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음가는대로 Dec 24. 2023

첫 김장 속으로,  “색다른 맛과 행복”의 다른 표현!

온 가족이 나서서 더 행복했던, 열흘간의 120 포기 김장 잔치 이야기

11.16.(목), 목포에 사는 여동생이 새벽에 무안 일로읍 5일장에서 생새우를 사서 어머님께 갖다 드렸다. 김장을 한 달 안에 할 것이라는 신호탄이다. 어머님은 새우를 체로 걸러 불순물을 제거하고 물기를 빼고 계신다. 평일인데 회사 워크숍 덕분에 조금 늦게 출근해도 되는 여유가 생겨 장에 일찍 다녀왔단다. 올해도 김장 김치의 시원한 맛을 보장할 싱싱한 생새우이다. 무안이 바닷가라서 5일장에 싱싱한 해산물이 많고, 또 부지런한 여동생 덕분에 우리 식구들이 덕을 보곤 한다.


나는 김장을 버무리는 날, 수육으로 사용할 고기를 미박삼겹살, 일명 오겹살로 살 것인지 앞다릿살로 살 것인지 의견을 물었더니 아무 반응이 없다. 오겹살은 기름진 맛이 좋긴 하나 가격이 비싸고, 앞다릿살은 기름진 맛은 떨어지나 가격이 아주 싸다는 등 짧은 내 지식을 동원해서 그 차이를 설명했더니 김장 날짜가 바뀔 수도 있으니 기다리라고 한다. 날짜가 정해지지 않아 아무도 대응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11.24.(금), 김장 날짜가 다음 주말, 12.3.(토)로 정해졌다. 배추를 절여서 보내주시던 고모님이 올해는 확답을 주지 못하셔서 날짜를 정하지 못했는데 가능하다고 하셔서 일주일 후로 결정했단다. 더 추워지기 전에 하는 것이 좋겠다.


11.29.(수) 누나가 김장을 조금 늦게 하자고 오남매 카톡에 다시 올렸다. 배추를 농산물 도매시장에서 직접 사다가 절여서 하자고도 한다. 무슨 일일까? 나중에 들으니 배추를 절여주기로 하셨던 고모님이 이번 주말에 조달할 수가 없다고 하셨단다. 올해 배추 농사가 안되어 동네에서 사서라도 원하는 양만큼 절여주려고 했으나 주변도 사정이 비슷해 양을 맞출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런 사연이 있었구나. 김장은 배추 절이는 것이 절반 이상이라고 들었기 때문에 걱정이 앞선다. 올해는 퇴직 후 첫 김장이라서 내가 나서서 도움을 주고자 했는데 어떻게 해야 도움을 줄지 막막하다. 막내는 절인 배추를 사다가 조금만 하자고 한다. 우리 집은 김치를 아주 많이 먹기 때문에 그러고 싶은 마음은 없다. 혜안을 모아보자. 어머님이 계시는 시골에서 배추를 절여서 버무리기까지 마치는 방법, 절인 배추를 광주로 가져와 버무리는 방법 등을 고려했으나 누나가 김칫소를 직접 만들어야 한다는 사실은 변할 수 없는 상수라서 선택의 폭이 넓지 않다.


  날짜는 12.9.(토)로 당초 계획보다 1주일 미뤄서 정했다. 이번 주는 준비할 수가 없고, 12.16.(토)에는 조카 졸업작품 전시회에 참석해야 하고, 12.23.(토)은 성탄절 연휴라서 많은 사람이 움직일 것이기 때문에 복잡할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12.7.(목)에는 배추를 절여야 하고 12.8.(금)에는 물기를 빼고, 김칫소를 만들어야 해서 우리가 일정에 맞게 움직여야 할 것 같다.


고민 끝에 12.7.(목) 광주로 내려가 배추 절이는 것을 도와주고 바로 시골로 내려가 어머님 댁에서 자고, 12.8.(금) 오후에 어머님이 준비하신 재료를 챙겨 어머님을 모시고 올라와 김칫소 만드는 것을 돕기로 했다. 김장을 버무리는 것은 12.9.(토) 아침부터 시작하면 오전 중에 끝날 것이다.


