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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르무통 LeMouton Apr 12. 2024

기찻길 옆 골목, 대구 동촌로 산책길


가장 편안한 신발을 신고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되어 

옹기종기 행복하게 


아기자기 이쁜 등촌역


길 위에서 만난 그들에게 산책은 하루 중 아주 소중한 시간이었다. 주로 재택근무를 하는 그녀는 그가 퇴근할 시간에 맞춰 집을 나섰다. 더 이상 기차가 다니지 않는 오래된 기찻길을 따라 끝까지 가서 그를 만나 다시 집으로 걸어왔다. 주말엔 이곳저곳 다른 곳을 산책하지만,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정해진 일과가 있는 평일은 꼭 그 길을 걸었다. 기찻길이었지만 선로를 정리해 메우고 단정하게 가꾸어놔서 폭우나 폭설이 아닌 이상 비나 눈이 와도 빼먹지 않았다. 그렇게 그들은 고단했던 하루의 일을 훌훌 털어버리고 저녁마다 새사람이 됐다. 낮 동안 진짜 나를 잃고 지내다가 밤이면 제 모습으로 돌아온다는 건 정말 행복한 일이었다. 



이번 반려길 산책을 함께한, 나의 반려신발 르무통 스타일2 (베이지)


“그 시절의 나라면 상상도 못 했을 일이지.”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그녀가 처음 그를 만난 건 하필 울고 있을 때였다. 어렵게 들어간 대기업을 그만두고 스타트업을 준비 중이었던 그녀는 매일 희망과 절망과 기대와 불안의 사이를 오가고 있었다. 아이디어를 말했을 때 세상에 없는 서비스라며 어서 빨리 시작하라고 부추기던 사람들이 하나 둘 사라질 즈음이었다. 나와서 보니 세상에 없는 서비스는 없었고, 스타트업의 명멸 주기가 단축되며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었다. 처음의 아이디어를 다시, 다시, 다시… 전방위적인 압박이 온 삶을 지배했다. 



이번 반려길 산책을 함께한, 나의 반려신발 르무통 스타일2 (베이지)


숨을 쉴 수가 없었던 그녀는 잠시 모든 걸 내려놓기로 했다. 자신이 우물 속을 헤엄치며 물을 긷는 사람 같았다. 일단 우물 밖으로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행기 티켓을 끊고 밀라노에서 니스까지 가는 기차표를 미리 예약했다. 눈부신 지중해의 햇살에 모든 걱정을 말리고 싶었다. 잘 건조된 근심을 얇게 접어 트렁크 어디쯤 끼워두고 잠시라도 완벽하게 다른 사람이 되어 시간을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그녀는 회사를 그만둔 후 입지 않던 원피스를 챙기고 한동안 쓰지 않았던 화장품이며 헤어롤도 챙겼다. 그렇게 지긋지긋한 현실에서 벗어나 지중해로 날아갔다. 



이곳은 시간이 천천히 흐른다


원피스 차림에 밀라노에서 70% 할인으로 산 명품 브랜드의 샌들을 신고 언덕을 오르던 그녀는 발의 통증을 참지 못하고 옆으로 난 좁다란 골목 계단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참으려고 했지만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애초에 그 신발을 신고 길을 나서는 게 아니었다. 날렵하고 아름다운 그 신발은 모래사장과도 돌길과도 어울리지 않았다. 알면서도 그녀는 굳이 새로 산 신발을 꺼내 신었다. 매일 걸치던 일상에 절어 있는 차림이 아니라 희망을 안은 듯 당당해 보이는 스타일이었으면 했다. 



자신을 알아볼 사람이 아무도 없는 그곳에서 실패란 모르는 성공한 사람처럼 보이고 싶었다.


