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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태홍 Dec 21. 2024

5km 마라톤 12번째, 이제 졸업합니다.

마라톤 이야기

2024년 11월 30일 토요일. 오늘은 뚝섬 한강공원에서 마라톤이 있습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시계를 보니 6시 15분, 바깥 온도는 -2도, 걱정했던 것보다는 따뜻합니다. 간단히 아침을 먹고 모자에 장갑, 그리고 두꺼운 셔츠에 따뜻한 조끼까지 껴입고 그 위에 코트를 뒤집어쓰고 집을 나섭니다. 아주 추운 날씨는 아닌데, 구름이 잔뜩 끼어 있어 우중충합니다. 골목을 빠져나와 큰길로 나오니 음산한 분위기가 전형적인 겨울날씨입니다.  


전철을 타고 7호선 자양역에 내리니 시계는 8시 20분을 가리킵니다. 9시에 마라톤을 시작하니 40분 남았습니다. 바깥이 추우니 참가자들이 밖으로 나가지 않고 역 안에서 주섬주섬 옷을 갈아입거나 번호표를 달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 배낭을 메고 왔으니 빨리 물품보관소로 가야겠습니다.  


역 바깥으로 나가 계단을 내려가니 멀리 화장실이 보입니다. 그 앞에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저도 화장실로 가야겠습니다. 작년 겨울에도 이곳에서 마라톤을 했는데, 출발 직전에 소변 때문에 화장실까지 뛰어온 적이 있습니다. 출발 지점에서 이곳까지는 200미터 이상되는 먼 거리이기 때문에 준비를 해야겠습니다. 겨울에는 땀 배출이 많지 않아 달리다가 오줌이 마려우면 곤혹스럽습니다.  



화장실을 뒤로하고 수변광장으로 향했습니다. 멀리 롯데타워가 보이고 그 옆에 밝은 해가 떠 있습니다. 여기저기 비닐 우의를 뒤집어쓴 사람들이 보입니다. 햇빛이 보이니 춥지는 않으나 하늘이 뿌옇고 음산합니다. 작년 겨울 마라톤 대회 때는 바람이 심하게 불고 몹시 추웠는데, 오늘은 그때 보다 날씨가 좋습니다. 어찌 보면 이렇게 적당히 추운 날씨가 오히려 달리기에 좋습니다. 마스크를 벗고 심호흡을 해봅니다. 차가운 공기지만 견딜만하니, 마스크를 주머니 안에 넣습니다. 물품보관소를 찾아보니 수변광장 오른쪽 귀퉁이에 있습니다. 거기에서 비닐봉지를 받아 탈의실로 가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바깥으로 나왔습니다. 

작년에 처음 이곳에서 마라톤을 시작할 때는 이것저것 호기심이 많았습니다. 몇 명이나 왔을까? 외국인들도 많이 보이는데 어떤 사람들일까? 나이 든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이렇게 마라톤을 뛰는 사람들은 혹시 운동선수들일까? 등등. 궁금한 것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금년 한 해 10번 이상 이런 마라톤 대회를 쫓아다니다 보니 이제 그런 호기심이 다 사라졌습니다. 마라톤 대회는 많으면 1만 명이 넘고 보통은 4, 5천 명 정도이고 작은 규모는 1, 2천 명 정도입니다. 마라톤 대회에 외국인들이 참가하지 않은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서양인들이나 흑인들은 눈에 잘 띄는데 보통 10명 이상은 보입니다. 그런데 눈에 잘 띄지 않은 동양인이나 기타 다른 인종의 참가자들도 꽤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나라에 사는 외국인들이 요즘 많아지다 보니 그들도 마라톤행사에 자주 참석을 합니다.  


또 마라톤 참가자들은 20, 30대가 많지만 60대 이상의 참가자들도 꽤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처음에는 어떤 사람들이 마라톤에 참가할까 궁금했는데, 알고 보니 그냥 보통 사람들입니다. 길거리에서 흔히 만나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간혹 마라톤 동호회 사람들, 혹은 학교나 지역에서 운동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이 단체로 참가하는 경우도 있으나 보통은 취미로 참가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저도 그들과 함께 달리다 이제는 마라톤 애호가가 되었습니다. 오늘은 5km 코스를 마지막으로 뜁니다. 다음부터는 10km에 도전합니다.