12.6.(수), 김장 직후에 김치와 함께 수육으로 먹을 돼지고기를 온라인 쇼핑몰, ‘미○○스’에서 구매했다. 모두의 의견을 들어 껍질과 비계를 벗기지 않은 앞다릿살, 미박전지 네 팩을 159,600원, 그리고 미박삼겹살, 오겹살 세 판을 326,760원에 구매했다. 배송비는 없다더니 포장비가 각각 10,000원씩 추가되어 506,360원이 결제되었다. 이 정도라면 우리가 오겹살 한 판을 가져와도 나머지 네 가족이 충분하게 먹고 일부는 가져가서 다른 가족과 함께 먹을 수 있는 양이다. 배송에 이틀이 소요되어 금요일에 필요한 둘째 여동생을 위해 하루 먼저 주문했다. 광주 누나 집 주소를 확인하고 주문을 마쳤다.


12.7.(목) 09:00가 넘어 광주로 출발했다. 목포 여동생은 아침에 각굴 세 망을 사서 어머님께 갖다 드렸단다. 88세의 노구에도 굴 까는 솜씨는 전혀 녹슬지 않아 금방 다 까셨단다. 한 망은 삶아서 먹겠다는 동생들이 있어서 두 망만 까시라고 미리 말씀드렸다. 생굴도 김장 김치에 바닷가의 신선한 맛을 더할 중요한 재료이다.

가는 길에 점심을 해결하고 13:30, 광주 누나네 집에 도착했다. 누나 혼자서 배추를 잘라 소금물에 절이고 있다. 어젯밤 딸이 120 포기 배추 밑동을 칼로 모두 잘랐단다. 힘들지만 내가 먹을 것이니 군말하지 않고 자른다면서 혼자 다 잘랐다는 것이다. 기특하다. 오늘은 엄마 대신 가게에서 일하고 있단다. 둘째 동생도 시댁에서 오늘부터 시작한 김장 때문에 수능시험을 마친 아들이 가게에서 엄마 대신 일하는 중이란다. 집안 김장 때문에 아이들이 고생이다.


아내는 누나와 함께 소금을 뿌려 배추를 절이기 시작했다. 둘이 손을 합치니 속도가 훨씬 빠르고 심심하지 않아 보인다. 아내는 배추를 가르고, 소금을 뿌리는 고도의 작업은 누나가 맡았다. 막내가 짜게 절이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면서 소금의 사용을 최대한 절제하고 있다. 배추를 자르는 아내에게 Youtube 동영상에서 본 대로 밑동과 가장 안쪽 부분을 동시에 조금만 잘라내면 부스러기를 줄일 수 있다고 제법 아는 체했다. 아내도 처음 듣는 말이란다.


나는 그사이에 방금 도착한 고기를 부엌에서 손질하기 시작했다. 1차적으로 손질된 상태라 기름기, 오돌뼈 등만 제거하면 될 줄 알았는데 손질에 시간이 제법 오래 걸린다. 비계와 살코기의 비율, 신선도 등은 만족스러울 정도로 고기 상태는 좋다. ○○ 녹돈으로 선택하길 잘했다. 오겹살은 식감을 해치는 오돌뼈와 느끼한 기름을 제거하여 수육에 적절한 두께로 9 등분했다. 미투리 부분은 따로 구분해서 기름기를 좋아하지 않은 사람이 가져가게 했다. 앞다릿살은 부위 사이의 막과 기름을 제거 후 수육에 알맞게 다섯 덩어리로 등분해서 정리하고, 부채덮개살 등 자투리는 별도로 정리해서 나중에 김치찌개를 끓이는 데에 사용하게 했다. 고기 질이 좋아 버릴 것이 거의 없다. 모두 바로 삶아서 먹을 수 있게 적절한 두께와 크기로 자르고 정리하니 두 시간이 훌쩍 지났다.

오겹살, 껍질과 비계를 제거하지 않은 삼겹살

내가 고기를 정리하는 사이에 누나와 아내는 배추를 모두 절였다. 여기서 끝이 아니라 네 시간이 지나면 위에 있는 배추와 아래에 있는 배추의 위치를 바꿔주는 작업을 두세 번 더 해야 한다. 절이는 것이 절반 이상이라는 말이 실감이 간다.

