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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두칠 Jan 02. 2024

세금낭비 헛노동

단점 열넷 : 업무방식

기로 : 형이랑 누나는 공부 오래한 편이죠?
아영 : 그런 편이지. 동기들 중에 이만큼 많이 한 사람은 별로 없더라.
선호 : 맞아. 공부할 땐 몰랐는데 시험 붙고 나서 진짜 놀랐던 것 중에 하나가 의외로 초시합격이 많다는 거야.
아영 : 1년만에 뚝딱 붙는.
선호 : 어. 그게 아니더라도 보통 2년이면 엔간해서 붙는 거 같아. 초시나 재시로 붙는 게 한 절반은 될 걸?

2023년 행정고시 합격자 중 2차 응시 2회 이하 비율 : 48.8% ('23.9.21. 법률저널 기사 참고)

기로 : 대단한 사람들 많네요.
아영 : 근데 난 다른 일 하면서 합격하는 사람들이 더 대단하더라.
선호 : 아, 맞아. 어떻게 직장 다니면서 시험 준비를 했나 모르겠네.
아영 : 응, 그러니까. 일 해보니까 더 대단한 걸 알겠어.
선호 : 근데 우리 공부 오래했는지는 왜?
기로 : 아니, 시험 공부 좀 물어보려고요. 어제 강의를 듣는데 진짜 너무 쪼잔한 거까지 다 가르치더라고요.
선호 : 왜? 너무 디테일해?
기로 : 네. 이런 거까지 알아야하나 싶은 거까지...
선호 : 하긴. 시험에 나오지도 않을 것까지 공부하는 건 좀 시간낭비긴 하지.
아영 : 에이, 시험에 뭐가 나올지 어떻게 알아. 안 나올 거 같다가도 불의타로 나오고 그러잖아.
선호 : 그게 우리 문제였어 누나. 시험 빨리 붙은 애들은 불의타를 별로 생각 안 한대. 중요한 것만 한다는 거야. 공부 효율성을 엄청 올리는 거지. 공부시간 대비 시험점수가 좋은 거야 그래서.
아영 : 그래도 모르는 게 나왔는데 어떻게 넘어가. 내 성격에 그게 안 되는데.
선호 : 그래서 꼼꼼한 사람들은 시험에 늦게 붙는대. 나오지도 않을 거까지 공부해서. 약간 헛공부 느낌이지.
아영 : 내가 헛공부를 그렇게 하느라 늦게 붙었네?
선호 : 아니 뭐 나도 그렇잖아...



선호 : 근데 기로가 헛공부 하는 거 보다 우리가 헛노동하는 게 훨씬 많을 거 같지 않아 누나?
아영 : 그건 진짜 완전 100%. 무조건이지. 사실 우리는 헛노동하는 시간만 빼도 야근 거의 안 할 거 같지 않아?
선호 : 인정.
기로 : 대체 공무원이 뭘 그렇게 쓸 데 없게 일하는 거죠? 저번에 말한 국회대기 같은 것들 얘기하는 거에요?
아영 : 음, 그것도 그래. 근데 행정적으로 업무방식이 좀 그런 거 같아.
선호 : 당연히 모든 공무원이 그런 건 아닌데, 최소한 우리는 그렇지. 중앙부처 공무원들은 어쩔 수 없는 게 있는 거 같아.
아영 : 맞아. 꼭 중앙부처 아니더라도 그냥 행정기관에 일하는 공무원들은 어쩔 수 없을걸?
기로 : 그러니까 뭐가요? 뭘 쓸 데 없이 일해요? 아니 그리고 스스로 가짜노동 하고 있다는 걸 알면 안 하면 되는 거 아니에요? 왜 쓸 데 없는 일인 걸 알면서도 그냥 하는 거죠?
아영 : 음, 이게 헛노동에도 종류가 있는데, 제일 많은 건 아마 내가 뭘 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노동인 거 같애.
선호 : 맞아. 보여주기, 증명하기, 감시당하기, 뭐 이런 거?
기로 : 누구한테 보여줘요?
아영 : 되게 많지? 일단 상사한테도 보여주고?
기로 : 그럼 그 보여주기라는 건 말단 공무원들만 하는 거 아니에요?
아영 : 아니지. 상사한테도 상사가 있잖아. 대통령만 상사가 없지.
기로 : 아, 그렇네요.
선호 : 근데 그 상사들이 상사의 상사한테 보여주기 위한 것도 다 실무자들이 만들긴 하잖아.
아영 : 맞아. 그건 그래.
기로 : 어떻게 보여주는 건데요? 그게 노동이라고 부를 만큼 일이 되나요.
선호 : 이게 왜 그러냐면, 공무원은 다 문서로 일을 한단 말야. 말이 아니라 글로 일을 한다고 그러거든.
기로 : 네, 그래서요?
선호 : 그래서 다 글로 쓰는 거야. 매주마다 지난주엔 뭘 했고 이번주엔 뭘 할지.
기로 : 와, 무슨 반성문 같은데요.
선호 : 어, 진짜. 그걸 과장님한테 보고하고 피드백 받아서 고치고, 다시 또 국장님한테 보고하고 피드백 받아서 고치고. 이걸 매주 해.
아영 : 주간도 있는데, 월간도 있고.
선호 : 맞아. 크게 보면 연두 업무보고, 정부별 백서, 다 마찬가지고.
기로 : 그게 어디까지 보고가 올라가는 거에요?
선호 : 업무 중요도에 따라 다르긴 한데, 자잘한 게 아니면 보통 장관까진 가.
아영 : 기관장.
선호 : 아, 그치. 차관급도 있으니까.

