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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두칠 Nov 13. 2023

박살난 보람

단점 셋 : 직업적 성취

기로 : 근데 형은 일하면서 보람 못 느껴요? 누나만해도 느낀다잖아요.
선호 : 아영이 누나 말에 초치는 건 아닌데, 난 공무원하면서 보람을 느껴본 게 정말 손에 꼽는다. 거의 뭐 아예 없었다고 봐도.
아영 : 왜? 너도 인정하잖아. 우리 일이 막 돈을 보는 일은 아니잖아. 공익적인 느낌으로 일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직업 아냐?
선호 : 그치. 근데 그게 이상적으로는 그런데 실제로는 안 그렇잖아. 난 공무원 되고 나서 딱 반 년만에 보람을 느낄 수 있겠다는 기대가 아예 깨졌는데.
아영 : 우리가 돈 많이 버는 직업도 아닌데 보람도 못 느끼면 어떡해.
선호 : 누나. 그래서 내가 자꾸 공무원이 나한테 매리트가 없다는 거야.



선호 : 일단 제일 먼저 느낀 건,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거야. 자율성이 없어 우리한텐.
기로 : 그게 무슨 말이에요?
선호 : 내가 맡은 업무여도 그 방향은 내 생각이랑 상관없이 이미 정해져있어. 위에서 정해진 게 내려와. 그 방향을 내가 옳다 생각하든 틀리다 생각하든 그건 정책에 아무런 영향도 없어. 공무원은 정해진 걸 실행만 하는 거야. 어떻게 하면 잘 실행할 수 있을까에 대해서만 고민할 수 있지. 그니까 '목표'는 정해져있고 '수단'만 고민할 수 있는 거야.
기로 : 예를 들면요?
선호 : 진짜 많지. 뉴스에서 본 거의 모든 정책이 다 그럴걸? 예를 들면, 뭐 주52시간제? 그거 처음에 시행할 때 밑에서 차근차근 내용을 만들어갔을까? 절대 아닐걸? 이미 위에서 방향은 다 정해져 내려오고, 담당자들은 왜 그 방향이 맞는지 논리를 만들고, 그 방향대로 추진하기 위해 필요한 실무작업들을 하고 그랬겠지.

주 52시간 근무제 : 1주일당 법정 근로시간을 기본 40시간 원칙에 연장근무 12시간 이하로 제한하는 제도. 공공기관, 공기업, 300인 이상 사업장을 대상으로 시행('18.7월)된 이후 지속적으로 확대됨. 단, 최근 동 제도의 개편 가능성이 지속적으로 논의되고 있음.

아영 : 모든 정책이 다 그렇진 않겠지.
선호 : 예외가 단 하나도 없냐 하면 그건 아니겠지만, 사실상 우리가 뉴스에서 보는 대부분은 다 그렇지 않아? 왜 그 재작년인가 갑자기 가계대출 제한 때렸잖아. 하다못해 그 때 막 아파트 분양 받아서 입주하려던 사람들은 금리는 더 비싸고 고정기간은 더 짧은 상품을 맘고생 하면서 계약해야 됐잖아. 이런 것도 분명히 위에서 내려온대로 그대로 한 걸거라고. 담당자만 개고생하고.

<은행권 줄줄이 가계대출 제한, 중단... 실수요자 여파는?> ('21.10.7. 한겨레)

