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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쓰다 May 29. 2024

하숙생의 시그니처 메뉴

지금까지 대체적으로 카페든 음식점이든 시그니처 메뉴에 도전했을 때 실패한 적은 별로 없었다. 그러나 요즘 들어 믿음직스럽지 못한 시그니처 메뉴가 등장했으니 바로 우리 집 하숙생의 시그니처 메뉴다.


메뉴 이름

내가 알아서 할게요



중1 하숙생은 요즘 공부하느라 아니, 학원을 다니느라 바쁘고 피곤해한다. 그전까지는 공부하는 학원이란 걸 다녀보지 않았으니 아주 당연한 얘기다. 자신의 의지로 남들 다 가는 학원이란 곳을 가겠다고 말을 꺼냈을 때 공부를 하겠다는 의지가 보여 기특했다. 물론 그 의지를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은 아니지만 대한민국 학생으로서의 본분을 이제 좀 지키려나 싶어 내심 기뻤다. 비록 하숙집 아줌마이긴 했어도 학생인 하숙생이 처음으로 마음먹고 공부 좀 시작해 보겠다는 것에 안 도와줄 이유가 전혀 없었다.

이미지 출처: pixabay


시작은 논술학원.

수학, 영어학원보다는 만만해 보였는지 논술학원을 먼저 가고 싶다고 했다. 만화책이나 웹소설 기반의 소설책만 보고 있는 요즘 논술학원에 가면 생각 좀 하며 읽어야 한다는 책 한 권은 읽겠다 싶어 그러라고 했다. 또 가서 의자에 오래 앉아 있는 연습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여느 초등학생들보다 공부량이 상당히 적은(열심히 놀았으니 미련은 없을 것 같은데 이건 순전히 내 생각이다), 엉덩이 힘이 현저히 떨어지는 우리 집 하숙생이 과연 적응을 잘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됐지만 적응 못 하면 그만 두면 된다는 원칙을 갖고 보내기로 했다. 논술학원 입성 첫날, 세 시간을 채우고 온 하숙생에게 기분을 물으니 의외로 '힘들지만 할만하다'는 명쾌한 답을 내놓았다. 후로 중간중간 괜찮냐고 물어보면 재미있다고 했다. 제대로 수업에 참여하고 오는지 학원 선생님의 상담전화 외에는 알 길이 없었지만 숙제 안 빼먹고 재미있어하면 처음 다니는 학원치고 나쁘지 않다는 내 나름의 판단을 내렸다.


다음은 수학학원.

논술학원으로 엉덩이 근육을 아주 조금 키웠으니 수학학원도 시도해 보기로 했다. 그동안 숙제는 싫지만 친구들이 학교에서 학원숙제를 하는 것을 보고 부러워했던 하숙생은 누구는 중3 과정, 누구는 고1과정, 심지어 고2과정 선행을 하는 아이도 있다고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하숙생은 현행이나 잘 따라가라고 얘기하며 수학학원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수학학원들은 중학생은 한 학기 선행이 되어있지 않으면 들어갈 반이 없었고, 어떤 곳은 레벨테스트조차 볼 수 없는 황당한 실태에 당황해서, 창피한 건지 열이 받는 건지 모를 알 수 없는 이유로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경험을 해야 했다. 지금의 현실에 화가 났지만 화 낼 곳이 없었다. 내가 하숙생한테 뭘 한참 잘못하고 있나 싶어 미안하고 참담한 기분까지 들었다. 자신이 다닐 곳이 없냐는 하숙생의 코 빠진 모습에 다시 정신을 차리고 어찌어찌 다른 하숙집 지인이 얘기한 학원이 떠올랐다. 그리고 얼마 후 하숙생은 두 번째 학원을 다니게 되었다.


한 달 보름쯤 되니 학생은 두 학원에 적응하며 그런대로 잘 다녔다. 겨울방학이라 시간이 많아서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다음 타자는 하숙생이 수학보다 힘들어하는 영어.

