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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태홍 Oct 22. 2024

10번째 5km 마라톤 참가기 -올림픽공원의 가을

2024년 10월 5일, 가을날 아침이 밝았습니다. 30도를 오르내리면서 생명까지 위협하던 무더위도 10월로 들어서면서 얌전히 기가 죽었습니다. 온도를 재보니 13도. 낮에는 24도까지 올라간다니 뒤끝이 무섭습니다. 그래서 여름 복장에 반바지를 입어야 하는데 마라톤 끝나고 사람들을 만나야 할 일이 있어, 할 수없이 긴바지, 긴팔 셔츠에 가을 복장으로 집을 나섭니다. 


마라톤 대회 장소는 서울올림픽 공원 평화의 광장입니다. 지난달 시각장애인 마라톤 대회 때 모였던 그 장소. 8호선 지하철을 타고 몽촌토성역에서 내리니 마라톤 참가자들이 여기저기 많이 보입니다. 그들과 어울려서 우르르 함께 바깥으로 나가니 멀리 파란 가을 하늘아래 평화의 문이 보입니다. 8시 50분, 출발시간까지는 10분 남았습니다. 오늘은 가방도 가져왔으니 빨리 물품보관소를 찾아야겠습니다. 





평화의 문을 거쳐 광장에 들어가자마자 입구 바로 오른쪽에 물품보관소가 보입니다. 보관용 비닐을 받아 입고 온 잠바와 가방을 벗어 집어넣습니다. 나머지 옷은 그대로 입고 뛰기로 하고 짐을 맡기니 5분 남았습니다. 출발선에는 벌써 사람들이 가득 서서 대기하고 있습니다. 연단에는 사람들이 많이 올라가 무슨 행사인가를 하고 있습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TV에서 보던 정치가들이 많습니다. 국토수호라는 말이 들어간 대회라서 그런지 정치권에서 유명인사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TV에서 가끔 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들도 같이 달린다고 합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검찰정권에 쓴소리 한번 못하는 사람들. 외국과 전쟁이라도 난다면 정말 국토수호를 잘 할수 있을까요? 




하프팀이 출발하고 10km 팀이 조별로 나누어 출발하고 있습니다. 전체 숫자는 5,000명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정치가들도 챙기고 일반 마라토너들도 챙기느라 사회자가 바쁩니다. 10km 팀이 모두 출발하고 이제 5.4km 달리는 사람들이 출발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사회자가 달릴 준비를 하고 있는 어떤 정치인을 보고 이렇게 묻습니다.

"아니 건강하신 분이 왜 5km 뛰십니까?"

웃자고 하는 농담이겠지만, '그럼 팔다리 멀쩡하면서 5km 뛰는 사람들은 뭐가됩니까?'라고 한마디 해 주고 싶은데 거리가 너무 멉니다. 말을 바꿔 생각해 보면 10km 달리기가 그렇게 쉽다는 이야기 같습니다. 이제 곧 5km를 졸업하고 상급반인 10km로 올라가야 하는 저에게는 그래도 조금 위안이 되는 말입니다. 앞으로 10km 달릴 걸 생각하면 마라톤 처음 뛸 때처럼 긴장이 됩니다. 이제 5km는 많이 익숙해져서 두려운 마음이 전혀 없는데, 10km는 괜히 두렵습니다. 그때는 그때고 오늘은 5.4km를 달리니 이것도 저에게는 처음입니다. 400미터를 더 달리게 되면 더 힘들까? 


9시 37분. 땅. 출발 신호가 터졌습니다. 일제히 출발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너무 많아 달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천천히 빈틈을 봐가면서 앞으로 앞으로 나갑니다. 오늘도 쉬지 않고 달리는 것이 목표입니다. 온도를 재보니 17도까지 올라갔습니다. 하지만 20도에 못 미치니 안심입니다. 공원 안에는 녹지가 많으니 실지로 체감온도는 더 낮겠지요.