배추 절이기

16:00가 다 되어 홀가분한 마음으로 어머님이 계시는 영암으로 출발했다. 배추 절이는 데에 이렇게라도 손을 더해 아내도, 나도 마음이 홀가분하다. 누나는 내일 우리가 어머님을 모시고 올라올 때 챙겨 올 것이 아주 많다면서 양이 너무 많아 모두 싣고 올 수 있을는지 걱정한다. 아이들이 함께 내려오지 않아 어머님만 뒷자리에 타시면 되니 충분할 것이다.


12.8.(금) 어머님은 아침을 드신 후 누나가 부탁한 갓을, 미리 허락을 받은 이웃집 밭에 가셔서 아내와 함께 두 봉지를 캐 오셨다. 이미 김장을 마쳐 마음껏 가져가도 된다는 말에 두 봉지를 캐셨는데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단다. 내년에는 우리도 길러야겠다. 밭에서 캐면서 바로 정리해서 가져온 덕분에 손질은 따로 하지 않아도 된단다. 매콤하게 톡 쏘는 갓김치는 고기는 물론 어떤 음식에도 잘 어울려 겨우내 우리 식탁에서 빠지지 않는 마법의 반찬이다.


점심 후 바로 광주로 올라가자고 하신다. 가져가야 할 재료가 생각보다 많다. 고춧가루, 깐 마늘, 생새우, 액젓, 굴 등 어머님이 직접 재배하시거나 동네에서 사서 손질해 마련해 두신 것이다. 우리가 가져갈 쌀까지 가져가야 해서 차에 겨우 실었다. 뒷자리에 타신 어머님 곁에는 빈 김치통 다섯 개를 실어야 할 정도이다.

14:18, 광주 누나네 집에 도착했더니 아무도 없다. 전화로 물어 열쇠를 찾아 열고 들어가니 배추 일부는 이미 건져서 물을 빼는 중이다. 누나는 가게에서 일하고 있는데 손님이 많아서 당장 올 수가 없다면서 통닭 한 마리를 시켰으니 먹으면서 놀고 있으라고 한다. 놀고 있기에는 미안한 마음이 들어 조금이라도 일손을 도와야 한다는 생각에 아내와 함께 밖으로 나와 수돗가에서 무, 당근, 갓을 깨끗하게 씻어 물기를 빼기 위해 플라스틱 소쿠리에 넣어두었다.


17:00가 넘어 누나가 집에 돌아오자 활기가 띤다. 절인 배추를 건져 씻고 물기를 빼기 시작했다. 아내는 건지고 누나는 물에 소금기를 씻고 나는 쌓기 시작했다. 세 사람이 힘을 모으니 금방 끝난다. 맨 위에는 제법 무게가 나가는 무 서너 단을 올려 물기가 더 잘 빠지게 나름대로 머리를 썼다. 작년까지는 이 과정을 거치지 않고 바로 김칫소만 만들어 다음 날 절인 배추와 버무리는 것으로 김장을 마쳤다. 그래서 노량진수산시장에서 산 연어로 회, 초밥, 사케동 등을 먹으면서 여유롭게 준비했었는데 올해는 그런 여유를 가질 수가 없다.

절인 배추 물 빼기

18:00가 넘어 막내가 와서 마늘, 양파, 무, 생강, 배 등 채소와 생새우, 새우젓 등 생선을 함께 넣어서 갈아 왔다. 아내 말에 따르면 마른 고추를 물에 적신 후 갈아서 김치를 담그는 곳은 전남지역이 유일해서 이렇게 재료를 갈아주는 곳도 광주에만 있단다. 25년 동안 나를 따라 전국을 돌아다니면서도 광주 외에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나도 30년 前 고등학교에 걸어 다닐 때 동네 가게마다 “물고추 갑니다.”라고 서 있는 간판을 자주 봤는데 그때마다 맞춤법이 저게 맞는지, 아니면 “물고추 갈읍니다.”가 맞는지 궁금했던 기억이 있다. “물고추 갈아드립니다.”라고 했으면 더 공손하고 내가 맞춤법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인데. 가는 삯으로 20,000원을 주었다는데 큰 통으로 대여섯 개나 되는 것을 보니 집에서 갈기가 쉽지 않겠다.


누나가 주문한 옛날통닭 덕분에 저녁을 먹지 않아도 될 것 같았는데 어머님께서는 밥을 달라고 하신다. 큰 딸네 집에 와서 밥도 못 얻어먹었다고 소문낼 뻔했다고 농담하신다. 우리와 식습관이 다르신데 미처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해 죄송하다.


