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 삶이 되고 삶이 여행이 되는
바닷마을 이야기
“기장에 왔다고?”
휴식 차 온 것은 아니었다. 어느 아티스트의 인터뷰를 의뢰받았는데 그가 원한 장소가 기장의 아난티 앳 부산 코브였다. 현악기를 다루는 섬세한 그는 유독 그곳에서 바다를 보는 것을 좋아한다고 했다. 다정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작은 바닷가 마을에 있는 기분이 안정감을 준다면서. 바닷가 쪽 창을 활짝 열고 손님을 맞는 카페에 앉아 느긋하게 커피를 한 잔 마시는 그는 영락없는 그 마을 사람이었다.
차양 아래 그늘의 저편, 밝은 빛과 아련한 수평선 사이 가벼운 표정의 사람들이 오고갔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리조트 안을 지나는 사람들이 모두 이웃 같았다. 그와 인터뷰를 마치고 나는 J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서울 경기에 있어야 할 사람이 부산까지 왔다니 J는 못 믿겠다는 듯 진짜 기장이냐고 되물었다.
“별일 없으면 이쪽으로 올래? 너희 집에서 멀지 않아.”
집 안 정리를 마치고 오겠다는 J를 기다리며 우리의 첫 만남이 떠올랐다. J는 첫인사에 부산에서 왔다고 하지 않고 부산 송정에서 왔다고 동네 이름을 구체적으로 말했다. 부산이라고 하면 해운대, 광안리밖에 모르는 서울 촌사람들에게 J는 사투리 억양의 씩씩한 목소리로 송정 몰라요? 기장 옆에 송정, 몰라요? 기장 미역은 다 먹어봤을텐데? 라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서울말을 하는 선배들의 놀림에 주눅들기는커녕 큰 목소리로 기장을 한 번도 안 가봤어요? 큰일났네. 라며 우리를 머쓱하게 했던 J. 첫 만남부터 유쾌하고 당당한 J에게 모두 호감을 느꼈고 나도 다르지 않았다. J는 우리에게 부산의 바다 정확하게 그녀가 살아온 송정 해수욕장과 포구로 이어지는 바다에 대해 자주 이야기했다. 마감에 치여 야근이 계속되면 J와 저녁을 먹으며 바다 이야기를 해달라고 조르기도 했다. 가로등 아래 조명을 받고 더 화려해진 꽃잎이 예쁘던 어느 봄밤 J는 그러지 말고 다음번 본가에 갈 때 함께 가자고 했다. 맨날 이야기만 들으면 뭐해요? 가서 봐요. 별로 안 멀어요. 금방이야, 일일생활권 대한민국! 이라며 우리를 부추겼다.
J의 바다를 찾은 건 나뿐이었다. 많은 계획이 그렇듯 처음엔 서넛이 가겠다고 했는데 이런저런 이유와 핑계로 하나둘 빠져나가고 결국 나만 남게 됐다. 왁자한 여행은 못하겠지만 뭐 사실 그렇게 돼서 더 좋았다. 로컬 맛집에서 밥을 먹고 J와 둘이 걷고 또 걸을 생각으로 조금 두근대기도 했다. 나는 들뜬 마음으로 송정으로 떠났다. 아직 봄이어야 하는데 유난히 햇살이 여름 같던 날 J와 부산역에 도착했다. 입꼬리가 위로 향한 J와 입매가 꼭 같은 아버지의 차를 타고 송정으로 향했다. 가는 내내 J의 아버지는 개발이 된 송정과 기장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하셨다.
“그때 기장은 부산도 아니었지. 양산이었다고. 바닷가에 지붕이 낮은 슬라브집이 늘어선 조용한 어촌이었어요. 얼마나 좋은지, 내가 사는 곳인데도 날이 좋으면 그 길을 여행 가듯이 다녔어요. 드라이브도 하고 걷기도 하고.”
학교 선생님이었던 J의 아버지는 그 길이 좋아서 시내 학교에서 송정에 있는 학교로 옮긴 후 그곳에서 퇴직을 하셨다고 했다.
