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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돌아온 오리 Dec 07. 2023

결혼은 현실이다.

결혼해 보고 알았다. 아니 결혼식 날 잡은 순간부터 알았던 거 같다.

                      

"결혼식 취소해요. OO이가 이 결혼 후회하고 있어요. 내 말 듣는 게 좋을 거에요."


나는 무슨 말을 해야할지 멍하기만 했다. 지금 이 새벽 2시에 이게 무슨 일인지 상황 파악이 안됐다. 걸걸하게 크러쉬한 그녀의 목소리가 나에게 비수를 꽂고 있는데 갑자기 누가 핸드폰을 뺏은 건지, 급 끊겨 버렸다.

나는 눈물이 났다. 결혼식 날짜가 열흘 밖에 안 남았다. 청첩장은 이미 다 돌려진 상태다.

나는 너무 멍하고 어이가 없어서 불이 다 꺼진 내 방 안에서 눈물만 흘렸다.

나와 만나기 2년 전에 헤어졌다는 남의 편의 전여친이 돈 안 주면 결혼식 당일에 깡패 데리고 쳐들어 오겠다는 협박 받은지 얼마나 됐다고 이런 일이 나에게 생기는 건지 혼란스러웠다. 그때 알았어야 했다.






결혼식 때부터 요란 했던 나는, 무엇을 기대하고 이 남자와 결혼을 했는지 생각이 나질 않는다. 다음 날, 아침에 광화문 거리를 혼자 목적지 없이 걸어 다녔다. 아침에 광화문에 도착해 오후 4시가 넘도록 그냥 걸어 다녔다.

집 앞에 갔더니 남의 편이 꽃다발을 들고 서 있었다. 나는 울었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결혼해 살다 보니 어느 새 11년 째다. 결혼이란 게 어느 가수의 노래 가사처럼 아침에 일어나면 날 위해 준비된 커피 향이 가득한 생활이 아니라는 걸 알 만큼 아는 때가 되었을 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 성장 환경부터 가정에 대한 생각과 행동이 너무 다르다는 것도 모두 알게 됐다.


형사 공무원 아버지 밑에서 안정적이고 고생 없이 성장하며 엄마의 교육열에 이끌려 학원이란 학원도 다 다녀 봤던 나!

부모님이 뭐든지 알아서 다 해 줘서 세상 물정 모르고 내 꿈만 던 나!

뭐든지 백화점에서 구입해야 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살던 나!


진짜 시골에서 학원 하나 안 다니고 독립적인 생활력으로 성장한 이 남자!

자신의 꿈과 생활력을 다 무게감 있게 짊어지고 악착 같이 살아야 했던 이 남자!

백화점이 편하지 않던 이 남자!


그런 남과 여가 만나 하나의 공간에서 가정이란 걸 이루어 살아 보겠다며 한 결혼이다.

이렇게 극과 극이고 다른 , 결혼식 날 잡고부터 사건이 터지기 시작하는데 버라이어티 했다.그때는 연민이든, 어떤 감정이든 콩깍지가 씌웠었나 보다.


결혼식 당일 날도 평탄치 만은 않았다.

시댁 쪽 어른들은 약속이나 한 듯 결혼식 끝나고 관광 버스 시간 됐다고 다 같이 한 번에 내려가 버리셨다. 시댁 쪽에서는 이제 막 결혼식을 올린 커플이 리무진을 타는 걸 보고 가겠다고 대기하시는 분이 한 명도 없었다.

식장 계약 때 안전하게 200명으로 하라는 내 말을 안 듣고 300명 계약으로 고집 부리던 남편은 결제금 500만원이 모자라 빨개진 얼굴로 식장 직원과 싸우려 하고 있었다. 이제 막 결혼식을 올린 남편은 돈이 없는데 어떡하냐며 꼭 초등학생 아이처럼 울 듯이 서 있었다. 그 모습을 당황해 지켜 보던 친정 아빠가 500만원을 대신 내 주셨다


그 당시 대통령 선거를 5일이나 앞두고 있는 주말에 결혼식을 올렸다. 남편이 대통령 선거를 꼭 하고 가겠다 해서 첫 날 밤을 삼성역 호텔에서 묶었다. 첫날 밤 호텔비와 호텔까지 타고 간 리무진 비용도 친정에서 지불했다. 신혼여행비는 반반씩 냈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선거 치르자 마자 태국으로 신혼 여행을 떠났다. 신혼 여행은 즐거웠다.


신혼 여행에서 돌아와 돈이 하나도 없다며 나를 분당에 있는 반지하로 데리고 갔다. 처음이었다. 작은 방 한 개에, 새로 인테리어도 안 돼 있는 작은 화장실에, 길고 좁은 부엌 하나가 다인 반지하를 보며 친정 부모님이 속상해 하실까봐 집이 어디냐고 묻는 엄마에게 사실대로 말하지 못했다.