김칫소를 만들기 위한 채소 손질에 착수했다. 고춧가루처럼 바로 사용할 수 있는 재료도 있으나 채를 썰어야 할 것이 많다. ① 무 ② 당근 ③ 갓 ④ 양파 ⑤ 쪽파 ⑥ 청각 등이다. 함께 나서서 채칼을 이용하여 채를 썰기 시작했는데 양이 많아 진척이 없다. 나도 손을 놓고 있을 수가 없어서 아내 혼자서 힘겹게 감당하던 무와 당근을 채칼로 순식간에 썰어주었다. 매형이 외국에서 사 온 채칼이 무척 위험해 보여 아무도 사용하지 않았다는데 내가 힘을 주어 사용하니 아주 잘 든다. 다들 채칼의 위력을 제대로 봤다면서 괜히 샀다고 핀잔을 받아왔던 매형의 혜안을 이제야 칭찬한다. 마지막에 손질하는 청각은 아주 질겨 식칼로 썰기가 쉽지 않다. 힘들어하는 막내에게 생선 요리에 사용하는 데바 칼을 주었더니 역시 장비가 중요하다면서 만족스럽게 사용한다. 유능한 목수는 장비 탓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옛날 말이 되었다. 요즘은 장비가 좋지 않으면 작업의 품질이 떨어짐은 물론 시간도 오래 걸리는 법이다.

갓 손질
무, 당근 채썰기

누나는 찹쌀풀을 쑤면서, 다른 냄비에는 명태 대가리, 멸치, 다시마, 파뿌리를 넣어 육수를 끓이기 시작했다. 고소한 냄새가 집안 가득 은근하게 퍼진다. 잡어로 만든 잡젓도 끓여서 넣을 요량으로 봉지를 열었더니 너무 곰삭아 냄새가 고약하다. 올해는 넣지 않기로 했다. 다듬은 채소에 고춧가루, 간 마늘, 생강 등을 넣어서 골고루 섞었다. 김칫소에 들어가는 채소만 열 가지 정도이다. 올해도 대부분 구매한 것인데 내년부터는 우리가 시골에서 재배할 수 있는 것은 직접 가꿔 김칫소를 우리가 만들자고 호기 있게 말했으나, 누나가 직접 다듬고 만드는 과정을 보니 말잔치로 끝날 가능성이 크다. 들어가는 정성과 노력이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은 것이다. 말하는 것은 쉬운데 행동으로 하기에는 쉬운 게 하나도 없다.


사람이 많아지니 왁자지껄한 잔치 분위기가 되었다. 의견이 맞지 않아 티격태격, 갑론을박 언성이 높아지기도 한다. 특히 평상시 목소리가 크고 말이 많은 막내는 어머님과 의견이 다르자 목소리를 더 키우는 바람에 급기야 어머님이 토라지시는 상황까지 발생했다. 어머님이 많이 약해지신 것 같아 마음이 조금은 불편하고 안쓰럽다. 매형은 막내가 말은 많지만 일은 제대로 잘한다면서 추켜세워주신다. 나도 막내의 야무진 일솜씨는 인정한다. 스스로 “○○동 장금이”라고 불린다면서 은근히 자신의 요리 실력을 과시하기까지 한다.


드디어 재료 준비가 끝나 김칫소를 버무려야 할 시간이다. 작년에는 모두 한꺼번에 넣고 버무리는 바람에 너무 뻑뻑해서 힘들었는데 올해는 채소와 고춧가루를 먼저 섞고 그 위에 생새우와 젓갈을 함께 갈았던 재료, 그리고 찹쌀풀과 육수를 부으니 섞기가 훨씬 쉽다. 들어가는 재료의 양은 저울로 정확하게 측정하지 않고 눈으로 보고 혀로 맛을 보면서 조절해 간다. 나와 같은 초보 요리사에게는 언감생심 꿈꿀 수 없는 고수의 단계이다. 그래도 매년 같은 맛을 내는 것을 보면 누나도 김치 명인 수준이 되었다.


