있는 아이템이 대세를 타고나 줘야 한다. 시청률 없으면 계속 일하기 힘들다. 시청률 안 나오는 작가를  계속 쓰는 방송국이나 제작사는 없다. 온라인 작가 활동도 결국 마찬가지다. 글 잘 쓰는 것만은 절대 소용 없다. 인기가 있어야 한다. 대중이나 구독자에게 인기 없는 작가는 외면 당한다.

나도 프로그램 메인 작가 하다가, 시청률이 안 나와 방송국에서 3, 4회까지만 촬영하고 방송 내보낸 뒤 프로그램 폐지 되고 하차 당한 적이 있다.


어디든 그렇지만 방송 바닥은 정말 냉정한 곳이다. 인간적인 감성을 기대하지 마라. 소년이나 소녀 같은 환상 같은 거 품고 뛰어 들지 말았음 싶다. 다친다. 상처 받는다. 나를 키워  주는 제작사 없이는 작가도 힘들다.  


내가  작가로서 진짜 더 이상의 기대나 희망을 갖기엔 내 나이도 어느 새 오십을 바라 보고 있고, 미련만 남아 아쉽기만 하다는 걸 인정하기에 편하게 털어 놓을 수  있다 싶다. 참 미련이 남는 게 씁슬하긴 하다.

한 번 들어가면 쉽게 포기해지지도 않는 게 마약과도 같은 방송 일이다. 그러니 힘 내고, 잘 생각 했음 싶다. 힘들어도, 배고파도 버티고 인내하고 긴 무명을 견디고 해 볼 수 있다면 도전해라. 하지만 화려함에서 정말 밑바닥까지 존재하는 그  바닥에서 환상만 갖고 독한 마음 없이 달려들지는 말았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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