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천 아홉굿마을 - 생각하는 정원 - 환상숲 곶자왈공원 – 곶자왈보석상자
7평 컨테이너 카페를 알고 있다. 평수는 작아도 테이블이 4개나 된다. 주인 부부는 평생을 혼자 살다가 쉰 넘은 나이에 사랑에 빠져 결혼했다. 그들의 신혼집은 컨테이너 지붕에 설치한 텐트다. 특별한 텐트가 아니라 캠퍼들이 캠핑에서 사용하는 평범한 텐트다. 집에서 회사(?)까지 출근 시간은 1분이다. 컨테이너 카페 뒤에는 국립공원으로 이어지는 숲이 있다. 부부는 매일 아침 숲을 산책한다. 평생 가난하게 살았지만 숲에서 위로를 받는다고 했다. 하긴, 그들은 가난을 잘 알지 못한다. 하루 여덟 잔의 커피만 팔면 먹고사는 데 충분하다고 말한다. 잠잘 곳이 있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함께 산책할 수 있는 숲이 있고…….
남들 다 찾아오는 숲을 자기들의 정원이라고 자랑하는 부부를 가끔 내 인생의 채찍으로 삼는다. 아직 멀쩡한 휴대전화기를 두고 최신형 휴대전화기에 눈독을 들일 때, 지난 계절에도 입지 않았던 옷들이 여럿임에도 계절이 바뀌었다는 핑계로 옷을 사고 싶을 때, 그리고 집이 딱 세 평만 더 넓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 욕심이 꿈틀댈 때면 부부처럼 숲을 찾는다. 그곳에서 평정심을 찾고 위로도 받는다.
낙천 아홉굿마을 주변에는 오름의 능선들이 둘러서 있다. 덕분에 마을은 분지 형태를 이룬다. ‘굿’은 ‘샘’을 뜻하는 제주어다. 즉, 아홉굿마을은 ‘아홉 개의 샘이 있는 마을’이라는 의미다. 물이 귀한 제주에서 샘이 아홉 개나 있으니 오래전부터 사람들이 모여 산 것은 당연한 일이다.
마을 곳곳에는 다양한 모양의 의자들이 즐비하다. 주민들의 손으로 무려 1,000여 개의 의자를 만들어 놓았다. 그래서 ‘의자 마을’이라는 별명도 갖고 있다. 지금은 체험마을로도 유명하다. 마을 뒤에는 ‘잣길’이 있다. ‘잣’은 자잘한 돌을 뜻한다. 검은색 현무암 돌담이 쌓여 있는 길이 잣길이다. 몇 차례 아홉굿마을의 잣길을 걸은 적이 있다. 여행자마다 목적이 다르겠지만 내가 아홉굿마을을 찾는 이유는 바로 잣길 때문이다. 길은 밭을 지나기도 하고 우거진 숲을 지나기도 한다. 잣길은 시골 돌담의 정겨움과 숲의 평온함을 동시에 품고 있다. 그렇게 돌담을 따라 길을 걷다 보면 마을로 되돌아온다. 코스는 정하기 나름이지만 대략 1시간 남짓 소요된다.
‘생각하는 정원’은 한 농부의 집념이 녹아있는 곳이다. 농부는 수십 년 동안 척박한 땅을 일구어 세련되고 품위 있는 정원으로 가꾸어 놓았다. ‘생각하는 정원’의 옛 이름은 ‘분재예술원’이다. 아름다운 분재들이 주된 볼거리다.
분재들이 전시된 돌담을 지나면 오름을 닮은 잔디 언덕 여러 개가 나타난다. 주변에 보이는 해송과 향나무 등은 수령 수백 년이 넘는 고목들이다. 이에 뒤질세라 수백 년을 땅속에 묻혀 돌처럼 단단해진 규화목도 여러 개가 전시되어 있다.
넓은 정원을 산책하며 만난 뜻밖의 풍경은 동백꽃이었다. 정원을 산책하며 여러 번 동백꽃을 만났다. 푸른 잎 사이에 점처럼 피어난 꽃들도 아름다웠지만 바닥으로 떨어진 꽃들에게 더욱 눈길이 머물렀다. 목이 부러진 붉은 동백은 누런 잔디 위에 혹은 검은 돌바닥 위에 살포시 내려앉아 있었다. 살아있을 때보다 죽어서 더욱 아름다운 꽃. 아, 곧 봄이 오겠구나! 붉은 꽃을 보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생각하는 정원’이 사람의 손길에 의해 절제된 미학을 간직한 정원이라면 ‘환상숲 곶자왈공원’은 최대한 사람의 손길을 배제한 자연 그대로의 숲이다.
