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2일 토요일, 비가 올듯한 흐린 날씨. 7시경에 집을 나섭니다. 기온을 보니 24도, 공기가 선선합니다. 오늘은 '온에어런(On Air Run) for 밤섬 서울마라톤'이 있는 날입니다. 그동안은 주로 지하철을 이용해서 마라톤 대회에 참가했는데, 오늘은 버스를 탑니다. 여의도 가는 162번 버스입니다.
그런데 마라톤 대회 이름이 뭔가 매우 복잡합니다. 'On Air'란 방송 중, 즉 방송국에서 전파가 송출되고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니 '온에어 런'이란 '방송 중 달리기'일까? 마라톤 대회를 누가 주최했나 보니 공동체라디오 마포 FM입니다. 방송국에서 주최하는 마라톤 대회라서 이름이 이런 모양입니다. 마포 FM은 이 대회를 통해서 참가비를 모아 방송국 운영기금으로 사용하고 일부는 한강 안에 있는 밤섬을 알리고 보존하는 데 사용한다고 합니다.
밤섬은 2012년 6월 21일에 람사르습지로 지정되었습니다. 이것을 기념하여 마포 FM이 몇 해 전부터 밤섬을 홍보하고 생태환경을 보존하는 '밤섬프로젝트'를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매년 6월에 밤섬 근처에서 마라톤을 개최한다고 합니다. 원래 있던 밤섬은 1960년대 말에 여의도를 개발하면서 축대를 쌓기 위해 폭파하여 암석과 흙을 가져다 쓰고 없애버렸는데 그 자리에 다시 자연적으로 흙과 모래가 모이고 수많은 철새들과 동식물이 서식하는 습지가 형성되었다고 합니다. 어쨌거나 고맙고 소중한 밤섬입니다. 여의도를 개발하는데 도움이 돼서 고맙고, 지금은 수많은 동식물이 사는 장소가 되었으니 소중합니다. 온통 사람과 건물로 꽉 차 있는 서울에 이런 공간이 있다니 참 다행입니다.
마라톤 출발시간은 9시입니다. 여의도에 도착했는데 집합 장소가 보이지 않습니다. 지하철을 타면 마라톤에 참가하는 사람들을 지하철에서 만나게 되는데 버스를 타니 마라톤 참가자들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다행히 오늘은 휴대폰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지도를 보고 여의나루역 2번 출구를 찾아갑니다. 가다 보니 하나둘 참가들이 보입니다. 여의도 이벤트광장에 도착했습니다.
기온은 25도, 습도는 71%입니다. 잔뜩 흐린 날씨이지만 비는 오지 않으니, 달리기에 아주 좋습니다. 광장으로 내려가니 참가자들이 가득 모여 있습니다. 강아지를 데리고 온 참가자, 초등학교 학생들 그리고 유치원에 다닐만한 아이들, 나이 어린 여성들, 그리고 젊은 부부들도 적지 않습니다. 이 대회는 10Km와 5Km 외에도 3Km 참가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니 가벼운 마음으로 부담 없이 참가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3km 참가자들은 이곳에서 출발하여 여의도수난구조대 부근에서 돌아옵니다. 5km는 이곳에서 출발하여 국회의사당 뒤쪽으로 돌아 여의하류 교차로에서 돌아옵니다. 10Km 팀이 먼저 A조, B조, C조로 나누어 출발합니다. 이어서 호루라기 소리에 맞추어 5km 참가자들이 출발했습니다.
한강을 오른쪽으로 보며 서쪽으로 달립니다. 날씨가 흐리니 적당히 선선하면서 마음이 가볍습니다. 1Km 지점이라는 팻말이 보입니다. 시계를 보니 7분쯤 지났습니다. 몸을 두 발에 맡기고 속도를 내봅니다. 앞에서는 젊은 남녀가 달리고 있습니다. 남자가 여자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힘들면 걸어가자."라고 합니다. 여성은 꿋꿋이 버티며 속도를 늦추지 않습니다. 또 한참을 가다 보니 키 큰 남자와 키 작은 여자가 한 팀을 이루고 달립니다. 남자가 여자의 이름을 부르며 "잘한다. 박ㅇ희. 잘한다. 박ㅇ희." 격려를 합니다. 그런데 보폭이 큰 남자가 성큼성큼 앞서서 달리니 포폭이 작은 여자는 따라가기 바쁩니다. 세상을 살면서 내 고집대로 아내를 이끌려고 했던 나 자신이 보입니다. 조금 뒤에 물러서서 아내가 하는 일을 도왔어야 하는데 하는 생각이 듭니다. 멀리 비 구름이 몰려옵니다.
