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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유 Mar 31. 2024

정상을 올라야 볼 수 있다

형제의 주말 동네산행

성향이 다른 두 아들이 있다. 첫째는 밖을 나가야 직성이 풀리는 아이고, 둘째는 남다른 에너지를 갖고 있지만 모든 걸 집에서 다 해결하는 아이다. 남편의 주말 근무로 토요일 독박육아가 시작됐다. 선천적으로 기력이 별로 없는 엄마는 아침부터 오늘 어디 갈까 묻는 첫째가 벌써부터 두렵다. 아침을 준비하면서 머릿속은 복잡하다. 무조건 "난 안가."라고 말하는 둘째의 입에서 나가겠다는 대답이 나와야 형제애가 유지될 수 있기 때문에 두 아이의 기호를 맞출 수 있는 최적의 장소를 찾아내야 한다. 식탁엔 밥과 국, 반찬으로 차려진 첫째의 아침과 식빵에 딸기잼이 발라진 둘째의 아침을 차례대로 세팅해 놓는다.


나 : "우리 오늘 날씨가 좋은데 산에 가볼까?"

첫째 : "완전 좋지!"

둘째 : "난 안가."

.............................

첫째 : " 은우야, 가자~ 형이 재밌게 놀아줄게."

둘째 : "싫어 안가. 나 집에서 놀 거야."

첫째 : "너 가면 내가 포켓몬카드 반짝이 한 장 줄게. 응? 응? 가자~"

둘째 : "싫은데."


어디라도 가고 싶은 첫째가 울상이다. 아이는 애처로운 눈빛으로 나에게 도움의 신호를 보낸다.


나 : "은우야, 청설모 본 적 있어? 산에 올라가면 청설모 먹이 줄 수 있는데.. 우리 청설모 먹이 챙겨서 가볼까?

       어때?"

둘째 : "청설모? 먹이를 줄 수 있다고? (흠.......)

         "그래, 좋아! 나 청설모한테 먹이 많이 많이 줄 거야."


(휴...... 나이스!)


아이들이 아침 먹을 동안 산에서 먹을 간식으로 과일을 준비한다. 마음이 바쁜 둘째 은우는 청설모 먹이를 얼른 챙기라고 나를 재촉한다. 아이가 먹던 빈 물약병에 땅콩을 담아 가방에 넣는다. 마실 물과 중간에 가다가 못 가겠다고 퍼질 둘째를 유인할 달달한 간식까지 완벽하게 챙긴다. 언제 어디로 튈지 모르는 아들들을 붙잡기 위해 자유로운 두 손을 유지하고자 백팩을 매고 집을 나선다.

나오자마자 애들은 세상을 처음 접하는 망아지처럼 이리저리 뛰놀다가도 발길질과 주먹질로 투닥투닥하며 길을 걷는다. 차에 부딪칠까 오토바이에 치일까 엄마 마음만 무거운 물건을 올려놓은 저울의 추처럼 이리저리 위태롭게 불안하다. 나온 지 5분은 지났을까 좋게 타일러도 도무지 듣지도 않는 아이들을 보니 가슴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시작한다. 미간에 힘이 빡 들어가고 내 천(川) 자의 주름이 퐉 만들어지는 나를 본 첫째가 그나마 나랑 몇 년 더 살았다고 센스 있게 눈치를 살펴 보통 사람들처럼 걷는다.

아빠가 있었으면 편하게 차 타고 돌아다녔을 녀석들인데, 면허조차 없는 애미 따라 걷느라 조금 미안함이 든다. 이왕 좋은 마음으로 데리고 나온 거 스트레스 풀고자 카페인의 도움을 청해 본다. 주로 아아를 마시지만 당 충전을 위해 아이스 카페모카를 특별히 주문한다. 아이들을 위해 커피 위에 듬뿍 올라간 달달한 휘핑크림도 '많이'라는 옵션에 체크를 해본다. 두 아이들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노란 빨대를 하나씩 들고 나에게 달려든다.


"자, 커피 안 묻게 위에만 살짝 찍어먹는 거야~"

첫째가 초코가루가 뿌려진 하얀 크림에 빨대를 콕 찍어 혀에 대고 맛을 음미한다.