23:00가 넘어서야 김칫소 만드는 것이 마무리되었다. 대형 플라스틱 통으로 두 개가 가득 찰 정도로 많은데 누나는 부족하지 않을지 걱정한다. 남으면 나누면 되는데 부족하면 절대 안 된다는 맏딸들의 공통적인 특징이다. 가득 담긴 김칫소를 바라보니 맛있는 김치의 비결이 바로 이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김칫소 안에는 여름부터 뜨거운 태양과 비바람을 견디고 자란 온갖 야채, 봄부터 소금에 몸을 맡겨 삭혀온 멸치의 살신성인, 봄에 태어나 열심히 살다가 신선한 김치 맛을 위해 그물에 몸을 맡긴 생새우 등 한국인의 입맛에 맞는 모든 재료가 다 들어가 있다. 1년 동안 들과 바다에서 자란 온갖 자연의 맛이 들어간 것이다. 거기에 어머님과 누나의 정성, 그리고 우리 가족의 서로에 대한 애틋한 사랑이 더해졌으니 맛이 없을 수가 없다.


만화 ‘식객’에서 봤던 감동적인 장면이 떠오른다.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로부터 ‘삼겹살’을 요구받은 며느리가 아무리 대접해도 이게 아니라고 투정하면서 구박하곤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우삼겹’, 소의 업진살을 말하는 것이었고, 그 외에도 고사리, 토란대, 고추기름 등 어렵게 요구받은 다른 음식이 바로 당신을 조문하러 오신 분들에게 대접하고 싶었던 우리나라 최고의 장례 음식, 육개장의 재료였다는 사실을 알고 그동안의 괴롭힘을 이해하고 눈물을 흘리는 며느리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가슴이 먹먹해질 정도로 감동적이었다. 영화 ‘식객’에서도 대령숙수에게서 육개장을 수라상으로 받은 순종 임금이 “조선인의 얼과 한이 담겨 있다.”면서 눈물을 흘리면서 다 드셨다는 대목이 나온다. 오늘 만든 김칫소 역시 한두 사람이 한두 시간 투자해서 완성한 것이 아니라 구부정한 88세 노모의 자식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을 바탕으로 두 계절 이상 긴 시간 동안 투영된 자연의 힘과 맛이 응축된 결과라고 생각하니 만화, ‘식객’의 감동보다 수백 배 더 진한 감동이 느껴진다.


이제 절반 넘게 끝난 셈이다. 다들 김칫소의 완성을 축하하며 내일 오전에 일찍 만나서 절인 배추를 버무리기로 하고, 막내도 밤늦게 집으로 돌아갔다. 23:20이 다 되어 나도 잠을 청했다. 아내는 허리가 아파 안마기의 도움이 필요하다면서 안마기에 앉았다. 그 소음에도 불구하고 나도 피곤해서 바로 잠에 곯아떨어졌다.


12.9.(토) 아침을 간단하게 먹은 후 09:00가 되기 전부터 물을 뺀 배추를 버무리기 시작했다. 날씨가 아주 좋아서 밖에서 버무릴까 고민도 했으나 비좁아 오가는 게 힘들고 많은 사람이 앉기가 불편해서 올해도 거실에서 하기로 했다. 김칫소를 절인 배추에 버무리는 모습은 작년에도 봤던 광경이다.

절인 배추에 김칫소 버무리기, 김장의 완성

어머님이 편찮으시기 전, 2016년까지는 시골에서 어머님이 동네 분들과 직접 버무려 택배로 서울로 보내주셨는데, 어머님이 편찮으셔서 광주로 올라오셔야 했던 2017년에는 아내와 딸이 광주 누나 집으로 내려가 김장을 버무려 네 상자를 고속버스로 이송하여 터미널에서 직접 가져왔고, 2018년에는 대전에서 광주로 나와 아내, 딸이 내려가 함께 김장에 참여했고, 사촌 동생도 내려와 동치미까지 갖고 올라갔다. 2019년에는 서울로 이사한 직후라서 아내 혼자 광주에 내려가서 버무린 다음에 사과 상자 세 개를 직접 갖고 올라왔으며, 2020년에는 코로나19 팬데믹 때문에 광주에서 누나가 버무려 고속버스 택배로 발송해서 받았고, 2021년에는 고속버스터미널로 절인 배추와 양념을 보내서 우리가 직접 버무리고 남은 양념으로 처제네까지 김장을 마쳤으며, 2022년에는 내가 퇴직 직전이라 여유가 있어서 광주에 내려가 김장에 참석한 것이 최근 우리 집 김장의 역사이다. 연말마다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던 김장이 이렇게 7년을 엮어 보니 우리 집의 귀중한 역사로 탈바꿈했다.


