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달쓰다 May 12. 2024

삼겹살과 소고기 그리고 전생(前生)

겨우내 옷장에서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남편 겨울코트와 바지를 드디어 세탁소에 맡겼다. 오래된 숙제를 끝낸 것 같아 마음이 후련하다. 집으로 곧장 오려다가 아파트 단지 상가를 돌아나가 반대편에 있는 정육점으로 향했다.

"삼겹살 한근만 주세요."

정육점 아저씨는 내 앞에 있는, 소고기와 돼지고기가 부위별로 나란히 진열된 냉장고에서 기다란 삼겹살 6가닥 정도를 꺼내 저울에 달아보고는 한근이 좀 넘는데 괜찮냐고 물었다. 저울에 표시된 그램과 가격을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라 드릴까요?"

"삼등분해주세요."

"소스랑 허브소금도 드릴까요?"

"소금만 주세요."

하숙생 먹이고 남는 건 김치찌개를 끓여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계산을 하고 정육점을 나왔다.



오늘따라 날씨가 참 좋다. 하늘과 나뭇잎들을 보려고 자꾸만 고개를 위로 쳐든다. 어릴 때는 아무런 감흥도 없던 하늘과 구름과 나무들이었는데, 요즘 들어 자주 이런 것들을 보며 시간의 흐름을 느끼고 마음의 안정을 찾는 내가 새삼스러워진다. 아니 꼭 그렇지 않더라도 어린이날 연휴 내내 비가 내렸었기에 오늘은 남녀노소 누구나 인정할 만한 상쾌하게 명징한 날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야말로 쾌청하다. 미세먼지 따위 다시는 없을 것 같은 날씨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선선한 바람이 마음속까지 들어와 한 바퀴 몸속을 돌고 나간다. 연두연두하던 나뭇잎들은 초록초록해져서 쳐다보기만 해도 눈이 시원하다. 비록 지금 집에서부터 입고 나온 츄리닝 바지에 늘 입는 점퍼를 입고 까만 비닐봉지를 덜렁거리며 걸어가고 있을지언정 기분만큼은 좋은 곳에 놀러 가는 사람처럼 몸은 가볍고 마음은 설렌다. 반짝반짝 빛나는 오전 햇살이 따뜻하게 무르익은 오후 햇살도 그저 다 좋은 오월, 이대로 집을 지나쳐 정처 없이 걷고 싶다는 생각을 잠시 해본다. 그러나 발걸음은 사람 마음을 한껏 달뜨게 하는 날씨를 뒤로 하고 곧장 하숙생 저녁 준비를 하러 집으로 향한다.

이미지 출처: pixabay



하숙생이 학원에서 돌아올 시간에 맞춰 새 밥을 하고 상추를 미리 씻어 놓는다. 삼겹살 구운 기름에 구워 먹을 김장김치도 썰어 놓고 쌈장도 준비한다. 이제 고기만 구우면 된다. 미리 구워 놓으면 맛이 없으니 하숙생이 집에 들어서는 순간 구울 준비를 미리 다 해 놓는다. 하숙집 바깥양반은 좀 전에 회사에서 퇴근해 스마트폰으로 배고픔을 달래며 하숙생을 기다린다.


오늘따라 좀 늦게 온다는 생각을 하는데 현관문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났다. 문은 개선장군이 들어오는 것처럼 열렸지만 이내 그 장군은 오징어처럼 흐느적거리며 들어왔다.

"하숙생, 오늘 힘들었나 봐."

"... 저녁 뭐예요?"

"하숙생이 좋아하는 삼겹살!"

"삼겹살 말고 소고기 주세요."

어제 하숙생이 삼겹살 얘기한 것이 생각나 잊지 않고 사 와서 밥상 다 차려 놨는데 느닷없는 소고기라니. 갑자기 하숙생의 망발에 혈압이 수직상승 하려 한다. 침을 한 번 삼키고 평정심을 유지하며 아무렇지 않은 척 말을 이어갔다.

"어제 삼겹살 먹고 싶다 해서 삼겹살 준비했는데."

"오늘은 소고기가 땡겨요."

"..."

임신부도 아니고 주는 대로 먹어도 감지덕지인 하숙생이 지금 땡기고 안 땡기는 음식 가릴 처지냐. 목구멍에서 뜨거운 기운이 올라오고 있었다.

"학생, 소고기 없어. 그리고 오늘은 이미 차렸으니 그냥 삼겹살 먹어."

하숙생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그냥 소고기 구워 주시면 안 돼요?"

공손하게 간절하게 부탁해도 이 상황에 들어줄까 말까 한데 이건 마치 내가 센스 없게 자기 입맛에 맞는 메뉴 선정 못했으니 책임지라는 듯 재차 요구를 한다.


내 안에서 마구 흔든 사이다의 병뚜껑이 열리려고 하는 순간, 남편이 삼겹살이 더 맛있다며 나를 거들고 나섰다. 잠깐 사이에 놀라운 기세로 올라오던 탄산가스를 못 나오게 하려고 뚜껑을 힘주어 닫았다. 그러고 나니 대꾸할 기운이 없었다.