2024년 1월 현재 대한민국 정부는 19부 3처 19청이며, 부의 수장은 장관이고 처의 수장은 장관급이나 청 및 위원회 등은 기관별로 수장의 직급이 상이함

기로 : 와, 엄청 올라가네요.
선호 : 좀 중요하다 싶은 건 대통령실까지 가고.
기로 : 와.
선호 : 그러니까 주간이나 월간이나 이런 게 우리보다 높은 사람 입장에서도 자기 상관한테 보고가 올라가는 거란 말이지. 그래서 이거에 신경을 쓸 수 밖에 없다 하더라고.
아영 : 그럴 거 같아 진짜.
선호 : 어. 잘못하면 지난 주에 할 일 안 하고 논 걸로 보이잖아.


기로 : 어, 근데 그렇게 보니까 좀 필요하긴 한 거 같은데요? 정보 비대칭 상황인 거니까? 감시를 좀 해야 되지 않나?

정보 비대칭(Information Asymmetry) : 쌍방이 보유한 정보에 차이가 있는 현상을 일컫는 말. 정보 비대칭으로 인해 일어날 수 있는 대표적 문제로 도덕적 해이(Moral Hazard)가 꼽힘.

선호 : 필요는 한데, 정도의 문제지. 그런 거 때문에 진짜 일을 못하면 문제 아냐?
기로 : 그런 보고서 쓰는 것도 해야 될 업무인 거 아니에요?
선호 : 아니, 니 말이 맞긴 맞는데, 공무원이 해야 될 게 그런 게 아니잖아. 예컨대 막말로 FTA협상을 코앞에 두고 그거 준비하기도 바쁜데 위에다가 지난주엔 뭐했니 이번주엔 뭐할거니 하느라 협상준비를 제대로 안 하면 그게 맞아? 조항 하나 하나에 달린 국민들 밥줄이 몇 갠데?
기로 : 그건 그러네요. 그 정도로 감시당하는 일이 많아요?
선호 : 많아. 진짜 많아.
아영 : 지금은 주간업무계획 같은 거만 얘기해서 그런데, 따지고 보면 진짜 많아. 개인별로 성과평가도 하고, 근무성적평가도 한댔잖아? 그것도 다 일종의 감시지. 주인-대리인 입장에서.

주인-대리인(princial-agent) : 권한의 위임자와 피위임자 간 관계를 일컫는 말. 동 관계는 양자의 정보 비대칭으로 인한 도덕적 해이 문제가 발생할 위험이 높음.

선호 : 행정 내부적으로만 그런 것도 아니고, 국회나 지방의회도 있잖아. 거기는 애초에 행정부 견제가 고유 업무니까 우리한테 이 자료 저 자료 다 요구하지. 우린 당연히 비공개 정보 아니면 공개해야 되고.