아영 : 그래, 담당자가 고생이긴 했을 거야. 너무 갑자기 그러니까. 근데 그래도 나는 우리한테 이만하면 자율성이 꽤 있는 거 같아.
선호 : 나랑 생각이 완전 다르네.
아영 : 응. 너 말대로 우리가 정책의 큰 방향을 움직이긴 어렵지만, 그건 당연한 거 같아. 상사랑 부하랑 의견이 다르면 상사 지시대로 해야지 뭐 어쩌겠어.
선호 : 그건 그렇지만, 위에서는 잘 모르잖아. 담당 업무에서는 윗사람들보다 내가 더 잘 아는 거잖아. 더 잘 알아야 하고.
아영 : 근데 정보가 다르잖아. 사무관 수준에서 알 수 있는 정보랑, 관리자들이 아는 정보랑. 난 위에서 내려오는 지시대로 하는 게 맞는 거 같아. 결과에 대한 책임도 결국 관리자들이 지는 거고.
선호 : 아니, 그건 그렇지. 나도 결국 시키는대로 한다니까?
아영 : 그리고 우리가 방향에서만 자율성이 없다뿐이지, 아까 너도 얘기한 것처럼 우리가 '수단'에 있어서는 자율성이 꽤 있잖아. 난 그것만으로도 큰 거 같아. 실제로 현장에 작동하는 건 수단인데, 우리가 그걸 어떻게 짜느냐에 따라 누군가가 정책 효과를 받을 수도 있고 못 받을 수도 있으니까. 그게 심지어 전국 단위잖아. 그렇게 보면 사람 한 명한테 주어지는 권한치고는 그렇게 안 작은 거 같아.
선호 : 아니, 아무리 수단을 바꿔끼면 뭐해. 결국 주 52시간을 해야하고, 가계대출을 막아야 하고 하는데.
아영 : 그렇긴 한데, 그것도 어떻게 풀어내느냐에 따라 뭐 시점을 조절할 수도 있고, 단계적으로 연착륙을 할 수도 있잖아. 그걸 하는 게 우리 임무인 거 같아. 아예 정책 방향 자체를 바꾸려면 정치했어야지. 뭐 시민운동을 하거나.
선호 : 어휴, 누가 보면 누나가 나보다 한참 선배인 줄 알겠네. 그래, 뭐 사람마다 느끼는 건 다를 수 있지.
기로 : 맞아요. 누나랑 형이랑 그냥 시각 차이인 거 같아요. 형은 정책을 근본적으로 못 바꿔서 답답해하는 거 같고, 누나는 그래도 그걸 현장에 펴는 건 공무원 하기 나름이라는 거 같고.



선호 : 근데 누나랑 나랑 생각이 똑같은 것도 하나 있다.
아영 : 응? 뭔데?
선호 : 공무원은 늘 욕을 먹는다는 사실?
아영 : 아휴. 그건 맞지 진짜. 우리는 뭐 이렇게 해도 욕을 먹고 저렇게 해도 욕을 먹고.
기로 : 욕 안 먹게 잘하면 되는 거 아니에요?
아영 : 그게 그렇게 안 되더라. 어느 한쪽으로부터는 꼭 욕을 먹을 수밖에 없더라고.
선호 : 무슨 말이냐면 '잘한다'는 게 사람들마다 달라서 그래. 최저임금만 해도 그렇지. 최저임금 1만원이 지난 정부 국정과제였단말야. 근데 그 때만해도 6천 얼마 하던 걸 갑자기 1만원으로 팍 올릴 수가 없잖아? 당장 치킨집 사장님은 알바생 시급이 2배 가까이 뛰는 건데. 그래서 단계적으로 천천히 올리게 됐지. 물론 단계적이라고는 하지만 거의 천 원씩 올렸지. 파격적으로.

문재인정부 국정과제 64번 <차별 없는 좋은 일터 만들기> : '20년 최저임금 1만원 실현과...

'18년 최저임금 : 7,530원(16.4%, 1,060원 인상) → '19년 최저임금 : 8,350원(10.9%, 820원 인상)

아영 : 근데 그것도 노동운동 하시는 분들이 막 뭐라고 하셨다고 들었어. 왜 정부가 약속을 안 지키냐고. 시급 1만원 당장 하라고.
선호 : 재계쪽에서도 뭐라고 했지. 이렇게 한번에 올리면 소상공인들 다 죽으라는 거냐면서.
기로 : 근데 결국 지금도 시급 1만원은 안 되지 않아요?

'23년 최저임금 : 9,620원(5.0%, 460원 인상)

선호 : 맞아. 그것도 양쪽에서 다 욕하는 포인트야. 노동계에서는 왜 아직도 이만큼 밖에 안 되냐고 하고, 재계에서는 최저임금이 너무 높아져서 경제가 안 좋아졌다고 하고.
아영 : 정책 대상자들이 정책에 대해서 이런 저런 얘기를 하는 건 당연한 일이긴 해. 당장 내 내년 알바비가 달라질 텐데, 어떻게 얘기를 안 하겠어.
기로 : 행정학에서도 배우잖아요. 모든 정책은 누군가에게 손해라고.