중간에 사돈어른까지 오셔서 손을 보태신다. 손이 하나라도 더 필요한 시점이다. 작년에는 딸이 함께 내려와 조카와 함께 포장 마무리 작업 담당이었는데 올해는 딸이 내려오지 않아 조카 혼자서 고생이 많다. 조금 후에는 작은 고모님까지 오셔서 손을 보태시니 진도가 잘 나간다. 매년 네 자매와 한 며느리, 다섯 명이 버무렸는데 올해는 첫째 동생이 서울로 시험을 치르러 가고, 둘째 동생은 시댁에서 어제 김장하는 바람에 오늘은 세차장 일을 도맡아 하기로 해서 두 명이 부족했으나 그 공백을 사돈어른과 작은 고모님이 채워 주신 것이다. 역시 궁하면 통하는 법이다.


10:05, 떡집에 맡긴 떡을 내가 찾아왔다. 이런 심부름이라도 도울 수 있어서 다행이다. 떡의 양이 상당하다. 가래떡과 절편 두 상자인데 쌀값을 제외하고 만드는 가격만 70,000원이라니 제법 비싸다.


절반 이상 버무렸을 때 내가 수육을 삶기 시작했다. 저울이 없어서 정확한 양은 잴 수가 없어 요리 노트를 보고 적당한 양의 된장을 풀고, 양파, 대파, 생강 대신 생강가루, 통후추, 월계수 잎을 넣어 육수를 팔팔 끓인 다음 오겹살과 앞다릿살을 충분하게 넣어 삶기 시작했다. 냉동이 아니라서 굳이 칼집은 넣지 않아도 될 것 같아 그대로 넣었다. 고기를 넣고 다시 끓어오르기 시작하자 불을 줄여 45분간 삶아 완성했다. 초보자에게 정확한 계량과 시간이 최고의 요리 비결이다.


고기가 삶아지는 동안 어머님이 까신 굴을 씻었다. 최근에 여러 차례 요리한 경험 덕분에 씻는 방법부터 아주 잘 알고 있다. 수돗물에 씻으면 비린내가 난다는 사실도 잘 알기에 소금을 녹여 씻어냈다. 굴껍데기, 쩍이 제법 많이 나온다. 손으로 일일이 만지면서 세심하게 씻지 않으면 먹을 때 불쾌감뿐만 아니라 이가 상할 수 있어서 최대한 정성스럽게 씻어냈다. 양이 제법 많다.


내가 주방에서 이렇게 일하는 모습은 다들 많이 보지 않았으나 어렸을 적에 생선은 도맡아 꼼꼼하게 손질하셨던 아버님의 모습이라 생경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오빠는 한 번도 한 적이 없다는 작은 고모님은 칼을 들고 요리하는 내 모습이 낯선 모양이다.


누나는 올해도 우리더러 더 많이 가져가라고 김치통 외에도 종이 상자에 비닐을 넣어 두 개나 준비해서 담아주려고 한다. 아내는 너무 염치가 없어서 한 개만 더 만들어 가겠단다. 게다가 내가 좋아하는 갓김치도 한 통을 담았다. 김칫소가 그리 충분하지 않아 걱정했는데 갓김치까지 모두 완벽하게 마무리했다. 방금 버무린 김치와 내가 삶은 수육으로 점심 한 상을 차려 거실에 자리를 잡았다. 이 김치에 들어간 정성과 노력, 그리고 사랑을 체험했기에 눈으로 보기만 해도, 냄새만 맡아도 침이 넘어가고 배가 부르다. 김치 맛이 좋지 않을 수가 없다. 올해도 성공이다. 무엇보다 짜지 않아서 좋다고 하니 막내는 본인이 소금을 적게 넣어서 절이라고 극구 주장해서 이런 결과가 나왔다면서 스스로 공치사한다. 막내답다.