단어 외우기를 죽기보다 싫어하는 하숙생은 영어를 잘하려는 노력은 개미 발톱만큼도 하지 않으면서 '나는 영어를 못한다'는 웃기지도 않는 속 터지는 소리만 했었다. 영어공부라는 걸 해본 후에 그런 소리를 하면 좋겠다. 듣기는 좀 하는 것 같으나 단어를 모르니 말하기는 쉬운 것만 하고 읽기는 진도가 안 나갔고 쓰기는 더더욱 어려워했다. 스스로 이래서는 안 된다며 갑자기 어느 날 하루 마음 잡고 영어공부를 하다가 다음날이면 흐지부지되기 일쑤였다. 공부 습관이 잡혀있지 않아서 그런 건지 좋은 말로 호기심이 너무 많아서 그런 건지 진득하게 앉아 있지를 못했다. 무언가 조언이라도 좀 해볼라치면 자기가 알아서 하겠단다. 언제 할지 모르는 기약 없는 '내가 알아서 할게요.'하숙생의 시그니처 메뉴였다. 그러나 시그니처 메뉴로도 자신을 관리하기 힘들었는지 하숙생은 영어 학원도 원했다. 내가 보기에도 선생님의 도움과 강제성이 필요할 것 같긴 했다. 하숙생은 폼나게 어학원을 다니고 싶은 눈치였지만 그동안 귀찮고 하기 싫어 공부를 멀리한 하숙생이 또래들이 다니는 어학원을 다니다가는 도저히 못 따라갈 것 같았다. 사실 지금 영어 학원 다니는 게 늦었다고 하면 아니라고 굳이 반박하고 싶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크게 서두를 것도 없다는 생각에 마음의 부담이 좀 덜한, 선생님의 지시가 있고 단어 암기도 하고 수준에 맞는 영어책 읽는 곳을 택해 영어공부에 슬슬 시동을 걸어보기로 했다.


이렇게 초등학교 6학년 겨울방학, 하숙생은 자신의 뜻에 따라 남들 다 가는 사교육 시장에 드디어 발을 디디게 되었다.

이미지 출처: pixabay



새 학기가 시작되어 학교 다니면서 학원을 다니니 집에 있는 시간이 확 줄었다. 초등학교 다닐 때에는 하교 후 친구들과 뛰어놀고 어묵, 떡볶이 사 먹느라 그저 즐겁기만 했던 하숙생이었는데 이제는 그럴 시간이 없었다. 간식 대충 먹고 학원 가기 바빴다. 학교 숙제보다 학원 숙제가 더 많았다. 평일에 못 논 것에 대한 보상이라도 하듯 휴일에는 낮에 그냥저냥 시간을 보내며 놀다가 밤이 되면 숙제하느라 늦게 잤다. 특히 수학 문제가 안 풀리면 한숨을 쉬면서 짜증을 있는 대로 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속에서 울화가 치밀었다. '그러게 진작에 공부 좀 하지.' 장전한 잔소리 중 반은 쏘지 않고 시선을 돌리고 못 들은 척 입을 꾹 닫았다. 가끔 학원을 다니는 게 도움이 되는지 물었더니 도움은 된단다. 과연 그러한지는 아직 다닌 지 몇 달 안 됐으니 더 두고 봐야 알 일이다. 한편으로는 하숙생이 학원만 다니면 공부를 열심히 할 수 있다고, 잘하게 될 거라고 착각을 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집에서는 학원 숙제 하는 게 다였고 스스로 더 무언가를 하지는 않았다. 흔히들 얘기하는 자기주도학습은 여전히 잘 안 되었다. 하지만 이런 경험도 필요하니 학원이 당장은 큰 도움이 되지는 않더라도 다녀보는 건 나쁘지 않을 거라고 자기 위안을 했다. 시행착오를 겪다 보면 뭐라도 얻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희망을 아직은 버리지 않기로 했다.


"학생, 학원 다니기 힘들지?"

"네..."