한쪽에서는 블랙핑크 노래가 들립니다. 이어서 요즘 유행하는 에스파의 곡이 흘러나옵니다. 무슨 노래인지 모르나 에스파의 곡이 맞추어 달리기에 더 좋습니다. 그렇게 들으면서 달리다 보니 어느덧 반환점입니다. 여기까지 달려오면서 한 번도 멈춰 서지 않았습니다. 이제 천천히 걸으며 시원한 물을 마시고 다시 달립니다. 날씨가 흐리니 달리기에는 최고입니다. 그런데 가끔 빗방울이 떨어집니다.
멀리 있는 스피커에서 이제는 뉴진스 노래가 들려옵니다. 마라톤 대회에 이런 음악이 있으니 참 좋습니다. 달리는데 마음이 편하고 힘이 덜 듭니다. 그런데 이어서 시위대들이 있는지 5.18의 노래 <임을 위한 행진곡>이 크게 들립니다.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행진곡 풍의 이 노래가 평소에는 듣기 좋았는데 달리면서 들으니 리듬이 영 맞지 않아서 스탭이 꼬입니다. 차라리 뽕짝 느낌이 나는 뉴진스 노래가 그래도 더 났습니다.
근육질의 40대 남자가 시야에 들어왔습니다. 배낭을 멨습니다. "그래 잘 뛴다. 좀 더 빨리!" 조금 앞에서 달리던 여자아이가 속도를 냅니다. 아빠와 딸입니다. 아이는 초등학교 5, 6학년 정도되는데 말랐습니다. 혹시 마라톤 선수로 키울 생각인지 아빠는 아이의 뒤를 따라가며 열심히 재촉을 합니다.
그 장면을 보니 군대에서 뛰던 생각이 났습니다.
"김병장! 김일병 거, 군장 네가 들어라."
대열을 이루면서 같이 뛰어가고 있는데 중대장이 외칩니다. 김병장은 이미 자기 군장을 메고 있는데 김일병 군장을 또 들어서 자기 군장 위에 올려놓고 뜁니다.
"김일병, 뒤로 나가."
김일병은 지쳐서 쓰러지기 직전입니다. 중대장의 말을 듣고 대열의 맨 뒤로 나가 뒤따라 옵니다.
"하나, 둘." "하나, 둘."
중대장의 구호에 맞춰 군장을 맨 군인들이 달리면서 복창을 합니다.
"하나, 둘." "하나, 둘."
김병장은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군장 2개를 등에 지고도 끄떡없이 뛰어 나갑니다.
중대장도 똑같이 군장을 메고, 50명 정도 되는 대열의 앞뒤를 뛰어다니며 통솔을 합니다. 앞으로 갔다가 뒤로 갔다가 지치지도 않습니다. 자기 군장 하나도 감당하기 힘든데 책임감이 그렇게 초인을 만들어내는 모양입니다. 정신의 힘이란 참 대단합니다.
이제 비가 내리기 시작합니다. 장마가 시작된다더니 그 장마가 마라톤 뛰는 이 한강에 이제 막 도착했습니다. 시원한 빗발울이 얼굴로 떨어져 내립니다. 달리기 힘드니 더 세찬 소낙비가 내려도 좋겠습니다. 조그만 빗방울이 쉴 새 없이 떨어집니다. 멀리 골인 아치가 보입니다. 출발했던 그 자리입니다. 비도 오고 날씨도 선선하니 마지막으로 힘껏 달립니다. 200미터 남짓 죽자 사자 달립니다. 골인지점으로 들어가면서 시계를 보니 32분 54초 걸렸습니다. 지난번 보다는 조금 늦었으나 그래도 좋은 기록입니다.
마지막 스파트를 너무 무리했는지 골인 지점에 주저앉고 싶었으나 이미 거기에는 먼저 도착한 완주자들이 쓰러져 있습니다. 비가 오니 다들 시원하게 힘껏 무리해서 달린 모양입니다. 주최 측에서는 결승선 입구에 드러누워서 쉬고 있는 완주자들에게 길을 비켜달라고 계속 방송을 하고 있습니다.
메달을 받고, 간식을 받았습니다. 어떤 천막 안으로 들어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니 그곳에서 안내하던 사람이 자기 의자를 내줍니다. 그렇게 의자에 앉아 쉬면서 음료수를 마시고 간식을 먹습니다. 하지만 갈수록 세차게 오는 비가 그치기를 마냥 기다릴 수 없습니다. 급히 지하철 역사로 이동하여 집으로 향합니다. 오늘은 그러고 보니 남쪽에서 올라오는 장마전선을 만나러 가는 대회였습니다. 시원한 비를 맞으며 마음껏 달려본 여름날의 마라톤.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