수육과 김장 김치의 환상적인 한 상

점심상을 물리고 김장 경비를 간단하게 알아봤다. 배추 30만 원, 기타 육수를 내기 위한 재료 구매에 40만 원 정도 들었단다. 첫째 여동생은 새우젓, 굴 등을 구매하는 데에 최소한 20만 원은 들었을 것이다. 어머님도 고춧가루와 마늘을 사는 데에 꽤 많은 돈을 쓰셨을 것이다. 고기는 50만 원어치이다. 김장에 들어간 경비가 제법 많다. 하지만 내년 이맘때까지 우리 집 식탁을 책임진다고 생각하니 결코 비싼 가격이 아니다. 무엇보다 값싼 외국산 양념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어머님이 직접 기르시거나 주변에서 구매한 국내산 재료만으로 만들었으니 이만한 김치는 어디에서도 구하기 힘들 것이다.


우리 김치통으로 김장 김치 여섯 개, 그리고 종이 상자 한 개, 무 서너 개, 작년 묵은지 두 통까지 챙겨서 차 트렁크와 뒷자리에 짐을 실었다. 뿌듯하다. 배추를 가를 때부터 고생이 많았던 조카에게 용돈을 조금 주었다. 불평하지 않고 언제나 최선을 다해 늘 고맙다. 원두커피도 한 봉지 구했다. 아내는 주방에서 설탕, 질이 좋은 자일리톨 설탕도 아주 많이 얻었다. 오겹살 한 판, 그리고 앞다릿살 한 덩어리도 우리 몫으로 챙겨 왔다. 어머님이 까신 생굴, 조기, 그리고 갈치속젓까지 누나는 하나라도 더 챙겨주려고 애쓰고 있다. 이런 헌신적인 모습은 내가 결혼하기 전부터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그래서 늘 감사하다.


집에 올라오는 길에 처제 부부와 아들을 불러 저녁에 수육을 삶아 김장 김치로 파티를 열었다. 지난 11월 28일, 친구 부부를 초대해 여섯 명이 식탁에 앉은 경험 덕분에 쉽게 상을 차렸다. 다들 김치 맛이 좋다면서 칭찬한다. 아울러 수육도 잘 삶아져 함께 어울리니 천상의 맛이다. 매년 김장 후 1주일 이내에만 맛볼 수 있는 계절 음식이기도 하다. 아내도 기분이 좋은지 아끼던 레드 와인을 따서 식전주로 함께 마시기 시작했다. 다들 아주 맛있게 먹어주니 고맙다. 놀라운 것은 딸이 아주 열심히 수다를 떤다는 사실이다. 모두가 처음 보는 생경한 모습에 놀란다.


12.10.(일) 처제에게 김장 김치 한 상자, 오겹살 1.8kg, 앞다릿살 0.6kg, 그리고 갓김치, 찹쌀, 묵은지까지 싸서 보냈다. 처제네 식구도 묵은지를 좋아하는데 남은 게 거의 없어서 그동안 아껴가면서 먹고 있었다니 이렇게 보낼 수 있어서 기분이 좋다. 아들에게도 비슷한 양의 오겹살과 앞다릿살, 그리고 김장 김치를 싸서 보냈다. 제법 무거운데도 먹고살아야 한다면서 기꺼이 들고 가겠다고 나선다. 모두 돌아가고 나니 제법 허전하다. 나도 나이가 점점 들어가는, 아니 이미 나이가 들었다.


처제가 누나에게 무척 미안하다면서 뭐라도 해주고 싶다기에 아내가 5만 원짜리 쿠폰을 보내는 것이 좋겠단다. 작년에도 5만 원짜리 커피 쿠폰을 보내 조카에게 주었는데. 나중에 보니 10만 원이나 보냈다. 조카에게 들었는지 누나가 이러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맛있는 것은 그냥 나눠 먹으면 되는데 이렇게 부담을 주면 다시는 나눠주기 싫단다. 이런 마음이 항상 고맙다.


아들에게 카톡으로 저녁에 무얼 먹었는지 물었더니 친구와 함께 삼겹살을 구워 김장 김치에 먹었단다. 친구가 우리 집 김치를 좋아해 주었다니 다행이다. 우리 집 식구가 될 긍정적인 요건 하나를 갖춘 셈인가? 이렇게 퇴직 후 첫 김장은 많은 사람에게 행복과 즐거움을 주고, 맛과 향기를 느끼게 하면서 막을 내렸다. 하지만 이 맛과 향기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맛있고 진하게 익어갈 것이고, 그 행복과 즐거움의 최대 수혜자는 당연히 나였다. 정말로 행복한 잔치였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