행정의 철칙(iron law) : 모두에게 유리한 정책은 없다.

선호 : 맞지. 어떻게 보면 그 분들이 얘기하는 걸 우리가 듣는 게 의견수렴인 거잖아. 여론조사인거고.
아영 : 응. 근데 그게 문제가 아니라 우리나라 사람들한테 공무원에 대한 인식이 너무 안 좋은 게 문제인 거 같아. 정말 뭘 해도 욕을 먹어. 이렇게 하면 이렇게 욕을 먹고, 저렇게 하면 저렇게 욕을 먹고. 현장을 모르네, 탁상행정이네, 칼출칼퇴 하면서 배가 불렀네. 뉴스 댓글 보고 몇 번은 울었어 정말. 전화 받고도 울고.
기로 : 으헝헝. 누나.
선호 : 그래, 내 말이 그거야. 난 심지어 맘카페에 내 이름이 돌아다녔어. 이 자식이 문제라면서. 쎄빠지게 일을 하고 머리가 터져가며 일을 하면 뭐해. 우리가 이러는 걸 알아주지를 않는다니까? 대충 시간 떼우면서 일하다가 6시면 바로 퇴근해서 술이나 먹는 걸로 알지. 진짜 그러면 억울하지라도 않겠다. 하.
아영 : 선호 말이 맞네. 우리 생각이 똑같네 이건.
선호 : 응. 공무원이 되기 전에는 여론이 공무원한테 이렇게 공격적일지 몰랐어.
아영 : 그러게. 이거 때문에 날려먹은 보람이 몇 트럭은 되겠어. 슬프다 정말.



기로 : 좀 다른 얘긴데요, 아까 하던 얘기랑 좀 비슷한가? 그 자율성 얘기하던 거 있잖아요.
선호 : 응, 그거 왜.
기로 : 공무원한테 그렇게 막 자율성을 주면 안 되는 거 아닌가 해서요. 이것도 행정학에서 배우는 내용이지만, 그게 공무원에 대한 민주적 통제 아니에요? 공무원은 국민이 안 뽑았잖아요.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은 국민이 뽑았고. 그러니까 정책도 공무원이 주도하는 게 아니라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이 중심이 되는 게 민주적인 게 아니냐 하는 거죠.
선호 : 나도 공부할 땐 그랬다? 막 무조건 민주주의가 최고고, 풀뿌리 민주주의가 어떻고, 참여를 뭐 어떻게 촉진시키고. 근데 막상 일해보니까 그게 아니더라고. 오히려 그거 때문에 허무할 때가 많아. 보람은 무슨.
기로 : 뭐야, 형 독재주의자에요? 위험한 형이네 이거.
선호 : 아니야! 그게 아니라, 저번에도 잠깐 말했던 거 같은데 공무원들은 뭔가 보람을 느끼려고 공무원이 된 사람들이 많단 말이지.
아영 : 돈 벌려고 공무원이 된 게 아니라, 뭔가 공익을 위해서.
선호 : 그치. 근데 막상 여기 들어와서 일을 하다보면, 아니 내 눈에는 분명 이쪽 길이 우리 사회를 위한 길인 거 같은데, 위에서 정한 방향은 그쪽이 아니란 말이지. 근데 내가 그걸 안 할 수 있나? 아니야, 해야 돼. 그걸 안 하면 항명이잖아. 기로 니 말대로라면 내가 반민주적 공무원이 되는 거고. 거기서 허무함을 느낀다는 거야. 내가 이런 일을 하려고 공무원이 된 게 아닌데 하면서.
아영 : 그런데 그 판단을 개인이 할 수 있나?
선호 : 당연히 그건 아니겠지만, 누나도 일해봤으니까 알잖아. 이건 누가봐도 정치적 수사고, 정치적 논리에 따라 나온 결관데, 거기에 따라야 되는 우리는 가치적으로 이게 타당하다는 논리를 만들어야 되잖아. 외부에도 그렇게 얘기해야 되고, 그렇게 보도자료도 내야 되고. 이게 맞냐는 거야. 심할 때는 내가 저 정치인들을 위해서 일하는 건가 싶을 때도 있었어.
아영 : 하긴, 위에서 시킨 대로 톱니바퀴처럼 굴러가야 한다는 건 분명히 보람이랑은 좀 다르긴 해. 그게 옳냐 그르냐는 우리가 서로 다르게 생각하고 있는 거 같지만.
선호 : 아니, 하다 못해 정권이 바뀌면 보고서 색깔이 바뀌잖아.
아영 : 아, 맞아. 그건 좀 웃기긴 했어.
기로 : 색깔이 바뀌는 게 뭐에요?
선호 : 공무원들 쓰는 보고서에 막 이것저것 장식들을 넣는단 말야. 하다못해 보고서 겉표지 제목에는 컬러박스라도 있거든. 근데 그 박스 색깔이 바꼈다고. 정부가 바뀌면서.
기로 : 설마 파란색에서 빨간색으로?
선호 : 정확해.
기로 : 와, 그런 것도 공무원들이 하는 건가요.
선호 : 그럼 누가 하냐? 보고서를 쓰는 게 공무원이 하는 일인데.
아영 : 국조실, 행안부 할 거 없이 색깔이 일제히 쫙 바뀌더라.
선호 : 난 파란색으로 보고서 써갔다가 빠꾸먹었잖아. 빨간색으로 고쳐오라고. 이런 게 무슨 보람이 있겠어.
기로 : 신기하네요.
선호 : 더 신기한 건 뭔지 알아? 보고서 겉표지 색깔을 바꾸듯이 정책들도 바꿔야 한다는 거야. 아니, 행정에 일관성이 없어 무슨. 예를 들어서, 그래, 환경부 있지? 여기는 환경을 지켜야 되냐 경제를 개발해야 되냐.
기로 : 당연히 환경을 지키자고 하겠죠.
선호 : 그치? 근데 이게 정부에 따라 확 달라진다고. 얼마 전까지만해도 그렇게 환경 환경거렸던 곳이었는데, 이제 경제 경제 한다잖아.