"그냥 먹어."

"아~"

짜증이 한 무더기 섞인 말투다. 대응하지 않고 간신히 한마디 더했다.

"소고기는 내일 해줄게. 지금은 삼겹살 먹어."

하숙생이 뭐라 하건 간에 어차피 소고기 구워 줄 마음이 전혀 없었기에 바로 프라이팬에 삼겹살을 올렸다. 뜨거운 팬에 삼겹살이 닿자마자 미각을 자극하는 소리와 금세 퍼지는 고소한 돼지기름 냄새는 현재로서는 소고기 할아버지가 온대도 이길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뾰로통한 얼굴을 하고 씻으러 들어갔던 하숙생은 좀 전의 자신의 말과 행동도 씻어버렸는지 아무렇지 않은 듯 나와서는 내일은 꼭 소고기를 구워 달라 한다. 소고기타령은 금방 끝나 다행이지만 딱히 내키지 않았던 메뉴라고 기껏 준비한 음식 앞에서 다른 걸 해달라는 하숙생의 자기 멋대로인 행동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돼 답답하기만 하다. 내 딴에는 하숙생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힘들까 봐 저녁식사는 가급적 그의 의견을 존중해서 원하는 걸로 해주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오늘처럼 삼겹살 말고 소고기 내놓으라는 식의 태도는 내 배려심에 찬물을 끼얹어 더는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요새 부쩍 이런 청개구리 짓이 늘어가고 있다. 라면을 끓여주겠다 하면 국수를 해달라 하고, 국수를 먹자고 하면 라면이 먹고 싶다 다. 진라면밖에 없는 날에는 굳이 신라면을 찾아 꼭 그걸 먹어야겠다며 직접 사 오는 극성스러운 정성까지 보였다. 음식 앞에서만 그런 게 아니라 외출 시 옷 입을 때에도 전에는 군소리 없이 입던 옷이었음에도 이건 이래서 싫고 저건 저래서 싫어 못 입겠다고 다. 도무지 이랬다 저랬다 갈피를 못 잡겠다. 이런 때 정신줄 놓고 있으면 어느 순간 하숙생과 감정싸움 하느라 음정이탈 오페라를 하고 있었다.


오늘 같은 일이 계속 이어진다면 하숙생에게 아무래도 하숙 말고 자취하라는 제안을 해야겠다. 재료는 말하면 미리 준비해 줄 테니 직접 먹고 싶은 거 해 먹으라고. 언젠가 하숙생도 성인이 되면 독립을 해야 하니 요리연습도 할 수 있고 또 직접 해 먹으면 나도 하숙생도 서로 기분 상할 일 없으니 일거양득 아니냐고 말이다.

 

삼겹살이 앞뒤로 노릇노릇 알맞게 잘 구워졌다. 그 대가로 나는 삼겹살 오일로 샤워를 하고 삼겹살 향수를 뿌린 옷을 입었다. 먹기도 전에 김이 팍 새버린 나와는 별개로 윤기가 좔좔 흐르는 삼겹살은 누가 봐도 외면할 수 없는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이미지 출처: pixabay


이미 남편은 호들갑스럽게 맛있다며 소리를 내며 먹고 있었고, 소고기가 땡긴다던 하숙생은 밥, 상추에는 관심도 고 삼겹살만 연신 쌈장에 찍어 먹고 있었다. 소고기가 땡긴다면서 저리 잘 먹는다고? 나한테 괜한 트집을 잡고 싶었나, 아님 이렇게라도 무언가 반항하고 싶었던 걸까. 그래서 얻는 게 뭐지. 도무지 속을 없는 하숙생이다. 뭘 하든 순순히 받아들이고 넘어가는 때보다 그렇지 않은 날이 더 많다. 그야말로 하숙집이 조용한 날이 별로 없다. 오늘처럼 정신줄 단단히 붙잡고 입술 꽉 깨물고 있는 날이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초록색과 적갈색이 적당히 조화를 이룬 상추 한 잎을 집어 꼭지를 떼고 손바닥에 넓게 펴서 밥 조금, 삼겹살 두 점, 쌈장 듬뿍을 차례로 올린 후 내용물이 빠지지 않게 잘 오므려 학생에게 내민다.

"학생, 이것도 먹어봐."

멋쩍은 듯 말없이 받아먹는다.

이미지 출처: pixabay

전생에 너랑 나랑 무슨 인연이었기에 한 식탁에서 밥을 먹고 있는 걸까?' 오늘 음정이탈 오페라로 가기 직전 에피소드는 삼겹살로 시작해 전생의 인연으로 끝이 나려나 보다. 진심 알고 싶다, 하숙생과 나의 전생. 그리고 이런 마음은 아랑곳없이 저녁식사에 열중하고 있는, 고기보다 상추를 더 많이 먹고 있는 남편의 전생도. 내가 어쩌다 이들과 얽혔는지 진심으로 궁금한 날이다.


'그나저나 내일 소고기를 사, 말아.'






*상단 이미지 출처: pixabay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