정보공개법 제9조(비공개 대상 정보) ① 공공기관이 보유ㆍ관리하는 정보는 공개 대상이 된다. 다만,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정보는 공개하지 아니할 수 있다. <각호생략>

아영 : 국회를 거쳐서만 오는 게 아니라, 국민들이 직접 자료 요청하기도 하잖아.
선호 : 그치. 정보공개청구. 이것도 똑같지. 비공개 정보 아니면 다 줘야지.

정보공개법 제10조(정보공개의 청구방법) ① 정보의 공개를 청구하는 자는 해당 정보를 보유하거나 관리하고 있는 공공기관에 다음 각 호의 사항을 적은 정보공개 청구서를 제출하거나 말로써 정보의 공개를 청구할 수 있다.

아영 : 맞다. 그리고 특별할 때는 주간으로 하는 게 아니라 일간 계획을 짜야 돼.
기로 : 어, 매일 매일은 좀 심한데요.
아영 : 매일 매일은 아니고, 스마트워크라고 원격근무 할 때는 그래.

"원격근무제를 신청하고자 하는 자는 '원격근무 계획서' 및 '원격근무 보안서약서'를 작성하여 소속 부서장에게 신청"하고 "원격근무자는 원격근무를 마치게 되면 그날의 근무 성과를 ‘일일 원격근무 실적 보고서’에 정리·작성하여 업무메일 또는 메모보고 등을 활용하여 부서장 등 관리자에게 보고해야 함" (국가공무원 복무 징계 관련 예규, 인사혁신처)

선호 : 아, 출장보고서도 있네. 국외출장.
아영 : 맞네. 외국으로 출장 다녀오면 보고서 써야지.

공무국외출장자는 귀국 후 30일 이내에 공무국외출장결과보고서를 작성하여 소속 장관에게 제출하여야 함 (국가공무원 복무 징계 관련 예규, 인사혁신처)

기로 : 그것도 감시인거죠?
아영 : 응. 외유성 해외출장 못 가게 하려는 취지지.
기로 : 뭐가 많긴 많네요.


선호 : 기로 너 말대로 감시당하는 거야 뭐 나름대로 최소한의 의미라도 있지. 진짜 답답한 건 행정을 위한 행정을 할 때. 이건 뭐랄까. 헛노동 수준이 아니라, 가짜노동 같은 느낌?
기로 : 그건 또 언제에요?
선호 : 이것도 되게 많은데, 일단 당장 생각나는 건 간부 티타임 자료?
기로 : 티타임이요? 차 마시는 거?
선호 : 그렇지, 단어 뜻만 따지면.
기로 : 아니, 거기에 무슨 자료가 필요해요?
선호 : 말은 티타임인데, 매주 정기적으로 만나는 회의야. 기관마다 다르지. 하는 곳도 있고, 아닌 곳도 있고, 이름도 기관별로 다를 수 있고. 근데 어쨌든 높은 분들이 만나는 회의니까 또 자료가 필요한 거야. 그러면 결국 또 그거야. 지금까지 뭐 했고, 앞으로 뭐 할 거고.
기로 : 아까 그런 보고서 쓴댔잖아요. 주간계획? 그런 이름이었는데?
선호 : 맞아. 근데 이건 그거랑 또 별개야. 매주 만나는데, 만나면 자료가 필요하니까 또 만들래. 근데 주간업무계획이랑 겹치면 또 안 돼. 쓸 게 없어서 똑같은 거 복붙한 느낌이잖아.
기로 : 아니 그게 뭐에요.
선호 : 근데 진짜 현실이 그래.
기로 : 너무한다.
선호 : 괜히 행정을 위한 행정이라고 하는 게 아냐. 행정을 위한 행정, 회의를 위한 회의.
아영 : 선호 말에 좀 보태면, 우리는 티타임 자료라는 말은 안 쓰는데, 그거 비슷한 자료는 몇 개씩 만드는 거 같아. 간부회의 자료도 만들고, 고위 관리자 회의 자료, 3국장 회의, 뭐 많지. 형식은 결국 다 그거고.
선호 : 누나네도 스트레스 많겠는데?
아영 : 응. 이거 은근 스트레스 받아. 안 겹치게 쓰라는데 어떻게 안 겹쳐. 일 하는 사람이 나 하난데.
기로 : 형이 가짜노동이라고 했던 의도를 알겠네요. 굳이 안 벌려도 되는 일인데 굳이굳이 한다는 거죠?
선호 : 어, 그거야. 국민들한테 도움이 되냐 하면 전혀 1도 안 되는데, 그냥 행정적으로 내부에서만 중요하다 중요하다 하면서 호들갑 떠는 거야.
아영 : 나 그것도 있다. 막 위로 보고 올라가는 건 아닌데, 매주 우리과 전부 다 모여서 회의를 하거든? 근데 거기서 자기가 지난주에 무슨 일 했고 이번주에 무슨 일 할 건지 말한다?
선호 : 그걸 왜 해?
아영 : 몰라. 뭐 취지는 팀원들끼리 서로 무슨 일을 하는지 알자는 건데, 모르겠어 왜 하는지. 누가 자기한테 일 몰린다고 생각할까봐 그러는 건가.
선호 : 아, 그런 것도 있긴 있겠네. 업무분장이 잘 됐으면 서로 골고루 바쁠 테니까.
아영 : 근데 업무마다 사이클이 다르잖아. 내가 이번달에 바빴으면 다른 사람은 다음달에 바쁘고 할 수 있는 건데.
선호 : 그건 그래.
아영 : 아 몰라. 어쨌든 진짜 귀찮아. 안 그래도 시간 없는데.
기로 : 공무원이 이래서 바쁜건가요.