환경부 소관 주요 국정과제 : (문재인 정부) 쾌적한 대기환경 조성, 지속가능한 국토환경 조성, 신기후체제 이행체계 구축 → (윤석열 정부) 녹색경제 전환, 기후재해 대응 환경 조성, 순환경제 완성

기로 : 거의 파란표지가 빨간표지로 바뀌는 급이네요.
아영 : 그렇다고 그런 부처들을 비난할 수는 없잖아. 그렇게 정책 기조를 바꾼 이유가 있을 텐데.
선호 : 부처들을 비난하는 게 아니라, 자기 철학이나 도덕적 마인드를 뒤로 하고 한 입으로 두 말해야 되는 공무원들 처지가 그렇다는 거야 난. 사회를 위하자는 마음으로 공무원이 됐는데, 몇몇 귀족의 수족이 된 느낌이라니까? 아니다. 수족은 너무 갔고 손톱 발톱 정도? 어차피 그 귀족님들은 내 이름도 모를 테니까.
기로 : 형 완전 흑화했네요.
선호 : 속상해서 그래 속상해서.



아영 : 그렇지만 난 아무리 선호가 이러네 저러네 해도, 결국 공무원은 우리나라 국민을 위하고 사회를 위하는 일을 한다는 건 맞는 거 같아. 개인적으로 그동안 일하면서 보람을 느끼기도 했고.
선호 : 누나 말에 동의는 하는데, 최소한 내가 생각했던 직업이 아니긴 해. 내가 뭘 해도 국민들은 욕하지, 고생은 고생대로 하지, 돈은 돈대로 못 벌지, 근데 심지어 내가 내 업무에 대해서 고민도 하면 안 되잖아. 영혼을 빼놓고 일해야 된다고.
기로 : 아하, 이래서 영혼 없는 공무원이라는 말이.

<영혼 없는 공무원> ('23.6.14. 파이낸셜 뉴스)

선호 : 영혼 없는 공무원이 맞다 아니다를 떠나서, 하여튼 직업적 성취는 최악이야 난. 보람이 너무 없어. 이런 일 하려고 공무원 되고 싶었던 게 아니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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