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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르무통 LeMouton Feb 09. 2024

[르무통 X 제주] 미움도 시기도 없는 세상

사려니숲길



제주도는 2009년에 ‘제주의 숨은 비경 31’을 선정했다. 장생의 숲길, 오래물, 방선문 계곡, 환해장성, 다려도, 월령 선인장 군락지, 두맹이 골목 등 여행자들에게 많이 알려진 곳과는 조금 다른 곳들이다. 이름 그대로 ‘숨은 비경’들이다. 사려니숲길 역시 당시 ‘제주의 숨은 비경 31’에 선정되었다. 

사려니숲길의 길이는 약 10km이며 코스 전체가 우거진 숲길이다. 하늘을 가릴 정도로 높게 뻗어 올라간 숲길을 걷다 보면 세상의 무거운 짐들이 하나둘 사라지게 된다. 


흰 눈과 초록이 어우러진 사려니숲길에서


모두를 위한 산책로 

사려니숲길에는 두 개의 출입구가 있다. 하나는 남조로 출입구이고 다른 하나는 바자림로 출입구다. 두 개의 출입구는 시작 지점이자 종착지이기도 하다. 어느 곳에서 시작해도 무방하지만 차량을 이용하는 여행자라면 남조로 출입구에서 출발해야 한다. 비자림로 출입구에는 주차장이 없기 때문이다. 

남조로 출입구의 사려니숲길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무장애 나눔길’이 여행자를 맞이한다. 무장애 나눔길에는 휠체어를 탄 여행자들이나 걸음이 불편한 노약자들도 편안하게 산책할 수 있는 데크 산책로가 설치되어 있다. 데크 산책로에 계단이 전혀 없는 것도 큰 특징이다. 곳곳에 시각장애인을 배려한 점자 안내판까지 설치되어 있다. 데크가 미로처럼 설치되어 있어서 ‘미로숲길’이라고도 부른다. 

사려니숲길의 전체 길이가 약 10km지만 이와 별도로 무장애 나눔길의 산책 코스만도 약 2.4km에 달한다. 이 때문에 사려니숲길 전체 코스를 걷지 않고 무장애 나눔길만 걷는 여행자들이 더 많다. 숲길 대부분 구간은 하늘 높이 솟아오른 삼나무들이 빼곡하다. 데크 산책로를 따라 걷다 보면 마치 길을 잃은 것처럼 자신의 위치를 잊게도 된다. 어느 순간 돌고 돌아 애초의 자리에 돌아오기도 하지만 깊은 미로의 숲속으로 빠져들기도 한다. 

무장애 나눔길 곳곳에는 잠시 쉴 수 있는 시설들이 다양하게 설치되어 있다. ‘호끌락 숲속책장’은 숲에서 책을 읽을 수 있도록 책들을 꽂아놓은 작은 책장이다. ‘호끌락’은 ‘크기나 넓이가 작다’는 의미의 제주어다. 호끌락 숲속책장 주변에는 편안하게 책을 읽을 수 있는 벤치들이 설치되어 있다. 그런가 하면 아예 누워서 잠시 낮잠을 즐길 수 있는 수면 벤치도 있다. 비치 체어를 닮은 수면 벤치는 겨울을 제외한 계절에는 여행자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 곳이다. 


잠시 쉬어갈 수 있는 둘레길 숲책방 둘러보기 with 르무통 버디(다크네이비)


안개 가득한 숲길

숲을 찾아간 날은 안개가 가득한 날이었다. 더욱이 사나흘 전 많은 눈이 내려서 세상은 순백에 가까웠다. 그렇지 않아도 미로 같은 숲길은 이날 더욱 아득하고 신비로웠다. 무장애 나눔길 주변만 산책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지만 좀 더 깊은 숲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사려니숲길을 완전히 종주하기로 한 것이다.

무장애 나눔길을 벗어나자 길은 콘크리트 포장길로 바뀌었다. 임도와 비슷했다. 이제 막 숲길에 들어섰을 때 누군가 만들어 놓은 작은 눈사람을 보았다. 삼나무 가지로 팔과 뿔을 만들고 나무껍질로 눈을 붙였다. 코는 작은 솔방울이었다. 눈사람을 만들었던 기억이 언제였던가.

막상 길을 나섰지만 조금 불안하기도 했다. 좋은 날 다 놔두고 하필 눈이 쌓인 날 숲길을 걸어야 할까, 그런 걱정이 앞서기도 했다. 하지만 안개 가득한 숲속은 여행자를 끌어들이는 묘한 마력이 있었다. 그건 매력이 아닌 분명 마력이었다.