신을 알아볼 사람이 아무도 없는 그곳에서 실패란 모르는 성공한 사람처럼 보이고 싶었다. 하지만 그토록 원해서 신고 나온 아름다운 그 신발은 침입자를 쫓아내듯 발의 여기저기에 상처를 냈다. 참고 똑바로 걸어보려고 했지만 발등이 쓰라려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짜증이 솟구쳤다. 달라질 기회를 주지 않는 신발이 야속했다. 아니 눈부신 햇살 아래 불행한 사람은 오로지 자기 자신뿐인 것 같은 지중해의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니 엉뚱한 곳에서 해결책을 찾으려는 자기 자신이 한심했다. 아니 그냥 어쩌다 이렇게 모든 걸 포기하고 싶어졌는지 너무 화가 났다. 


그는 두 팔로 무릎을 감싼 채 고개를 떨구고 울고 있는 그녀를 가만히 흔들며 물었다. 한국 사람이냐고, 도울 일이 있다면 이야기하라고. 그는 아이처럼 울고 있는 그녀가 소매치기를 당한 줄 알았다고 했다. 그렇게 둘의 이야기가 시작됐다. 발이 아파 운다는 말에 그가 제게 업혀요, 라고 한 건 아니었다. 상황판단이 빠른 그는 잠시만 기다리라며 근처 상점에서 플립플랍을 사 왔다. 그때 그녀는 살 것 같았다. 발등과 발날의 쓰라림이 따스한 햇살과 시원한 바람에 당장 괜찮아졌다. 



완연한 봄이 찾아왔다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는 건 그런 것이었다. 당장 괜찮아지는 것. 그녀는 답례로 저녁을 사기로 했고 자신이 여행을 온 이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고 뭐 그러다가 그와 가까워졌다. 그는 출장을 마치고 돌아가기 전 하루 짬을 내 언덕길을 오르던 중이었다. 긴장을 안고 일을 하느라 미처 보지 못했던 풍경을 여유 있게 둘러보려던 차에 그녀를 발견했다. 그들은 그렇게 아름다운 휴양지에서 우연히 만나 지금까지 함께 하고 있다. 그녀는 울고 있는 사람을 지나치지 못하는 따뜻함을 지녔지만 바로 상황판단을 하고 침착하게 해결책을 제시할 줄 아는 F와 T의 균형이 완벽한 그와 살기 위해 대구로 갔다.  



골목골목 걷는 재미가 쏠쏠하다


처음 그녀가 회사를 그만두고 스타트업을 하려던 이유는 다른 사람이 되고 싶어서였다. 회사에 매여 회사가 원하는 일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창의적이고 진취적이며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펼치는 성공한 다른 선배들처럼 되고 싶었다. 하루라도 더 늦기 전에 나만의 세상을 구축하겠다는 포부는 훌륭했지만 얼른 성과를 내고 싶다는 욕심에 무엇이든 서둘렀고, 그 조급함이 발목을 잡곤 했다. 지금 그녀는 누구보다 차분하게 자신의 세상을 만들어 나가고 있다. 너무 멀어서 미안하지만 그래도 꼭 한 번 초대하고 싶다는 그녀의 말에 흔쾌히 가겠다고 답했다. 


서로를 구원했다고 표현하는 그들이 함께 사는 곳을 나도 가보고 싶었다. 집들이라는 명목이 아니면 서울과 대구로 떨어져 지내게 된 우리가 또 언제 만날지 모를 일이었다. 고속열차를 타면 2시간 남짓, 사실 대구는 그렇게 멀지 않다. 동대구역에 도착해 개찰구를 빠져나오니 먼 나라에서 온 사람을 반기듯 그녀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오래만에 만난 그녀는 피로로 생긴 붓기가 싹 빠진 전체적으로 단단한 느낌이었다. 대구가 잘 맞는 것 같아 안심이었다. 대구가 잘 맞는 것 같다는 말에 그녀는 밝은 표정으로 대구 적응기에 대해 들려주었다. 대구생활을 시작하는 그녀를 위해 첫날 그가 준비한 선물 이야기였다. 



이번 반려길 산책을 함께한, 나의 반려신발 르무통 스타일2 (베이지)


“내가 대구에 온 첫날 그 사람이 선물 박스를 내미는 거야. 엄청 기대하면서 열었는데, 글쎄.”


