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운을 바꾸는 귀한 사람들
작은 글씨기 모임에서 이번 주제는 나의 삶에 영향을 준 사람이다.
내 삶에 극적인 터닝 포인트가 될 만한 사람이 있었나. 그렇게 영향력을 발휘해서 내 삶 깊숙이 들어온 사람들이 있었나. 일주일 내내 이 생각이 머릿속에 쉬지 않고 맴돌았다.
한동안 책에 빠져 살 땐 글은 좋았지만 글 이면에 드리워진 모습은 실망스런 경우가 많았다. 내 인생에서 책이 쑥 빠져나가고 나니 빈 공간이 너무 컸다. 그럼 나의 삶은 무엇으로 채워져 살아가고 있는지.
몇 년 전 집안에 큰일들이 한꺼번에 닥쳐왔다. 큰일이란 늘 상대성을 지니기에 몇 년 전에 벌어졌던 일들은 내가 살면서 다시 돌아오지 않았으면 하는 시간들이다.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고 이제 막 코로나가 진정되는 시기에 시어머니가 암진단을 받았다. 그 시절 아이들은 고3과 중3으로 막 들어가는 시기였다. 2년 동안 코로나로 정상적인 학교생활을 하지 못하고, 화상수업으로 대체되면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는 생활을 하다가 수험생이 되었다. 나도 아이들도 심리적으로 너무 버거운 시기에 돌입했다.
이런 시기에 시어머니가 갑자기 암진단을 받고 지방에서 우리 집으로 올라오셨다.
자식보다는 부모가 늘 먼저였던 남편이기에, 상황이 또한 그러하기에, 불편한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시어머니가 수술 받고 회복하실 때까지 집에서 간호하기로 결정이 났다. 어쩌면 남편이 나에게 보내는 일방적인 통보였을지도 모른다.
너무 노령이신데다 지병도 있으셔서 수술보다 검사기간이 훨씬 오래 걸렸다. 지방병원에서 열흘 동안 검사하면서 먹었던 약이 문제가 되었는지 손발이 부어 위보다 다른 장기검사에 두어 달 시간을 보냈다. 처음에는 복강경으로 수술을 진행하려 했지만 장기의 협착으로 인해 결국 개복수술을 했다. 더위가 시작되는 초여름에 수술한 부위가 덧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매일 대형병원에서 드레싱을 받아야했다. 지나한 시간들이 단 몇 줄로 요약해서 말할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다. 그때는 하루하루가 정말 숨 막히고 몸과 마음이 한계에 다다른 순간들이 반복되는 일상이었는데 이렇게 말할 수 있다니.
위를 거의 잘라내 상태라 식사가 문제였다. 하루에 6번씩, 처음엔 유동식에서 조금씩 양을 늘리면서 식사량을 조절해야 했다. 시어머니 식사만 하루에 6번이고 아이들이 학교에 가지 않고 화상수업 하는 날은 아이들 밥을 따로 또 챙겨야했다. 아침에 눈을 떠 부엌에서 하루를 시작해 부엌에서 하루를 마감하는 날이 다반사였다.
아무리 가족이여도 같이 살지 않던 사람이 내 공간에 들어와 같이 지내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경험해보지 않는 사람은 그 강도를 알기 어렵다. 특히 시댁사람들과 엮이는 것은 더욱 힘들다. 3월에 시작된 일들이 11월에 접어들어서야 마무리 되어 시어머니는 집으로 돌아가셨다.
그러는 동안 나의 몸과 마음은 많이 망가져버렸다. 수험생 아이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고 나 역시 내 몸을 제대로 보살펴주지 않아 정신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왔다. 우울증을 동반한 공황장애. 그땐 남편의 형제들이 너무 야속했다. 지금도 그 마음은 계속되어 연락을 끊고 산다. 당신의 어머니가 생사의 기로에 있는데 강 건너 불구경하듯 모든 것을 우리가족에게 떠넘겨버렸다. 남편이 너무 힘들어 형제들에게 말하면 돌아오는 말들은 상처뿐이었다. 어느 순간 남편은 그 짐을 오롯이 혼자 짊어지기로 했는지도 모른다. 남편이 불쌍했다. 외로워보였다. 안쓰럽기도 했다. 하지만 너무 원망스러운 순간들도 많았다. 복잡한 감정들이 정리되지 않은 채 뒤섞여서 소용돌이 치고 있었다.
시어머니께서 집으로 돌아가시고 나서 나는 몇 달 동안 집 앞 마트에 가는 것조차 힘들었다. 폐쇄된 공간에 가면 가슴이 답답하고 어지러웠다. 차를 타는 건 엄두도 내지 못했다.
아이들은 원하는 학교에 가지 못했다. 죄책감이 밀려왔다. 중요한 시기에 잘 보듬어 주지도 못하고, 방치하다시피 보낸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내안에 꽉 들어차 있었다. 우리는 서로가 각자의 방에서 웅크리고 있었다.
정신과 약을 먹고 조금씩 나아지면서 벚꽃이 필 무렵 동네서점에 나가기 시작했다. 두려웠다. 다시 사람들을 만난다는 것이.
집에서 웅크리고 있으면서 처음 한 일은 과학서적을 탐닉하는 것이었다. 삶이 좀 명확하고 단순하길 원했다. 동네서점에서 과학서적 세미나를 한다는 메시지가 왔다. 무슨 용기였는지 그냥 무작정 신청하고 나갔다. 처음 낯선 이들은 보았을 때 다시 숨이 막이고 답답했다. 그래도 더 이상 물러나면 난 완전히 고립될 것 같다는 공포가 더 컸다. 시간이 조금 흐르자 요동치던 감정과 숨 막힘이 잦아들었다. 그렇게 두어 달을 보내고 나니 글쓰기 수업을 한다는 메시지가 왔다. 제목이 마음에 들었다. 트라우마 극복하기. 열심히 나갔고 열심히 떠들었고 열심히 웃었다. 그리고 조금씩 글을 쓰기 시작했다. 뭐 딱히 열심히 하려고 했던 것은 아닌데 글쓰기 수업에서 주는 기운은 나를 열심히 하도록 일으켜 세워줬다.
제목이 귀인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주명리학에서 대운이 바뀌는 시기에는 생전 겪어보지 못한 어려움을 겪고, 믿었던 사람들에게 배신을 당하고, 몸과 마음이 망가진다고 한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동트기 전 새벽이 가장 어둡듯이, 난 어둡고 긴 터널 끝을 서서히 빠져나오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 터널 끝에서 만난 사람들이 나의 운을 바꿔준 귀인들이다. 나의 허접한 일상과 감정들을 귀 기울여 들어주고 공감하고 때론 아파해주었다. 잘했다, 잘 살았다, 수고했다는 공허한 위로보다 그냥 내 마음속 깊은 응어리들을 하나하나 들어주었다. 사실 나는 듣기가 잘 되지 않았던 사람이다. 내가 옳고 그름의 잣대가 너무 명확해 다르다는 것을 알지만 마음 깊숙이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았던 사람이다. 시간이 천천히 흘러가면서 아주 조금씩 사고에 유연성이 생기기 시작했다.
뭐 그럴 수도 있지. 그런데는 다 이유가 있겠지. 이런 말들이 내안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귀인을 만난다는 것은 우연일수도 있지만 또한 필연일수도 있다. 이제 나에게 다가오는 귀한 인연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