‘곶자왈’은 제주에서만 사용하는 용어다. ‘곶자왈’은 ‘곶’과 ‘자왈’의 합성어다. ‘곶’은 ‘숲’을 뜻하고 ‘자왈’은 ‘덤불’을 뜻한다. 화산활동으로 분출한 용암류가 만들어낸 불규칙한 암괴 지대에 형성된 숲을 곶자왈이라고 부른다. 다양한 동식물이 서식하기 때문에 보전 가치가 매우 높을 뿐만 아니라 제주의 허파와 같은 곳이다.
숲 안으로 들어서면 현무암들이 불모지의 돌처럼 쌓여 있다. 그리고 현무암 대부분에는 콩알처럼 생긴 식물들이 붙어 있다. 콩짜개덩굴이다. 다 같은 잎 같지만, 자세히 보면 간혹 다른 모양의 잎들이 섞여 있다. 보통의 잎들은 둥근 영양엽이지만 번식을 담당하는 포자엽은 끝이 뾰족하다.
숲길 한복판에서 간혹 문어처럼 발을 펼치고 있는 나무도 만난다. 바로 푸조나무다. 푸조나무는 제주에서 팽나무 다음으로 마을 입구에 많이 심는 나무다. 마을의 수호신으로 여기며 제사를 지내는 당나무 중에는 푸조나무가 제법 많다. 굵직굵직한 뿌리를 땅 위에 펼치고 있는 푸조나무 때문에 곶자왈이 간혹 열대 지역의 숲처럼 연상되기도 한다.
숲을 산책하다 보면 향긋한 향기가 후각을 자극하기도 한다. 바로 백서향의 향이다. 꽃은 작고 앙증맞지만 향기는 매우 강하다. 백서향은 향기를 따라 날아온 나비와 벌이 수정하면 그 꽃은 더는 향기를 내뿜지 않는다. 나비와 벌들을 아직 수정하지 못한 다른 꽃들에게 양보하는 것이다.
‘환상숲 곶자왈공원’을 방문할 때는 매시간 운영하는 숲해설에 참여할 것을 권한다. 그저 숲에 불과했던 곶자왈은 해설을 통해서 생명을 얻게 된다. 숲해설은 대략 1시간이 소요된다.
식물을 이용한 ‘플랜테리어’로 집안에 숲을 들이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식집사’라는 말까지 생길 정도다. 특히 열대관엽 식물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늘면서 식물 카페까지 생겨나고 있다. 식물 카페는 카페 내부를 주로 식물로 채운 곳을 말한다. 대부분 열대관엽 식물들이 주종이다.
‘곶자왈보석상자’는 식물 카페 중에서는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곳이다. 희귀한 열대식물들을 감상할 수 있는 건 물론이고 어지간한 식물원보다 더 대품으로 키운 식물들도 여럿 볼 수 있다. 카페 안에서 차를 마시다 보면 숲 안에서 차를 마시는 기분이 든다. 더욱이 이국적인 식물들이 가득한 카페이니 멀리 여행을 떠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식물을 바라보며 무념무상의 세계에 빠져드는 것을 ‘식멍’ 혹은 ‘풀멍’이라고 할 정도다. 그만큼 식물이 주는 위로가 크다는 의미다. 걷기 여행의 종착지에서 만나는 식물 카페. 더 없이 좋은 힐링이다.
7평 컨테이너 카페를 운영하는 부부를 처음 만났을 때 지붕의 텐트에서 산다는 말을 믿지 못했다. 하지만 이부자리가 마련된 텐트를 보면서 무소유에 가까운 소박함에 적지 않게 놀랐다. 가난이 몸에 익은 사람. 그런 그들에게 쉰이 넘도록 집 살 돈도 없이 왜 그렇게 살았냐고 묻지 못했다. 삶은 다양하니까. 물론 여덟 잔의 커피를 팔기 위해 온종일 손님을 기다리는 삶이 궁금하기는 했다. 어쩌면 그건 궁금증이 아니라 응원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가끔 상상한다. 매일 아침, 자기들 것도 아닌 숲을 정원처럼 산책하는 부부가 영원히 늙지 않기를. 숲에서 내내 행복하기를. 그래서 나도 자주 숲을 산책한다.
[르무통 x 제주] 시리즈 작가 소개
박동식 여행가, 사진가, 에세이스트
카메라를 들고 길을 떠나는 유목여행자다.
세상 곳곳에 숨겨진 보물을 찾아내는 것을 즐기며 때로는 돌아서서 혼자가 되기 위해 애쓴다.
저서로는 『마지막 여행』 『열병』 『여행자의 편지』 『내 삶에 비겁하지 않기』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