남편과 결혼 생활을 시작한 지 일주일 만에 그 사실을 알게 된 친정 엄마가 내 명의로 사 놓으셨던 친정 부근에 있는 15평 아파트를 넘겨 주셨다. 덕분에 우리는  자가로 시작 했다.  

일원 한 푼 없던 남의 편 대신 내가 그 당시 집필한 소설 계약비 2천 만원으로 도배를 하고, 화장실만 새로 리모델링해 들어가 살았다. 몇 달은 내가 받은 소설 비로 생활을 했다.


나는 서른 후반인 나이에도 결혼 6개월 만에 자연 임신이 되었고, 형제 하나 없는 남편의 바램 대로 아들을 얻어 자연 분만까지 무사히 해 냈다. 아들을 낳았을 때 시댁 쪽에서는 아무도 병원이나 조리원에 아이 보러 오지를 않으셨다. 아들 때도 그렇게 했으니 똑같이 해 줘야 한다며 병원비도 친정 아빠가 다 내 주셨고, 내 쪽 친구들과 지인들과 친정 가족들의 방문으로만 축하를 받았을 뿐이다.


나는 영업과 사업은 죽어라 열심히 뛰지 않으면 안된다는 말만 믿고 밖으로만 도는 남편 대신 온전히 독박 육아를 독박 살림을 하며 잘 살려는 마음 하나로 버텼다. 하지만 결혼 하고 나서도 버라이어티한 일들은 간간이 일어났다.


나와 만나기 2년 전에 헤어졌다던 남편의 전 여친이 계속 문제가 되었다. 나에게 남편을 비방하는 SNS 쪽지와 mail을 하루에도 수십통은 보내며 괴롭혔다. 나는 남편의 그 전 여친 때문에 카스며, 페이스 북이며, SNS 활동 자체를 아예 할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남의 편에게 받을 돈을 나에게라도 받아 내겠다며 내 명의로 돼 있는 신혼 집 안의 물품들에 전부 압류를 걸었다.

아들이 4살 때였고, 아들의 어린이 집 끝난 시간에 맞춰 아들을 픽업해 집으로 오자마자 연락도 없이 쳐들어 온 법원 직원 2명과 남편의 전 여친을 맞아야 했다. 어린 애가 있는 집에 사전 연락도 없이 오는 법이 어딨냐고 따졌더니 원래 압류는 연락 없이 온다며, 어린 애가 쳐다보는데도 자기네는 미안한 거 하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법의 두 얼굴과 이해할 수 없는 양면성을 나와 어린 아들이 고스란히 마주해야 했다.

그뿐 만이 아니다. 남의 편은모든게 일방적이고 의논 자체가 없다. 어쩔 때는 내가 와이프가 맞나 싶을 정도다.

살림만 해 온 나한테 이사도 전부 맡기고 뒷전이었다. 일 원 한 푼을 안 주고 내가 아파트 팔고 내 명의로 계약을 하고 내 명의로 대출 받고, 이사하며 써야 했던 모든 돈을 정리하고 남은 돈 600만원도 본인이 쓴다고 가지고 나갔다.

아이 앞에서도 욱하고 화가 나면 쌍 시옷 욕을 해 나는 계속 경고를 하며 싸웠다. 초등 저학년 아들이 자기 친구들이 아빠가 욕하는 거 들었을까봐 창피했단 말에 충격을 받았는지 조금 조심하기 시작하는 거 같았다.


결혼은 환상이나 달달한 코코아가 아니다. 내가 다짐 했던 대로 믿음, 잘 살겠다는 의지, 서로 다르다는 걸 이해하고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마음 만으로 살 수 있는 게 아니다. 나는 이제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뭘 잘못했는데? 너네 둘 먹여 살린다고 죽어라 열심히 돈 벌러 다닌 거 밖에 없어."


나는 그 오만하고 뻔뻔한 얼굴을 후려 갈겨 주고 싶었다. 그리고 어쩜 둘이 똑같이 뻔뻔하다 못해 끼만 다분한 남녀끼리 만나서 잘도 놀았나 싶다. 그러니 제발 데려가, 이제 남의 편을 너에게 줄테니 데려가라고 속으로 소리 쳤다. 제발 남의 편이랑 재혼하라고 있는 힘을 다해 마음 속으로 소리 쳤다.


미안한 마음 없이 말도 안되는 변명만 하고 발 빼는 상간녀나 뻔뻔하게 자기는 잘못한 게 없다는 남의 편이나 어쩜 그리 사람 같지 않은지, 참 똑같았다. 똑같으니까 그렇게 만나서 놀 거 다 놀더니, 명백한 증거 앞에서도  말도 안되는 변명들만 하며 지들 발등을 스스로 찍는구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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