출발선 부근으로 갔습니다. 작년에는 바람이 너무 불어 천막도 없고, 무대도 없었는데 오늘은 싸늘하지만 바람 한점 없어 날씨가 아주 좋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햇빛을 받아 찬공기도 많이 데워졌습니다. 무대에서는 신나는 노래가 흘러나옵니다. 노래를 들으면서 움츠러든 몸을 펴고 체조도 하고 스트레칭도 합니다. 


"고락에 겨운 내 입술로 

모든 얘기 할 수도 있지만

나는 세상모르고 살았노라

나는 세상모르고 살았노라."


어렸을 때 듣던 송골매의 노래입니다. 이 노래를 마라톤 출발선에서 몸을 풀면서 들으니 흥겹기도 하고 힘이 솟습니다. 들리는 가사는 좀 생뚱맞기도 하고 슬프기도 한데 아침 햇살을 받으며 몸풀기에 딱 좋습니다. 


하프팀이 출발하고 이어서 10km 달리는 사람들이 출발신호와 함께 뛰어나갑니다. 출발선 옆 강변의 공기는 더 따뜻합니다. 5km 출발 준비를 하고 있는데, 사회자가 격려의 인사말을 합니다. 5km 마라톤은 입문 코스이기도 하지만, '마라톤의 꽃'이라고 합니다. 그렇지요. 화려하다는 점에서 마라톤의 꽃은 맞습니다. 아이들도 많고 여성들도 많고 가족끼리 달리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무엇보다도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제일입니다. 그러나 마라톤의 꽃이라면 역시 42.195㎞를 달리는 마라톤 풀코스겠지요. 어쨌거나 저는 이 5km를 매달 한 번씩 1년을 달렸으니 오늘로 작별인사를 해야겠습니다.


출발선으로 더 가까이 다가가 준비를 합니다. 준비 시작, 탕! 사람들이 일제히 달려 나갑니다. 비교적 앞줄에 있다 달려 나갔지만 사람들이 워낙 많으니 한참을 사람들 사이에 섞여서 달렸습니다. 겨우 사람들 무리를 벗어나니 멀리 코스를 따라 뻗어있는 작은 도로가 보입니다. 저 멀리 두 사람이 달리고 있습니다. 한 사람은 키가 크고 다른 한 사람은 키가 작은데 꾸준히 잘 달립니다.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기록 욕심이 났습니다. 저 두 사람 뒤를 따라가면서 추월해야겠습니다.

 

작년 겨울에 이곳에서 달릴 때는 몰랐는데 오늘은 길가에 이것저것이 보입니다. 카누도 보입니다.(나중에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카약이라고 합니다.) 여러 개를 진열해 놓은 것을 보면 대여점인 모양입니다. 강가에는 정박해 둔 요트도 많습니다. 수변광장이라더니 이곳은 수상 놀이를 하는 곳인 것 같습니다. 조금 더 가니 언덕길이 나타났습니다. 이곳 마라톤 코스는 언덕이 많습니다.


언덕길은 경사가 심하지 않습니다. 높지도 않아 가뿐하게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내려오니 조금 있다 언덕길이 또 나타납니다. 벌써 지쳤는지 걷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도 작년에는 여기에서 걸었지만 이번에는 오르면서도 내려가면서도 걷지 않습니다. 오늘은 5km를 쉬지 않고, 걷지 않고 달려봐야겠습니다. 반환점에서도 뛰어야겠습니다. 다음부터 10km를 뛰려면 5km 정도는 쉬지 않고 달려야 합니다.


언덕길이 또 나타났습니다. 정상으로 올라갔더니 거기에서 길은 또다시 위로 올라갑니다. 언덕 위에 또 언덕입니다. 이 이상한 구조는 이 코스의 특징입니다. 기껏 언덕을 힘들게 올라왔는데 또 언덕이 있으니 많은 사람들이 힘들어 걷기 시작합니다. 지금까지는 하천 바로 옆을 따라 달렸는데 이제는 하천부지를 벗어나 넓은 도로 위로 올라왔습니다. 차들이 달리는 이곳은, 잠실대교 부근입니다. 이제부터는 차량들과 함께 달립니다. 뚝섬 마라톤 코스 중 가장 나쁜 구간입니다. 승용차, 버스, 트럭까지 지나가는 길을 따라 한참을 달리니 다시 하천부지로 내려가는 도로가 나옵니다. 자동차에서 나오는 매연을 피하기 위해서 속도를 더 빨리해서 내려갑니다. 

