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그리고 저녁 - 욘 포세
이제 아이는 추운 세상으로 나와야 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는 혼자가 된다, 마르타와 분리되어, 다른 모든 사람과 분리되어 혼자가 될 것이며, 언제나 혼자일 것이다, 그러고 나서, 모든 것이 지나가, 그의 때가 되면, 스러져 다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왔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다, 무에서 무로, 그것이 살아가는 과정이다.
태어남은 고독을 선물 받는 것과 같다. 올라이의 말대로 우리는 태어남으로써 '다른 사람과 분리되어 혼자가 될 것이며, 언제나 혼자일 것이다.'. 우리는 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보다 먼저 혹은 사랑하는 사람이 나보다 먼저 죽음을 맞이할 것이란 걸. 살아가고 있는 지금, 심지어 죽는 순간까지도 우리는 고독하다. 고독은 우리에게 영원히 해결할 수 없는 난제다. 순간의 쾌락도, 집단과 함께한다는 소속감도 그저 잠깐 고독하다는 사실을 잊게 할 뿐, 그 찰나가 지나면 우리는 다시 고독과 손잡는다. 이 동행은 죽음에 도달할 때까지 이어진다. 죽음으로 우리는 고독과 이별한다. 그렇다면 죽음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나쁘거나 두려운 일이 아니다. 무에서 온 우리가 다시 무로 돌아가는 것일 뿐. 무로 돌아가며 고독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일일 뿐. '여느 때와 다름없는', '언젠가는 우리 모두의 차례가 오는 것'일뿐 특별하거나 대단한 고난이 아닌 것이다. 원래 우리의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 죽음이다.
인간이 무에서 무 같은, 그런 것을 생각할 수는 있다 해도, 그것만은 아닌 것이, 그 이상의 많은 것이 있다, 그 다른 것이란 무엇인가? 아마도 그건 신의 영혼이 아니겠는가, 모든 것에 내재해 무 이상의 것을 만들어내고, 의미와 색을 부여하는,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 무언가가 되어 다시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 삶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이란 무에서 무로 끝나는, 그저 아무것도 아닌 것인가. 그것은 아니다. 비록 무에서 무로 끝나는 허무한 삶일지라도 무와 무 그 찰나의 사이에는 무 이상의 많은 것이 있다. 아무것도 아닌 것, 그 자체만으로 아무 의도도 의미도 갖지 않는 사물에 의미를 붙이는, 무채색의 스케치에 저마다의 색을 입히는 우리의 노력들이 있다. 그러니 무에서 무로 끝나는 삶일지라도 아무것도 아닌 삶은 아닌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을 특별한 무언가로 바라보고 추구하는 신의 영혼이 우리 모두에게 있다.
아침 일찍부터 저녁까지 고되게 일해도 그가 집으로 가져올 수 있는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런 때는 허리띠를 졸라매야 했다, 그리고 상인 스테이네가 인심 좋게 에르나에게 외상을 주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집에 있는 생선으로 끼니를 때울 수 없었더라면, 그는 난감했을 것이다, 하지만 생선은 늘 넉넉해서 배를 곯을 일은 없었고, 목이 마를 일도 없었다,
책에는 아침과 저녁만이 묘사된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 삶 전체를 놓고 보았을 때 특별한 일은 생과 사 뿐이기 때문이다. 생과 사 사이의 삶은 생명을 이어가기 위한 투쟁에 불과하다. 살아가는 중에는 이 투쟁이 크게 무겁게 느껴진다. 하지만 죽음이 곁에 있음을 느끼는 시점에서 나의 투쟁을 돌아보면 '고되었지만 생선은 늘 넉넉했고, 목이 마를 일도 없었던' 나날들일 것이다.
창고에 있는 물건은 요한네스가 삶을 이어나가기 위해, 살기 위해, 생계를 위해 사용하던 물건들이다. 생계는 살아있을 때 무엇보다 무거운 일이다. 하지만 죽음 이후에 생계의 문제는 전혀 무겁지 않다. 살기 위한 우리의 노력은 죽음 앞에서 모두 가벼운 일들이 된다. 우리는 모두 죽음이 예정된 존재들이다. 우리가 무겁게 느끼고 있는 생계의 고민이 사실 그다지 무겁지 않은 것임을 이해한다면, 조금 숨통이 트이지 않을까.
그래 자넨 항상 나한테 특별한 사람이었지 요한네스,
요한네스가 태어나면서 그에게 정해진 것은 세 가지다. '요한네스'라는 이름과 어부로서 살아가리라는 것, 언젠가 죽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요한네스는 한평생 어부로서 생계를 유지했다. 하지만 죽음을 맞이하고 자신의 삶 전체를 돌아보는 지금, 어부로서 얼마나 성공했는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고된 노력을 했는지는 그다지 떠올리지 않는다. 내가 사랑했던, 나를 사랑해 줬던, 나를 '요한네스'라고 불러줬던 이들을 떠올릴 뿐이다. 이것을 책에서는 끊임없는 만남으로 표현한다. 이름은 그 자체로 의미를 갖지 않는다. 내 이름을 불러줄 대상이 있을 때 이름은 그제야 제 역할을 한다. 태어나면서 '요한네스'라는 이름이 정해진다는 것은, 앞으로 그 이름을 불러줄 무수한 이들과 관계하며 살아갈 것임을 암시한다. 생계를 위해 발버둥 치며 살아온 삶이지만 결국 남는 것은 나의 이름을 불러줬던 사람들과의 추억이다. 삶이란 결국 그동안 이룬 관계의 총합이다. 내가 준 사랑과 받은 사랑이 곧 내 삶의 전부다. 내가 무로 돌아간 후, 결국 세상에 남는 것은 나의 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