“뭐가 있었어? 고가의 프로포즈백이라도 들어 있었어?”


“아니, 신발. 하하하.”


그는 그녀를 위해 가장 편안한 신발을 준비했다. 그 낯선 이국의 거리에서 헐레벌떡 플립플랍을 사다줬던 그날을 기념하는 것이었다. 이제 나란히 걸을 예정이었으므로 이번엔 자신의 것도 함께였다.


“그때 너무 급해서 아무거나 사다 준 게 마음에 걸렸다나. 이번에는 이것저것 다 신어보고 제일 편안한 걸로 골랐다더라고. 너무 귀엽지 않아?”


마지막 이야기만 하지 않았어도 칭찬을 엄청 해주려고 했는데, 그녀는 여전히 조급하다. 조급해. 



이번 반려길 산책을 함께한, 나의 반려신발 르무통 메이트 (블랙), 그리고 스타일2 (베이지)


그들의 집에 짐을 내려 놓고 우리는 다시 밖으로 나왔다. 퇴근 전이라 아직 오지 않은 그를 마중나가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그가 선물한 가장 편안한 신발을 신고 두 사람이 매일 걷는다는 그곳으로 안내했다. 자그마하고 예쁜 동촌역사 작은 도서관이었다. 현재 동촌 지하철역이 아닌 옛 역사였다. 현재 역사 안은 도서관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누군가의 오래된 사진첩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소박하고 아름다운 건물 옆에는 작은 무대와 광장이 있었다. 꽃나무 사이로 축구를 하는 아이들이 보였다. 계절마다 작은 무대에 무슨 일이 일어날까 상상해봤다. 백일장, 노래자랑, 미술대회 특별한 추억이 될 아기자기한 일상이 보이는 것 같았다. 



이 꽃 이름이 뭐더라..


“여기가 시작이 아니야, 얼른 와.”


앞서가는 그녀를 따라가니 옹기종기행복녹색마을이라는 표지판이 보였다. 옹기종기, 라는 단어를 정말 오랜만에 발음했다. 옹기종기라는 단어가 이렇게 예쁘고 따뜻했나 하면서 걸음을 옮기다가 우와! 눈앞의 풍경에 멈춰섰다. 80년간 기차가 지났다는 기찻길을 매끈하게 다듬은 기다란 길을 꽃들이 장식하고 있었다. 기차가 지나던 그 길 위로 자전거가 지나고 바람에 흔들리는 꽃잎을 구경하며 사람들이 걷고 있었다. 



정말 좋아. 매일 걷는데 질리지 않아


“그러니까 매일 이 길을 걷는다는 거지? 행복하겠다.”


“정말 좋아. 매일 걷는데 질리지 않아. 일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도 이렇게 걷고 나면 다 괜찮아져.”



이번 반려길 산책을 함께한, 나의 반려신발 르무통  메이트 (블랙)


재미있는 벽화가 그려진 키 작은 집들이 늘어선 골목을 지나 기찻길터를 따라 큰길을 두 번 건너 그를 만났다. 그는 반대편 강가에서 걸어오는 중이었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우리는 다시 반대편에 있는 집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다시 돌아가는 내내 그들의 발은 막 피어난 조팝나무처럼 가볍고 예뻤다. 자기자신의 모습으로 살아가게 된다는 게 얼마나 사랑스러운 일인지 알게 된 대구의 밤이었다.



반려길이란?

길을 입양해서 가꾸며 평생을 돌보는 나의 반려길 프로젝트, 르무통이 시작합니다. 


* 나만의 반려길을 소개해주세요

댓글에 나만의 반려길을 소개해 주세요. 그 길을 사랑하고 아끼는 이유, 길의 위치, 역사, 길에 얽힌 이야기 등을 자유롭게 적어주세요. 에디터 L씨가 그 길을 소개합니다. 매주 3명의 당첨자를 선정해 르무통 공식몰 적립금 5만원과 르무통 매거진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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