선호 : 야, 진짜 이쪽으로 얘기하니까 불평할 게 끝도 없이 나온다.
기로 : 저는 제 일이 아니라서 그런가 재밌는데요.
선호 : 앞으로 니가 할 일인데 뭐가 재밌어. 한 치 앞을 못 보네 얘는.
기로 : 그래서 또 뭔데요.
선호 : 감시당하는 건 최소한의 의미라도 있고, 회의를 위한 회의는 안 해도 될 일을 벌이는 창조노동 느낌이었다면, 이거는 약간 사기치는 느낌?
기로 : 표현이 너무 센데요. 사기라니.
선호 : 좋게 말하면 마케팅이고 정책홍보고 행정안내고 그러긴 한데, 나쁘게 말하면 포장하기? 사기치기? 그런 거 같다.
기로 : 뭔데요?
선호 : 정책이든 뭐든 뭘 하잖아? 그럼 그걸 여기저기서 걸어. 예를 들면, 여기선 청년정책이다 걸고, 저기선 주거대책이다 걸고, 또 뭐 SOC 대투자다, 지역살리기 정책이다, 저출산대책이다 다 거는거야.
기로 : 거는 게 뭐에요?
선호 : 포함시킨다고. 그니까 정작 정책은 하난데, 그걸 이 대책 저 대책에 다 포함시키는 거야. 표현만 살짝씩 바꿔서.
기로 : 예를 들면?
선호 : 예를 들면, 요즘 저출산 문제가 심각하니까 저출산 문제 대응 대책 같은 게 나오겠지? 그럼 그 페이퍼 안에 보면 그 정책이 들어있는 거지. 근데 그 정책은 지난 달 발표했었던 주거대책에도 들어있었고, 다음달 발표하는 지역살리기 정책에도 들어갈 예정이고.
기로 : 어, 그건 좀 그런데요. 그러니까 이미 발표도 했고 추진도 하고 있는 정책인데, 새로 발표하는 대책에도 그걸 넣어서 또 발표한다는 거죠?
선호 : 맞아. 그래놓고 뭐 이번 대책은 예산이 총 얼마 들어갔다면서 되게 큰 걸 새로 하는 것처럼 포장한다는 거지.
아영 : 그래도 아예 상관 없는 걸 엮지는 않잖아.
선호 : 아냐, 누나. 이것도 정도의 문제인 거 같긴 한데, 진짜 아예 상관없는데 억지로 껴넣는 것도 몇 번은 봤어.
기로 : 그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뭐에요?
선호 : 성과를 이만큼 냈다는 걸 드러내야 되니까. 보고서가 두껍고, 예산이 크고, 정책 가짓수가 많으면 되게 있어보이잖아.
기로 : 그래서 백화점식 대책이라고 하는구나.