광장에서 벗어나 공원 안쪽으로 뛰어 들어갑니다. 공기는 더욱 상쾌해졌습니다. 시원한 가을 공기가 울창한 숲 속에서 흘러나옵니다. 지난번 9월에 왔을 때 봤던 고양이인가? 숲 속 한쪽 구석에서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조용히 앉아 있습니다. 숲은 토성을 따라 길게 이어져 있습니다. 토성 위쪽에 파란 가을 하늘이 넓게 펼쳐져 있고 구름이 몇 조각 솜사탕같이 펼쳐져 있습니다. 멈춰 서서 사진을 한 장 찍고 싶으나 꾹 참고 달립니다.


지난번 여기에서 달릴 때는 흙으로 쌓아 올린 토성의 존재를 별로 의식하지 못했습니다. 잔디가 덮인 조그만 동산이구나 생각했는데 오늘은 토성의 모습이 분명히 보입니다. 이곳은 몽촌토성이 있는 곳입니다. 백제초기 수도가 서울에 있었을 때라고 하니 지금으로부터 2000년이나 이전에 쌓았던 토성입니다. 그 아래를 달리고 있으니 기분이 오묘합니다. 토성 언덕은 높이가 3미터에서 5미터는 되는 것 같습니다. 파란 잔디가 덮인 토성 위로 높고 푸른 하늘이 한없이 펼쳐져 있습니다.  


코스는 몇 차례인가 오른쪽으로, 오른쪽으로 그리고 왼쪽으로 돌더니 이제는 위로 위로 올라갑니다. 이곳은 아마도 토성의 윗길인 것 같습니다. 옆으로 개천이 흐릅니다. 높은 곳에서 죽 뻗은 코스를 일직선으로 달립니다. 멀리 아파트 촌이며 건물들이 아래로 내려다 보입니다. 얼마나 달렸는지 반환점이 나올 때가 되었는데도 반환하여 돌아오는 사람이 없습니다. 계속 달리다 보니 갑자기 물을 주는 급수대가 나옵니다. 물을 천천히 마시고 다시 달리기 시작했는데 하나둘 되돌아오는 사람들이 보입니다. 그런데 5.4km 달리는 사람들이 아니라 10km 달리는 사람들입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코스는 조그만 무지개다리를 건너 180도 회전하여 오던 방향으로 다시 되돌아갑니다. 그러고 보니 이번에 5.4km는 반환점이 없습니다. 개천을 따라 계속 달려왔다가 다시 그 개천을 건너 돌아가는 것입니다. 달리기 전에 안내 팸플릿을 잘 봤어야 하는데. 코스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잘 모르니 괜히 반환점이 나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덕분에 신경이 쓰여 많이 지쳤습니다.


한 여성이 앞서 달리는데 뒤에서 친구인듯한 여성 마라토너가 다가가면서 말을 건넵니다.

"아, 여기서 달리고 계시네요."

"예. 이제 오시는 거예요? 저는 어디 갔나 했어요. 하하.'

"그냥 같이 걸을까요?"

"아니 저는 이 속도로 조금 더 달리려고요. 이렇게 좀 달리다가 힘들면 자연스럽게 걸어가죠. 뭐."

"그래요? 그러면 저는 먼저 갈게요. 이따가 봬요."

늦게 따라붙은 여성은 이제 발동이 걸린 모양입니다. 빠른 속도로 사람들을 추월하여 달려 나갑니다. 

  

조금 더 달리다 보니 남녀 두 사람이 앞에서 달리고 있습니다.

속도가 너무 느려서 추월하려는데 남자가 여자에게 말합니다.

"내가 왜 여기 있는지 모르겠다."

그 말을 들은 여자는 아무 말없이 그냥 달립니다.

멀리 보이는 가을 하늘이 유독 파랗습니다. 시원한 바람이 볼을 스치고 지나갑니다.


그러고 보니 옛날 생각이 납니다.