"많이 힘들면 안 다녀도 돼. 집에서 혼자 하면 되지 뭐."

"저한테 왜 그러세요. 다닐 건데요. 저... 학원비 내 주실 형편이 안 되시는 거예요?"

"......"

"아주 아니라고도 할 수 없지만 그냥 학원만 왔다 갔다 하면서 힘들고 시간 뺏길 것 같으면 안 다니는 게 낫지. 나도 귀한 돈 허투루 쓰고 싶지는 않으니까."


듣자 하니 기분이 별로다. 공부하기 싫어하는 하숙생을 학원에 꼭 보내야 하는 건 아니지 않나. 막말로 형편 안 되면 못 보낼 수도 있다. 하지만 하숙생이 원해서, 열심히 해 보겠다고 해서 보내고 있는데 졸지에 돈 때문에 일부러 학원 안 보내는 하숙집 아줌마가 돼 버렸다.


"난 하숙생이 다니기 싫다고 하면 다니지 말라 할 거야. 그리고 하숙생이 놀러 다니는 것처럼 몸만 왔다 갔다 하는 것도 이해해 줄 수 없으니 그때는 바로 학원 그만둬."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들은 건지 못 알아들은 건지 하숙생은 말이 없었다.



하숙생은 신기하게 힘들어하면서도 빠지지 않고 다녔다. 그렇다고 스스로 공부를 열심히 한다든가 그런 것도 아니다. 단순히 남들 다 다니는 학원이 가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닌지 의심도 가지만 지금은 하숙생을 믿어보기로 했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힐 수는 있겠지만 어쩌겠는가. 내가 하숙생의 미래를 알 수도 없고 책임져 줄 수도 없으니 최대한 하숙생의 생각에 맞춰 환경을 설정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 외에는 달리 해 줄 수 있는 게 없다. 내 말을 귀담아듣지도 않고 긴 대화도 꺼려하며 '내가 알아서 할게'라는 시그니처 메뉴만 주야장천 읊어대는 하숙생에게 지금은 이게 최선의 방법이다.


사실 학원비를 생각하면 하나만 다니라 하고 싶지만 학원에 대한 로망을 갖고 이제 막 다니기 시작한 하숙생에게 아직은 그렇게 얘기하고 싶지 않았다. 사실 열심히만 해 준다면 학원비 내는 거 하나도 아깝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학원은 끊는 게 맞고, 또 그렇게 하겠다고 하숙생에게도 선언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밑지는 장사다. 고분고분까지는 아니더라도 말이나 행동이 눈과 귀에 거슬리지 않아야 하는데 이건 뭐, 살얼음판 디디듯 대해야 하는 경우가 허다하니 하숙생 어디가 예뻐서 학원비를 내주고 있냔 말이다. 실속 없는 하숙집 주인이다. 이 하숙생, 겉과 속이 다른, 집 안과 집 밖이 다른, 나한테는 엄청 까탈스럽고 힘든 하숙생인 것만은 분명하다. 다른 부문도 쉽지 않지만 공부에 있어서는 더 힘든 하숙생을 만났다. 그리고 이는 계속 현재진행 중이다.



하숙생의 시그니처 메뉴가 믿음이 안 간다. 그래도 아직 덜 완성되었으니 일단 기다려보기로 한다. 어떤 것들로 채워질지 궁금하기도 하고 걱정이 되기도 한다. 언젠가 그 메뉴가 빛을 발하는 날이 오길 바라는 건 하숙집 아줌마의 욕심일까. 결과야 어찌 됐든 자기주도학습을 하든 학원의 도움으로 공부를 하든 진정으로 자신이 좋아하고 원하는 풍미 좋은 시그니처 메뉴를 만들어 내길 바라며, 이번달 학원비로 휘청이는 카드값을 보며 잠시 잠깐 하숙생이 학원 다니기 싫다는 말을 해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흠, 안 다닌다 해도 걱정이군.


이미지 출처: pixabay





*대문 이미지 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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