<위험 공포는 눈앞인데... 백화점식 치안대책 나열한 정부> ('23.8.24. 한국일보)

선호 : 맞아, 딱 그건 거 같아. 우리나라 행정 돌아가는 걸 보면, 백화점식 처방이 안 나올 수가 없어.
기로 : 근데 그렇게 되면 공무원들은 또 가짜노동을 하는 거죠?
선호 : 그치. 정책 입장에서 보면 뭐 새로운 걸 하는 게 아니더라도 행정적으로는 일이 늘어나거든.
기로 : 어떻게 늘어나요? 뭐 예산 같은 건 더 해야될 게 없을 거 같은데.
선호 : 순수하게 예산만 보면 그렇긴 한데, 꼭 그렇지도 않아. 그 예산을 어떻게 쓰고 있는지, 어떻게 썼는지 보고할 곳이 늘어나는 거거든.
아영 : 아예 처음부터 얘기해주는 게 좋을 거 같은데? 정책 담당자라면 일단 보고서부터 써야 돼.
기로 : 또 보고서에요? 진짜 공무원은 무조건 글이네요.
아영 : 응. 종합대책이랬잖아? 그리고 거기에 지금 내가 담당하는 정책이 들어간댔잖아? 그러면 그 정책 내용을 누가 써.
기로 : 어, 종합대책을 만드는 사람이?
아영 : 아니지. 초안은 그럴 수도 있는데, 그 사람은 내 정책을 모르잖아. 핀트가 다르게 쓸 수 있단 말야. 그러면 결국 워딩을 내가 쓰지. 외부로 나가는 거니까 당연히 위에다가 보고랑 피드백 다 거쳐야되고.
선호 : 그 때 막 싸우기도 하잖아.
아영 : 맞아 맞아. 종합대책 만드는 곳이 우리 부처가 아니면, 자기네들 대책 목표에 맞게 표현을 살짝 비튼단 말야. 근데 그렇게 비튼 표현이 정책 담당 부처 입장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표현일 때도 많지. 오해가 생기니까.
선호 : 그치. 원래는 ‘추진 검토’였는데 ‘추진’으로 바꾼다거나.
아영 : 응응. 그러면 무조건 한다는 소리가 되잖아.
기로 : 아, 이게 되게 까다롭네요. 밖에서 보면 ‘추진 검토’나 ‘추진’이나 똑같은 거 같은데.
선호 : 어쩔 수 없어. 정부의 공식 입장인데, 표현 하나 하나 깐깐해야지. 아니면 또 뭐 정부가 거짓말 했다느니 하면서 난리날걸.
기로 : 어쨌든 그렇게 보고서 쓰고난 다음엔요?
아영 : 그 다음엔 뭐 할 거 다 해야지. 종합대책 만드는 곳에서 보도자료도 만들 텐데 그것도 또 봐야되고, 무슨 회의다 하면 관계부처니까 또 들어가야 되고, 그게 장관급 회의면 장관님 일정 잡아야 되고, 어디 행사다 하면 행사 또 챙겨야 되고.
기로 : 와, 뭐가 되게 많이 딸려오네요.
아영 : 응, 이게 그냥 어디 보고서에 들어갔다고 끝!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선호 : 성과관리도 해야지.
기로 : 성과관리요?
아영 : 맞아. 성과관리 해야지. 종합대책은 아까 기로도 얘기했지만 백화점식이잖아? 막 이 정책 저 정책 다 섞여있단 말야? 그러면 그 정책들이 제대로 추진되는지 관리해야지. 발표로 끝나는 게 아니라, 발표는 앞으로 이렇게 이렇게 하겠다는 선언 같은 거고, 그걸 실제로 추진하는 게 중요하니까.
기로 : 그걸 추진하는 건 어떻게 관리하는 건데요?
아영 : 공무원이잖아. 또 문서로 관리해야지. 보고서로.
기로 : 으아. 보고서 지옥이네.
아영 : 그것도 다 제멋대로면 안 되니까 딱 양식이 있어. 보통 성과관리카드라고 부르는데, 대책마다 관리하는 거고, 담당 부처에서 양식을 만들어서 뿌리기는 하는데 거의 거기서 거기야. 문제점, 현황, 주요내용, 성과, 향후계획 정도? 어떨 땐 목표를 숫자로 딱 정해놓고 관리하기도 하고.
기로 : 근데 대책마다 관리한다 하면요, 정책은 하난데 성과관리카드가 여럿인 거에요?
아영 : 맞아. 여러 번 써야지. 내용은 대동소이해도 표현이 달라야 되거든. 예를 들면 저출산대책에 포함돼 있으면 ‘출산에 얼마나 기여했는지’를 중점적으로 써야 되고, 지방살리기 대책이면 ‘지역경제에 얼마나 기여했는지’가 눈에 띄어야 되니까.
선호 : 그렇게 해야 나중에 정책별로 효과를 싹 묶어서 우리 종합대책이 이렇고 이렇게 대단한 성과를 냈다고 홍보할 수 있거든.
기로 : 저는 정부가 대책 발표하면 항상 새로운 것만 있는 줄 알았어요. 지금 하고 있는 것까지 섞어서 내는 건 줄은 진짜 전혀 몰랐네.
선호 : 나 같은 실무자 입장에서는 그게 좀 짜증나지. 안 그래도 지금 바빠 죽겠는데, 담당 정책 챙기기도 빡센데 자꾸 여기 저기서 다리 하나씩 걸쳐대니까, 정작 진짜 일을 할 정신이 없는 거야.
기로 : 그러겠네요 진짜.