 

맞은편 도로에서는 반환점을 돌아오는 사람들이 보입니다. 아마도 10km 달리는 사람들인 것 같습니다. 1등은 자전거 호위를 받고 있습니다. 바로 뒤를 이어서 2등이 달려오고 또 3등이 달려옵니다. 3등은 서양인입니다. 그러고 보니 어떤 흑인 여성이 앞에서 뛰고 있습니다. 추위에 겁을 먹었는지 옷을 너무 두껍게 입었습니다. 뒤뚱거리며 달립니다. 저 멀리 반환점이 보입니다.


반환점 가기 전에 식수대가 나타났습니다. 이번에는 물을 마실 때도 쉬지 말고 뛰어야겠습니다. 멀리서부터 물컵 하나를 주시하고 뛰다가 낚아채면서 달립니다. 앞사람과 부딧칠뻔했습니다. 뒤에 따라오는 사람 하고도 부딪칠뻔했습니다. 물을 조금 마시고 컵을 한쪽으로 던지면서 계속 뛰어갑니다. 반환점을 돌았습니다. 이제는 오던 길을 되돌아갑니다.   

 

길은 다시 다리 위를 향해서 올라갑니다. 또 차도와 만났습니다. 트럭 한 대가 흙먼지를 날리면서 달려옵니다. 다리에 힘을 주고 힘껏 내달립니다. 빨리 차도에서 벗어나야겠습니다. 다시 내리막길이 나타났습니다. 이때 문득 잊고 있던 두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키 큰 사람과 키 작은 두 사람. 여전히 날렵하게 달리고 있습니다. 이번 내리막길에서는 그들을 추월해야겠습니다. 두 사람을 목표 삼아 힘껏 달려 내려갑니다. 겨우 추월했다고 생각했는데 길이 평지로 바뀌자 곧바로 그들에게 추월당했습니다. 


그래도 그들 뒤를 쫓아 열심히 달립니다. 2km 정도 남았습니다. 갑자기 초등학생 둘이 뒤에서 튀어나왔습니다. 앞을 가로막고 뜁니다. 애들을 추월해야겠습니다. 그런데 아이들 속도도 만만치 않습니다. 한 아이가 갑자기 멈춰 섭니다. 부딧칠뻔했습니다. 한쪽으로 빠져나와 달리는데 멈춰 섰던 그 아이가 잠시 쉬었다가 다시 빠르게 뛰어나와 앞을 가로막고 달립니다. 아이들과 함께 뛰면 속도조절이 안됩니다. '다음 내리막길에서는 꼭 추월해 버려야지.'  


"좋은 방법이 없을까?"

앞서 달리는 두 남녀가 사이좋게 뭔가를 상의하고 있습니다.

집안일일까? 아니면 직장 일일까? 

아뭇튼 "마라톤을 힘 안 들이고 뛰는 좋은 방법이 없을까?"하고 제 자신에게 물어봅니다. 

"그럼 힘 안 들게 뛰면 그게 마라톤인가? 힘드니까 운동이지."  

"그래도 힘이 좀 덜 들게 뛰는 방법은 없을까?" 

5km 마라톤을 처음 뛸 때는 이런 궁리도 많이 해봤습니다. 이제는 그냥 달립니다. "몸이 알아서 하겠지." 대신 평소에 걷기, 달리기, 근육운동을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온몸의 근육이 잘 작동하면 힘이 덜 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1년간의 수확입니다. 기초체력이 중요합니다. 모든 일이 그렇습니다.


내리막길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올라올 때는 몰랐는데 경사가 너무 완만합니다. 거의 평지와 같습니다. 아이들을 따라잡으려고 속도를 내도 효과가 없습니다. 아이들도 여전히 빠르게 달립니다. 또 비탈이 나왔습니다. 이제는 승부를 걸어야지. 더 빠르게 속도를 내서 내려갑니다. 그런데 애들은 더 빠릅니다. 짧은 두 발이 마치 자전거 바퀴 같습니다. 빠르게 빠르게 굴러갑니다. 보통 애들이 아닙니다.


멀리 골인 지점이 보입니다. 500미터쯤 남았습니다. 이제 마지막 스퍼트다. 아이들도 추월할 겸, 마지막 힘을 다해 달립니다. 그런데 아이들도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는지 속도를 더 내기 시작합니다. 더욱 힘내서 따라가 보지만, 갑자가 머리가 멍해지고 하늘이 노랗게 보입니다. 안 되겠습니다. 속도를 줄입니다. 아이들은 이미 골인했습니다. 아휴... 지독한 꼬맹이들입니다. 저도 겨우 골인했습니다. 33분입니다. 아마 이것이 저의 최고 기록입니다. 아이들 덕분에 잘 뛰었습니다.


