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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릴리 Jan 21. 2024

전 남친의 결혼식

왜 자꾸 눈물이 나는 걸까


내 결혼식에 그 아이는 오지 않았었다. 갈까 말까 마지막까지 망설였지만 토요일 수업 스케줄까지 바꾸어 결국 가보기로 했다. 백만 년 만에 힐을 꺼내 신었다. 아끼는 검정벨벳원피스를 입고 진주목걸이와 검정꽃 펜던트가 있는 목걸이를 고민하다 클래식한 진주목걸이를 목에 걸었다. 코트까지 걸치고 거울을 보니 뭐, 릴리 아직 죽지 않았네. 선크림을 바르고 그 위에 비비크림을 올려 잡티를 가려본다. 한 살이라도 어려 보이고 싶어 핑크색 볼터치로 볼도 살짝 두드려 주었다. 너무 신경 쓴 것처럼 보이면 촌스러우니 마스카라대신 뷰러로 속눈썹만 살짝 올려준다. 마지막 마무리는 뭐니 뭐니 해도 입술이다. 디올, 맥, 슈에무라를 모두 제치고 요즘제일 많이 바르는 누디과몰입을 바르고(슈에무라의 강남핑크를 바르고 도도하게 나왔어야 했는데 누디과몰입을 바르는 바람에 결혼식에 너무 과몰입했다. 립스틱부터 실수다.) 결혼식장으로 향했다.


신부는 외국사람 이었다. 결혼식이 시작되기 전부터 커다란 화면에 신랑신부의 영상이 나오고 있었다. 두 사람의 사랑 가득한 모습이 화면을 뚫고 나와 온 주변을 화사한 봄처럼 물들였다. 서로를 바라보는 모습에서는 꿀이 뚝뚝 떨어졌고 둘만의 세상에서 살고 있는 듯했다. 영상의 사진들을 본인들이 골랐을 텐데 '저런 사진은 좀 부끄럽지 않나?' 하는 사진들이 있는 걸 보면 나는 어느새 옛날 사람이 된 것인가 싶었고 또 한편으로는 '그 아이답다'라는 생각도 들었다. 신랑 신부의 어릴 적 모습, 함께 있는 모습들, 여행하는 모습들, 그리고 프러포즈를 받고 감격해서 우는 신부의 모습, 그런 신부를 끌어당겨와 꼬옥 안아주는 모습까지 하나하나 모두 다 예뻤다.



자카란다



신부의 가족과 친구들이 44명이나 왔다고 했다. 수줍게 웃으며 신부대기실에 앉아있는 신부가 예뻤다. 예쁠 나이였다. 신부의 옆자리는 잠시도 비지 않았고 잠깐 들어가 볼까 고민했지만 그럴 용기까진 나지 않아 멀리서만 바라보았다. 신랑은 본인의 손님들과 신부의 손님들을 모두 챙기느라 정신이 없었다. 다행이다. 나를 발견하진 못한 것 같다. 그 틈을 타서 조용히 식장으로 들어갔다. 무대가 높고 그 뒤 양쪽 아래로 하객석이 있었다. 신랑신부가 하객들을 위에서 아래로 보는 구조였다. 게다가 조명이 워낙에 강렬해서 누가 누군지 잘 보이지도 않을 것 같다. 이제 마음을 좀 놓아도 되겠다. 잘 보고 싶은 마음에 앞쪽 빈자리로 가서 앉았다. 영상이 멈추었고 결혼식이 시작되었다. 주례가 없는 결혼식이었다. 사회자가 진행을 하고 신부의 친구가 그 나라말로 한 번 더 이야기해 주었다.


                                                           

 "신랑 입장"





자연스럽게 입구 쪽을 바라보았는 데 있어야 할 신랑이 사라졌다. 하객들이 모두 두리번거리기 시작하고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바로 그때, 무대 앞으로 조명이 비치며 벽이 열렸다. 딱 맞추어 흘러나오는 BTS의 Dynamite



Cos ah ah I'm in the stars tonight


So watch me bring the fire and set the night alight


Shoes on get up in the morn


Cup of milk let's rock and roll

 

King Kong kick the drum rolling on link a rolling stone

 

Sing song when I'm walking home



뒷모습의 신랑이 보였고 포즈를 취하던 신랑은 앞으로 걸어 나와 춤을 췄다. 맙소사. 잠깐 추고 끝날 줄 알았던 춤은 노래가 한참 흐를 때까지 계속되었고 신랑은 눈부시게 웃으며 열심히 연습한 동작들을 선보였다. 사람들은 모두 환호했고 휴대폰을 꺼내 들었고 박수를 쳤다. 잠시동안 나도 여기가 어디인지 내가 누구인지를 잊고 말았다. 마음속으로 몹시도 떨고 있을 그 아이를 위해 힘을 보태려 박수를 치고 소리를 내었다.


“오오오!! 와아아!!”



