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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훈 Mar 26. 2024

콜럼버스의 설탕의 재발견과 비만인의 등장

1492년 10월 12일 새벽 2시. 중앙아메리카 바하마 제도의 한 섬. 일단의 유럽인들이 상륙했다. 스페인 카스티야 왕국의 여왕 이사벨 1세의 지원으로 항해에 나선 콜럼버스(1451~1506년) 일행이었다.

콜럼버스는 1492년 8월 3일 스페인의 파로스항에서 출항했다. 산타마리아호, 핀타호, 니나호로 이름 된 세 척의 배에 120명이 승선했다. 향신료와 황금 등의 확보로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인도 항로 개척이 목적이었다. 선단은 유럽 대륙에서 서쪽으로 대서양을 처음으로 횡단하는 대항해를 시작했다.

그러나 열흘이 지나도, 한 달을 항해해도 보이는 것은 바다와 하늘뿐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파도는 높아만 졌다. 선원들은 망망대해에서 불확실성과 불안감에 흔들렸다. 선장 콜럼버스는 곧 육지가 보일 것이라고 다독였다. 그러나 지친 그들에게 보이는 육지는 신기루였다. 선원들의 불안은 뭍에 닿기 전에 죽을 것이라는 공포로 점점 바뀌었다. 선상에서는 폭동 등 험악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바다 생활이 두 달도 넘은 10월 12일 새벽 2시 무렵, 선원 로드리고 데 트리아나가 외쳤다. “육지다!” 카스티야의 여왕은 육지를 처음으로 본 사람에게 종신연금을 약속했었다. 그런데 콜럼버스는 부하의 공을 가로챘다. 자신이 이미 몇 시간 전에 뭍에서 반사되는 불빛을 보았다는 주장이었다.

콜럼버스 일행은 섬에 상륙했다. 천신만고 끝에 땅을 밟은 콜럼버스는 신에게 감사 예배를 올렸다. 또 원주민이 과나하니라 부르는 섬을 구세주의 섬이라는 의미인 산살바도르(San Salvador)로 이름했다. 콜럼버스가 인도의 일부라고 생각한 이곳은 바하마 제도의 한 섬이다. 미국의 플로리다 남동쪽 카리브에 있는 바하마 제도는 약 700개의 섬과 2천 개가 넘는 산호초로 구성돼 있다. 현재 인구는 약 40만 명이다. 그러나 절대다수가 아프리카 이주민 후손으로 원주민은 거의 전무한 상태다.

​섬의 원주민은 인디언 루카얀(Lucayan)이었다. 원주민들은 처음 본 선단에 놀랐다. 또 금발에 흰 피부의 사람들에게도 놀랐다. 그들은 콜럼버스 일행을 하늘에서 온 손님으로 접대했다. 원주민 추장 등 지도자들은 뱃사람들에게 음식과 마실 것을 주었다. 또 콜럼버스의 선박에도 올라갔다. 섬에 거처를 마련한 콜럼버스는 추장을 포함한 원주민들과 식사도 함께 했다.

콜럼버스는 식탐이 없었다. 1m 80cm가 넘는 건장한 체격이었지만 식도락이 아닌 생명 유지 방편으로 음식을 섭취했다. 그러나 3개월간 섬에 머물며 원주민의 음식을 관찰했다. 난생처음 접한 그들의 색다른 음식에 호기심을 보였다.

그는 아주 좋아한 원주민의 빵에 대해 “매우 하얗고 맛이 뛰어나다”라고 평했다. 원주민이 카사바라고 부르는 빵은 참마와 쑥(아예스)으로 만들었다. 콜럼버스는 유럽에서는 보지 못한 다양한 물고기의 종류에도 환호했고, 나무 형태의 무수한 열매를 맺은 옥수수를 비롯한 칠리고추, 고구마 등에 흥미로워했다. 또 그는 새로 접한 음식을 유럽에서 이미 먹었던 당근이나 밤과 비교해 품평하고, 지금까지 맛보지 않은 매우 특이한 맛이라고 묘사도 했다.

추장이 베푼 연회에서는 빵과 함께 새고기, 새우, 서너 가지 고구마 음식을 맛보았다. 식탁에는 당시 아메리카에는 없던 돼지고기, 양고기, 염소고기가 빠졌다. 현대인에게 익숙한 설탕이 들어간 음식도 없었다. 또 당분이 많은 오렌지, 배, 복숭아, 양파도 없었다. 콜럼버스는 1차 탐험을 마치고 귀국할 때 이 지역의 빵과 함께 빵의 원료인 쑥의 일종인 아예스, 가공한 생선을 배에 가득 실었다.

향신료와 황금을 찾기에 혈안이 된 콜럼버스와 스페인 식민주의자들은 점점 본색을 드러냈다. 계속 아메리카로 건너온 스페인 사람들은 정복과 탐험, 강제노역, 성 학대 등 가공할 폭력으로 원주민을 비극으로 몰고 갔다. 산살바도르의 원주민 루카얀은 스페인 식민주의자들의 강제노역과 학살, 노예무역 그리고 유럽인이 갖고 온 병균에 전염돼 역사에서 사라졌다

콜럼버스는 2차 원정 때 설탕을 만들 수 있는 사탕수수를 히스파니올라에 가져갔다. 인도에서 최초 개발된 설탕은 중세 유럽 국가에서는 꿀보다 비싼 수입품이었다. 처가가 마데이라 제도에서 설탕 농장을 했던 콜럼버스는 사탕수수 묘목을 카리브해에 가져갔다.

온화한 카리브해는 사탕수수 재배에 최적지였다. 사탕수수 재배를 위해서는 막대한 노동력이 필요했다. 스페인 사람들은 아프리카의 노예무역을 통해 노동력을 충당했고, 설탕 플랜테이션 농업으로 막대한 부를 거뒀다. 이후 설탕 산업의 주도권은 영국과 프랑스로 넘어갔다. 그러나 인디언 학대, 흑인 노예무역, 노동력 착취의 검은 그림자는 계속됐다.

콜럼버스 이전에도 아메리카 대륙에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또 유럽인이나 아시아인도 이미 방문했다는 이론도 있다. 이에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을 요즘에는 재발견이나 접촉으로도 표현한다. 콜럼버스는 카리브해에 사탕수수를 전파했다. 이는 콜럼버스에 의한 설탕의 재발견이라고 해도 좋을 듯싶다.

설탕은 세계인의 식탁 지도를 크게 바꿨다. 맛을 내기 위해 거의 모든 음식에 설탕이 들어가게 되었다. 음식은 물론 기호식품 커피와 코코아, 크림에도 설탕이 빠지지 않았다. 음식의 주요한 경쟁력은 맛이다. 맛을 내는 데 설탕 등 당분은 필수다. 설탕 섭취가 갈수록 많아지는 이유다.
 달콤한 설탕은 단기기억력 상승, 통증 완화 등 긍정적 요소도 있다. 그러나 너무 많이 섭취하면 비만, 당뇨, 충치 위험이 높아진다. 특히 액체상태의 당분은 혈당을 급격히 올려 인슐린 분비를 증가시키고 그로 인해  지방을 저장하려는 경향이 커져 뱃살이 증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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