간식 코너에 다가가 물을 받고 간식 꾸러미도 받았습니다. 그런데 10km 간식 배부처를 지나면서 눈에 띄는 것이 있었습니다. 바나나입니다. "엥? 10km 뛰는 사람들은 바나나도 주는가 보네? 하기사 10Km 참가비는 더 비싸니까." 하고 가까이 다가가 유심히 보려고 하는데, 자원봉사하는 어떤 아주머니가 큰 소리로 외칩니다. "다 똑같아요!" '아니, 그럼 내 꾸러미 안에도 바나나가 들어있나?' 확인해 보니 제가 받은 간식 꾸러미 안에도 노란 바나나가 들어있습니다. 빵도 하나 있고, 캔 음료수, 메달도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저 아주머니는 내 마음을 어떻게 정확히 꿰뚫어봤을까? 대단한 베테랑 아주머니입니다. 


메달을 보니, "5km 완주를 축하합니다. 서울 뚝섬 한강공원 수변광장, 2024.11.30. 국민체육진흥협회 시즌오프 레이스"라고 쓰여있습니다. 시즌 오프라면 금년도 마라톤 행사는 끝났다는 것입니다. 벌써 12월, 이제 한겨울입니다. 아, 그런데 아까 키 큰 사람과 키 작은 콤비 두 사람은 어떻게 됐지? 아이들과 경주를 하는 바람에 깜빡했습니다. 내가 이겼을까? 아니면 그들이 계속 그렇게 잘 달렸을까?


문득 출발준비하면서 들었던 노래가 생각나서 휴대폰으로 잠깐 검색해 봅니다. 송골매의 <세상모르고 살았노라>입니다.


가고 오지 못한다는 말을
철없던 시절에 들었노라

만수산을 떠나간 그 내 님을
오늘 날 만날 수 있다면

.....................

돌아 서면 무심 타는 말이
그 무슨 뜻인 줄 알았으랴

제석산 붙는 불이 그 내 님의
무덤의 풀이라도 태웠으면


고락에 겨운 내 입술로
모든 얘기 할 수도 있지만
나는 세상모르고 살았노라
나는 세상모르고 살았노라


흥겹게 들으면서 체조를 했지만, 참으로 슬픈 가사입니다. 그런데 이 가사는 놀랍게도 김소월의 시라고 합니다. 조금 각색한 것이지만 말투가 옛스러운 것이 범상치 않습니다. 떠나간 연인이 보고 싶지만 그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닙니다. 지난 일을 후회해도 소용없습니다. 참으로 바보같이 살았습니다. 지금까지 송골매의 이 노래를 수백 번이나 들었지만 그 뜻을 헤아려보지 못했습니다. 저야말로 세상모르고 살았습니다. 


물품보관소로 다시 가서 옷과 가방을 찾았습니다. 옷을 갈아입고 다른 참가자들처럼 광장 한쪽에 주저앉아 빵을 먹고, 바나나를 먹습니다. 그리고 물을 마시려고 하니 물이 너무 찹니다. 작년에는 물이 차가운지도 모르고 벌컥벌컥 마셨는데 올해는 차게 느껴집니다.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여유가 생겼습니다. 오늘은 5km 마라톤 졸업 기념으로 따뜻한 커피라도 한 잔 마셔야겠습니다. 


주섬주섬 짐을 챙겨서 일어나면서 앞을 보니 아까 앞서 달리고 있던 두 사람, 키 큰 사람과 키 작은 사람이 보입니다. 친구들과 함께 웃으면서 간식을 먹고 있습니다. 일행이 모두 운동선수들 같습니다. 어쩐지 잘 달렸습니다. 한겨울 오전 한때 힘들게 뛰고 돌아온 사람들이 바나나를 먹고 빵을 먹고 물을 마시며 함께 웃는 것이 유쾌합니다. 태양은 더 높이 떠올라 사람들이 뿜어내는 열기와 함께 수변광장을 더욱 따뜻하게 달궈놨습니다. 못내 아쉬움을 뒤로하고 으스스하게 추운 겨울의 도시로 다시 돌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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