아름다웠던 결혼식



오늘을 위해 열심히 준비했을 그 아이가 참 멋져 보였다. 순간, 모두들 웃고 있는데 후드득 눈물이 떨어졌다. 한 방울이 아니라 자꾸 떨어진다. 바로 그때, 춤을 추며 하객들을 살피던 그와 눈이 마주쳤다. 하필 눈물이 자꾸 떨어져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을 때.


잠시 후, 신부가 입장할 차례가 되었다. 신부는 왼쪽 뒤편에서 벽이 열리더니 등장했다. 아이유의 고운 음색에 맞추어 한발 한발 입장하는 반짝이는 신부를 보며 또 눈물이 났다. 줄줄.








"아빠, 엄마 울어."

"숙모, 왜 울어요? "

"슬퍼요? 아니면 기뻐서요?"


그래. 전 남친 결혼식이 아니라 사촌도련님의 결혼식이다. 우리가 결혼할 때도 외국에 있었던 까닭에 결혼한 지 10년이 넘었지만 오늘 본 것까지 합쳐도 3-4번 정도이다. 그런데 사연 있는 여자처럼, 전 남자 친구의 결혼식에라도 온 것처럼 눈물을 줄줄 흘렸다. 신랑의 Dynamite 댄스를 볼 때도 신부가 입장할 때도 그리고 신랑신부가 양가부모님께 인사를 할 때는 눈물을 닦느라 정신이 없었다. 신부의 부모님은 신랑을 한참 안고 계셨고 신랑은 걱정 마시라고 사랑하고 아끼며 잘 살겠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모르는 사람이 봤더라면 신랑의 전여자 친구로 오해했을지도 모른다. 식장안이 어두워서 정말 다행이었다. 우리 테이블의 남편과 꼬맹이들 말고는 나를 주목하는 사람은 없는 것 같으니 말이다.





자기 나라를 떠나 타지에서 살아가게 될 신부의 마음이 되었다가, 다시 신부의 엄마아빠 마음에 과몰입되어 눈물이 났다. 역시 누디과몰입말고 강남핑크를 발랐어야 했다. (정작 신부의 부모님은 울지 않으시고 잘 참으셨다. 따지고 보면 생판 남인 내가 부탁하지도 않으셨는데 대신 울어드렸다.) 예전부터 결혼식에 가면 눈물을 살짝씩 훔치는 나였다. 신부가 아빠의 손을 잡고 버진로드를 걸을 때나 신랑신부가 부모님께 인사를 드릴 때, 혹은 그냥 결혼식이 아름다워서 눈물이 터지기도 했다. 잠깐씩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꽤 많은 장면에서 나도 모르는 눈물버튼이 있었나 보다. 본식이 시작하기 전 영상에서 신랑신부의 모습을 볼 때부터였다.


신랑신부의 모습을 보며 '예쁘다~'고 생각하면서 꿈 많던 내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10대를 지나 20대, 뭐든 시작해도 되는 나의 20대에게 망설이지 말고 고민하지 말고 생각하는 것 모두 다 하면 된다고 이야기해주고 싶었다. 새로운 것을 다시 시작하기에 많은 나이가 아닌가 하고 생각했던 스물다섯, 스물여섯의 나에게는 얼마나 아름답고 어리고 행복한 나이인지 알려주고 싶었다. 또 스물여덟, 스물아홉의 나에게는 더 자유롭게 살아라고. 더 마음껏 하라고. 이야기해주고 싶었다. 지나고 나니 서른도 너무 어린 나이라고.


사랑에 빠졌던 우리가, 결혼을 하던 우리가, 임신을 하고 이든이가 태어났을 때의 우리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사촌도련님의 결혼식동안 모두 스쳐 지나갔다. 언제 이렇게 세월이 흐른 건지. 그 시절이 그립다는 마음도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도 아니다. 그냥 참 아름다웠던 시절이었다. 지나고 나야 보인다. 흐르고 나서야 알게 된다.





꿈 많던 시절의 나를 다시 꿈꾸고 있는 내가 만났다.


모두 이루지 못하면 좀 어떤가. 시작이라도 했다면, 한걸음이라도 걸어갔다면 이 모든 게 다 꿈으로 다가가는 발걸음이다. 누구에게 인정받지 못하면 또 어떤가. 내가 나를 인정해 주면 된다.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꿈꾸며 얼마나 행복했는지 알고 있으니. 더 많이 기뻐하고 응원해 주면 된다. 어제의 나에게 오늘의 내가. 지난달의 나에게 이번달의 내가. 지난해의 나에게 새해의 내가. 한 살 어려서 예쁘고 사랑스러웠던 나에게 한 살 많아 우아하고 기품 있어질 내가.



결혼식이 끝나고 식당으로 인사를 하러 온 도련님에게 말했다.


"결혼식 너무 감동적이었어요. 춤도 정말 잘 추던데요? ^^" 하며 쿨하게 인사했다.(고 생각했다.)


"형수님 우시는 거 봤어요. ^^" 하며 웃는 도련님


아뿔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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