"내가 여기 계속 있어야 돼?"

백화점 의류 코너에서 열심히 옷을 고르고 있던 아내에게 물었습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요."

아내는 저에게 혼자서 먼저 가라는 소리는 안 합니다.

짜증 나는 것을 참고 의류 코너를 나가 화장실도 다녀오고 다른 코너도 구경하고 하다가 아내에게 갑니다.

"여보 이제 가자."

아내는 제 눈치를 보고 고르던 옷을 내려놓고 밖으로 나옵니다.


그때가 참으로 행복한 순간이었는데 몰랐습니다. 아내가 떠나고 난 지금 많이 후회합니다. '그때 아내 사진이라도 많이 찍어줄걸....'하고 아쉬워합니다. 자기 옷은 자기가 돈을 벌어서 샀던 아내였습니다. 저는 아주 드물게 아내 옷을 사주었습니다. 그때는 온갖 생색을 다 냈지요. 백화점에서 옷을 고르는 아내를 기다리면서 아내가 무슨 옷을 좋아하는지, 무슨 색깔을 좋아하는지, 돈을 충분히 가지고 있는지...... 관심이 없었습니다. 행복한 순간은 그렇게 왔다가 그렇게 가버렸습니다. 


상상 속에서나마 아내에게 카드를 건넵니다. "더 좋은 옷으로, 맘에 드는 옷으로 사요." 아내는 환하게 웃습니다. 웃지 않아도 이쁜 얼굴이지만 웃으면 더욱 매력이 넘치는 아내. 지금은 꿈에서만 볼 수 있는 그 얼굴입니다. 


언덕 위에서 달렸으니 이제는 내려가야 합니다. 비스듬한 내리막길이 계속 이어집니다. 그런데 몸이 이상합니다. 엉덩이 오른 쪽이 많이 불편합니다. 고관절이라고 부른 곳입니다. 그러고 보니 휴대폰을 오른쪽 뒷 주머니에 넣고 뛰는데 그쪽 고관절이 삐그덕 거립니다. 달릴 때 휴대폰은 참 불편합니다. 그렇다고 물품보관소에 맡길 수도 없고. 어떤 남자는 팔뚝에 휴대폰을 찼습니다. 또 어떤 여성은 허리 뒤에 휴대폰 주머니를 두르고 거기에 넣고 달립니다. 손에 꽉 쥐고 뛰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제 종착지에 다가왔습니다. 마지막으로 힘을 다 해서 뛰어보자. 그렇게 각오하고 뛰려고 하는데 왼쪽 무릎이 살살 아픕니다. 아. 무리하지 말자. 그러면서도 멀리 서 있는 골인 아치를 보니 마음이 급해집니다. 힘껏 내달아 뛰어갑니다. 옆에 어린 학생이 뛰고 있습니다.


"어린 학생 파이팅! 열심히 뛰고 있습니다." 

마이크를 들고 있던 사회자가 갑자기 중계를 합니다.

"어린 학생. 아! 할아버님과 경쟁하면서 들어옵니다. 이겨라, 이겨라. 학생 파이팅!"


어린 학생을 따돌리고 먼저 앞으로 나갈려다 사회자의 말을 듣고 김이 샜습니다. 할아버지가 어린 학생과 이렇게 공개적으로 경쟁하기가 민망합니다. 그래서 천천히 뛰어서 골인선으로 들어갑니다. 36분 걸렸습니다. 안내 데스크로 가서 간식과 메달을 받았습니다. 메달은 육각형으로 모양이 특이합니다. 간식 봉지 안에는 빵과 아몬드 2봉지, 그리고 음료수가 2병 들어 있습니다. 물품보관소에 가서 맡긴 짐을 찾아들고 광장 한쪽에 주저앉아 빵과 간식을 먹습니다. 힘들고 피곤하지만 즐거운 마라톤이었습니다. 햇살이 따뜻한 오전 한때, 가을 하늘이 너무도 아름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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