"음~~ 달콤해."


첫째의 말에 둘째도 흥분하며 자기도 먹어보겠다고 빨대를 비스듬히 세워 형보다 많이 크림을 뜨고자 집중하는 모습이 마냥 귀엽다. 한 번씩 차례대로 번갈아 빨대를 들고 휘핑을 거침없이 푹푹 찍어 달콤한 재미를 맛본다. 소소한 것에도 재미를 찾고 행복하는 아이들의 표정을 보니 화난 마음이 수그러든다. 카페인의 힘은 참으로 위대하다. 나에겐 끊을 수 없는 도파민 영양제라고나 할까.

산 입구에 다다르자 노오란 개나리 꽃이 존재감을 드러낸다. 평상시 길에서는 잘 볼 수 없는 개나리가 산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니 봄의 기운이 반갑다. 나무 밑동에 잔뜩 낀 초록 이끼도 아이들 눈에는 신기한지 바닥에 떨어진 가는 나뭇가지를 주워 연신 찔러본다. 흙을 덮고 있는 낙엽을 하나 골라 구멍을 뚫고 얼굴에 대며 마스크를 만들어 서로 마주 보고 웃는 모습이 천진난만하다.

슬슬 둘째가 발동이 걸리는 듯하다. "엄마, 얼마나 더 가야 해?" 지금 이 순간을 위해 미리 준비한 과자를 꺼내 입 속에 넣어준다. 잠깐 앉아 숨을 고르기로 하고 벤치에 엉덩이를 맡긴다. 아이들은 앉기는커녕 또 다른 자연물을 찾아 놀잇감을 만들어 낸다. 마른 솔잎가지들을 골라 서로 교차시켜 끊어지는 솔잎을 갖고 온 사람이 지는 게임이다. 계속 지는 둘째의 땡깡이 시작되자 첫째가 일부러 져준다. 평화롭게 게임은 마무리가 되고 청설모를 보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한다. 아빠 없을 때 큰 힘이 되어주는 첫째가 듬직하고 고맙다.

산을 오르다보면 분홍빛을 발하는 진달래가 한켠에 피어 산에 대한 지루함을 이겨내 준다. 초록이 천지인 곳에서 드물게 보이는 분홍꽃은 소녀 같은 감성을 깨워주듯 미소 짓게 만든다. 그때, 거무스름한 물체가 나무와 나무 사이로 펄쩍 뛰면서 나뭇가지를 뒤흔든다. 둘째가 소리 지른다. "청설모다!" 청설모 두 마리가 서로 나무와 나무 사이로 옮겨 다니며 뛰논다. 청설모가 보인다는 건 곧 정상에 도달한다는 뜻이다.


우리 동네 봉화산에는 청설모를 쉽게 볼 수 있는 핫플레이스가 있다. 바로 산 정상 매점 앞 테이블이다. 매점 사장님 부부가 겨우내 배고플 청설모를 위해 테이블 근처 울타리에 항상 물과 음식을 올려놓는다. 그 덕분에 청설모를 눈앞에서 마주할 수 있다.


아이들은 챙겨 온 땅콩을 손에 쥐고 매점 앞 테이블로 뛰어간다. 울타리 위에 땅콩 한알 씩 나란히 올려놓고 청설모가 오기를 기다린다. 봄이 돼서 먹을 것이 많아졌는지 겨울처럼 청설모가 쉽사리 찾아오진 않았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산 정상 벤치에 앉아 싸 온 귤과 딸기를 주섬주섬 꺼냈다. 과일을 좋아하는 녀석들이라 호들갑을 떨며 신나게 집어먹는다. 따뜻한 햇볕에 개나리를 등지고 앉아 동네 경치를 바라보니 상쾌한 기운마저 감돈다. 아이들도 신났고 청설모들도 나무 위에서 이리저리 신나게 뛰어다닌다. 봄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동물까지도 들뜨게 하는 재주가 있나 보다. 봄이 왔다. 청설모를 보기 위해 열심히 정상까지 올라온 아이들이 봄처럼 화사하고 햇살처럼 따듯한 마음으로 무럭무럭 커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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