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자비는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다

The quality of mercy is not strained.

by 제이오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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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시절『베니스의 상인』을 참 재미있게 읽었었다. 셰익스피어 전공자가 아니더라도 이 희곡을 읽은 사람은 많을 것이다. 그 유명한 판결의 장면도 있고, 이야기 구성도 탄탄하다. 오늘 소개할 대사 "The quality of merch is not strained"는 4막 1장 법정 장면에서 포셔(Porita)가 변호사로 위장해 말하는 연설의 첫 문장이다. 상황은 샤일록(Shylock) 이 안토니오(Antonio)에게 돈을 갚지 못했으니 계약서대로 '한 파운드의 살’을 내놓으라고 법정에서 주장할 때 포셔는 율법적으로는 샤일록이 옳음을 인정하면서도 인간성으로 그를 설득하려 한다. 법은 정의를 보장하지만 진정한 인간다움은 자비에 있다고 하면서 말이다.


자비는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다

The quality of mercy is not strained.


위 대사의 뜻은 자비란 강요되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성품이라는 말이다. 이어서 포셔가 비유해서 말하는 자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녀는 “자비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비와 같아서, 주는 자와 받는 자 모두를 축복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자비는 인간을 신과 가깝게 만든다. 왜냐하면 신의 속성은 자비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법적 정의만 강조하면 잔혹해질 수 있고, 자비만 강조하면 법이 무너질 수 있고, 진정한 정의는 자비 위에서 완성됨을 뜻하는 것이다. 자비를 베푸는 것이 신의 속성에 가깝다는 말도 매우 감명적이다. 자비는 의무가 아닌 신의 속성에 가깝게 갈 수 있는 방법이니 말이다. 우리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 메시지인가.


교사 생활 동안 학생들 간의 무수히 많은 갈등을 봐왔고, 해결하는 방식에도 큰 관심을 가져왔다. 학생들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에도 셰익스피어의 이 대사가 의미하는 내용이 적용되는 경우가 있다. 피해자인 학생들은 학교 규칙과 규율이 있으니 그 규정대로 적용하여 가해 학생을 벌주기를 원하고, 일부 가해 학생들도 진심어린 사과나 어떤 인간적인 도리에 맞는 해결방식을 취하지 않고 원칙대로 벌을 받겠다고 주장할 때가 있다. 어떤 가해 학생들은 법적 처벌을 피하기 위해 상대방의 자비와 용서에만 의존하려 하기도 한다. 법과 원칙에 따라 해결하는 것만이 능사도 아니고, 처벌은 하나도 받지 않고 자비와 인간적인 도리만 강조하는 것도 좋은 해결책은 아니다. 그럼에도 상대의 잘못에 대해 용서와 자비없이 법적인 처벌만을 하고자 한다면 우리 삶이 얼마나 삭막해질까. 이 경우 상대에 대한 자비는 강요없이 스스로 자연스럽게 흘러나와야 한다. 학생들이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고 서로를 용서하고 이해해주는 순간 얼마나 크게 성장하는지 보아 왔기에, 앞으로도 많은 학생들이 내면적 성찰을 하면서 따뜻한 마음을 지니고 살 수 있기를 기도해 본다.


다시 희극으로 돌아가보자. 포셔의 계속된 설득에도 불구하고 샤일록은 자비를 베풀기를 거부한다. 결국 그는 법적 논리에 갇혀 몰락하게 되니, 이는 자비 없는 정의가 얼마나 위험한지 보여주는 극적 장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과연 샤일록은 그렇게 피도 눈물도 없는 나쁜 사람일까? 안토니오는 대놓고 샤일록을 조롱하기도 했었다.샤일록의 복수심은 이런 멸시와 차별에 기인한 것이기도 하다. 샤일록의 독백, "유대인에게도 눈이 있지 않은가? 우리도 그대들과 마찬가지로 웃고 울고, 상처를 입으면 피를 흘리지 않는가?"에서 그가 왜 안토니오에게 매정하게 구는지도 일면 이해가 가기도 한다. 여기서, 안토니오도 처음에 샤일록에 대한 인간적 자비를 베풀지 않았던게 아닐까 의구심이 생긴다.


사람의 관계는 상호적인 것이라서 한편의 잘못만 있는 것도 아니다. 물론 샤일록의 비정함은 비판할 만하지만 그가 그런 주장을 하기까지에 어떤 일들이 있었으며, 어떤 감정의 상처를 받았는지에 대해 주목해 본다면 조금은 그를 이해해 볼만한 지점이 보인다. 우리 삶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누가봐도 큰 잘못을 한 사람에게도 삶의 역사가 있기에 그 과정을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본다.


종교적인 관점으로 이 희극을 보려는 시도도 있다. 희극에서 샤일록은 유대인이다. 기독교인인 포셔의 관점에서 유대인인 샤일록은 적이다. 포셔의 연설은 기독교적 '자비' 개념을 내포하고 있고 이를 통해 유대인을 압박하려 한다. 지금까지도 전 세계적으로 계속되고 있는 기독교와 유대교의 갈등은 무엇으로 해결할 수 있을까. 종교적 갈등은 종교적 철학과 관념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셰익스피어가 말했듯이 그것은 인간의 선한 성품인 자비를 통해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용서해야 하니 억지로 짜낸 자비가 아니라, 인간적인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자비여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기에 이 희곡은 큰 울림을 주는 것 같다.


16세기에 목도했던 문제점이 앞으로 인류에게 지속될 갈등이 될거라는 것을 셰익스피어는 알아차렸을지 모른다. 셰익스피어는 먼 미래를 내다봤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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