아영 : 근데 난 그런 생각도 한다? 아직 우리가 뭘 잘 몰라서 그런거지, 사실 따지고 보면 다 의미는 있는 일일 수 있다고.
선호 : 아니, 지금까지 헛노동이라고 우리가 입을 맞춰서 깠는데 무슨 소리야 누나.
아영 : 아니, 봐봐. 이 대책 저 대책에 막 엮이는 것도 그래. 국민들 입장에서는 정부가 그렇게 딱 정리해주는 게 이해하기 좋지 않아? 예산 입장에서 봐도 새로운 목표마다 새로 사업을 만들고 예산을 쓰기 보다는 지금 하고 있는 정책 효과를 잘 분석하는 게 얼마나 좋아.
선호 : 흠.
아영 : 예를 들어서 지역에 대학을 하나 놓는다고 쳐봐? 이게 처음에는 교육정책으로 추진됐어도, 일자리 창출도 하고, 지역도 살리고, 주거환경 안정화 효과도 있을 거고, 그러면 저출산 대책이기도 하고, 평생교육 시설로 쓰면 지역 복지 사업도 되고, 그렇잖아? 그러면 이게 이 대책 저 대책에 다 넣는 게 말이 안 되지는 않는다는 거지.
선호 : 근데 그건 좀 느낌이 다른 게, 누나가 말한 건 정책의 효과 분석 같은 거잖아?
아영 : 응, 그치.
선호 : 근데 종합대책에 넣어서 발표하는 건, 지금까지 안 하던 정책을 이러이러하게 추진하겠다는 느낌이잖아. 좀 포장에 너무 신경을 쓴달까. 포장하느라 세금을 갈아넣으면, 그게 세금낭비 아니고 뭐야.
아영 : 그건 그래.
선호 : 그리고 누나도 그렇게 느낄 거지만, 포장을 막 이 모양 저 모양으로 휘황찬란하게 해서 뭐해. 결국 그 내용물이 중요한 건데, 포장일 하느라 중요한 걸 할 정신이 없게 만드는데.
아영 :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니까? 내 말은, 우리처럼 그걸 다 챙겨야되는 실무자가 아니라, 의미만 생각하는 관리자라면 밑에다가 포장에 신경쓰라고 얘기할만 하다는 거지. 그게 맞는지 틀린지를 떠나서.
선호 : 아니, 내가 그 포장일 하다가 죽겠다니까.
아영 : 나도 죽겠다 죽겠어.
기로 : 죽지마요, 형! 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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