안개가 가득한 숲길에서의 추억


대부분의 여행자들이 숲길 입구의 무장애 나눔길을 산책하는 것으로 사려니숲길 산책을 마치지만 더러는 사려니숲길 전체를 완주하는 여행들도 있었다. 숲길에는 안개가 가득했고 간혹 이슬처럼 비가 내리기도 했다. 이슬 같던 비는 때로 눈으로 바뀌며 수시로 비와 눈의 모호한 경계를 오갔다. 이 때문에 숲길을 걷는 여행자들 대부분은 우비를 입거나 우산을 들었다.

그렇게 약 3.6km를 걸었을 때 물찻오름 이정표를 만났다. 이곳 숲길 이름이 사려니숲길이 된 이유는 인근에 사려니오름이 있기 때문이다. ‘사려니’에는 두 가지의 의미가 있다. 하나는 ‘신성한 숲’이라는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실 따위를 흩어지지 않도록 동그랗게 포개어 감는다’라는 의미다. 이토록 매혹적인 의미를 품고 있는 사려니오름은 아이러니하게도 사려니숲길 코스에서는 만날 수 없다. 코스에서 동떨어진 곳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물찻오름은 사려니숲길 코스 중에서 가장 유명한 오름이다. 오름 정상에 물이 고여 있고 정상 둘레가 성과 같다고 해서 한자로는 수성악(水城岳)이라고 표기한다. 제주의 오름 중에서 물이 차 있는 오름은 몇 되지 않는다. 하지만 아쉽게도 물찻오름 역시 현재는 자연휴식년제에 들어서서 여행자들이 방문할 수는 없다. 해제일이 정해지지는 않았지만 탐방로 정비가 끝나면 출입제한이 풀릴 예정이다. 

물찻오름을 지나자 곧바로 서어나무숲이 이어졌다. 서어나무는 봄에 진하고 붉은 잎을 피운다. 꽃보다 더 꽃 같은 잎이다. 줄기는 남성의 근육을 연상시킬 정도로 우람하다. 사려니숲길의 서어나무숲은 100년이 넘는 생명을 간직하고 있다. 서어나무숲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제는 조릿대 숲길을 만났다. 숲길 양쪽에 키 낮은 조릿대들이 늘어서 있었다. 마치 여행자의 발길을 응원하는 모습 같았다.


비 오는 날의 매력적인 산책 with 르무통 버디(다크네이비)


설국에서 그리는 그림 하나

어느새 10km에 이르는 길도 끝에 다다르고 있었다. 숲길은 여전히 안개로 가득했고 저만치 어딘가에 사려니숲길의 또 다른 출입구인 비자림로 출입구 숲이 있을 것이다. 숲을 걷는 내내 그런 생각을 했다. 안개 가득한 길을 걷다가 차라리 길을 잃는 건 어떨까. 눈까지 쌓여 온통 하얀 세상을 헤매고 헤매다가 결국 길을 찾게 되겠지만, 그렇게 찾은 길에서 만난 세상은 하나도 바쁠 것 없이 평화롭기만 한 세상이면 얼마나 좋을까. 그리고 미움도 없고 시기도 없는 그런 세상. 

그런 세상을 꿈꾸며 비자림로 출입구에 도착했다. 비록 몇 시간 전과 달라지지 않은 세상이었지만 숲길을 걷는 내내 행복했다. 잠시나마 번잡했던 세상과 이별할 수 있었다. 비자림로 출입구는 남조로 출입구보다 더 많은 눈이 쌓여 있었다. 사려니숲길을 완주하는 여행자가 아니라면 여행자들이 거의 오지 않는 곳이기에 쌓인 눈이 전혀 녹지 않은 탓이었다. 

그곳에서 그림 한 장을 그렸다. 그림은 여행의 감성을 더욱 풍성하게 해준다. 천천히 풍경을 바라봐야 하기 때문이다. 길을 걸을 때처럼, 그림을 그릴 때는 풍경과 내가 오로지 하나가 된다.


비자림로 출입구에서의 여유로운 드로잉 시간


Tip.

남조로 출입구와 비자림로 출입구를 잇는 232번 버스는 자신의 차량을 이용하는 여행자에게 매우 유용한 교통수단이다. 남조로 출입구 주차장에 차량을 주차한 후 비자림로 출입구까지 완주한 후 232번 버스를 타고 남조로 출입구로 돌아오거나, 주차 후 곧바로 버스를 이용해서 비자림로 출입구로 이동 후 남조로 출입구까지 걸으면 된다. 버스는 1시간에 두세 대 운행한다. 





[르무통 x 제주] 시리즈 작가 소개

박동식 여행가, 사진가, 에세이스트


카메라를 들고 길을 떠나는 유목여행자다. 

세상 곳곳에 숨겨진 보물을 찾아내는 것을 즐기며 때로는 돌아서서 혼자가 되기 위해 애쓴다. 

저서로는 『마지막 여행』 『열병』 『여행자의 편지』 『내 삶에 비겁하지 않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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