창밖으로 바로 바다가 넘실댈 줄 알았는데 J의 집 창밖으로는 옆집이 보였다. 집이 바닷가 앞에 있는 거 아니었어? 당황하며 묻자 J는 도시 촌사람 같은 소리를 한다며 깔깔 웃었다. 눈앞에 바다가 있으면 파도 소리 시끄러워서 못산다면서. J의 집은 송전천을 따라 난 마을의 중간쯤이었다. 바다로 이어지는 폭이 좁은 물길이 죽 늘어선 마을은 뒤돌면 바다가 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다른 풍경이었다.
물 건너는 얕은 산이었는데 산 아래 천이 흐르는 모습이 바닷가 마을이 아니라 산이 있는 동네 같았다. J가 어려서 고기잡이도 했다길래 고기잡이 배를 타고 망망대해를 누벼본 건가 했는데 그 천에서 했던 거였다. 많이 개발이 됐다지만 아직도 천 위에 작은 배를 띄우고 낚시를 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점점 무언가 속은 기분. J는 어이없다는 내 표정을 보고 낄낄 웃더니 진짜 바다를 보러 가자며 집을 나섰다.
물가를 따라 한 5분 걸었을까? 큰 길 너머 바다가 보였다. 송정해수욕장이었다. 거짓말 아니잖아요, J의 말에 이번엔 내가 웃었다. 그냥 기분이 좋았다. J의 표현대로 도시 촌사람이 으레 그렇듯 모래사장으로 달려가 괜히 바다에 발을 담그고 사진을 찍어댔다. 모래를 손에 가득 쥐고 스르르 빠져나가게 하는 손장난을 반복하며 입을 벌리고 해가 지는 수평선 너머를 하염없이 바라봤다. 천국인가 싶었다.
J의 씩씩함과 단단함이 어디서부터 왔는지 알 것 같았다. 이제 밥 먹으러 가자는 말에 일어나 엉덩이에 붙은 모래를 털며 집으로 돌아갔다. 우리는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바다로 나왔고 그곳에서 시작해 기장 쪽 포구를 향해 한참을 걸었다. 빨간 등대까지 바닷가를 따라 걸으면서 다부지고 조용한 어촌마을의 풍경을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생선을 말리고, 미역을 말리고, 그물을 손질하던 그들의 손과 발. J는 서울에 와서 이틀이 멀다하고 엄마가 보내준 미역으로 국을 끓였다고 했다. 출근길에 미역을 물에 담그고 나와 퇴근해 집에 가면 작은 부엌에 고향 냄새가 가득했다고. 함께 걸으며 J가 말하는 고향 냄새를 알게 됐다. 색으로 치면 파랑에 가까운 냄새.
그해 봄, J의 집에서 보낸 며칠을 잊지 못한다. 눈을 뜨면 바다를 만나 바다와 하루를 나누며 바닷마을 사람으로 살았던 며칠은 일에 찌들어 구겨져 있던 나를 곱게 펴주었다. 몇 년 후 아버지의 건강에 문제가 생기면서 J는 고향으로 돌아갔고 나도 프리랜서가 되어 서울을 떠났다. 시간은 우리를 그렇게 바꿔 놓았고 J의 집에서 한참을 걸어 닿았던 호텔에서 다시 뭉치자는 약속도 잊게 됐다. J가 부산으로 돌아가고 동료의 결혼식에서 한번 보고 말았으니 얼굴을 보고 밥 한끼 먹은지도 몇 년 전이었다. 일이 어떻게 될지 몰라 미리 연락은 못했지만 기장을 떠나기 전에 J를 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만약 J가 시간이 없다면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었는데 J는 한달음에 내가 있는 곳으로 와주었다. 미리 연락을 하고 오지 그랬느냐고, 며칠 더 지내다 가라는 그녀에게 오매불망 나를 기다리고 있을 강아지 사진을 보여줬다. 귀엽다아! 오랜만에 듣는 춤을 추는 듯한 J의 억양이 너무 좋았다.
기장이 더 많이 변했다니까, J는 말도 못한다면서 옛날 그 정취가 다 사라졌다고 아쉬워했다. 무언가가 사라진 대신 어떤 것이 생겨나기도 하는 게 삶 아니겠나. 변한 그 모습도 나에겐 충분히 아름다웠다. 달라진 삶을 잘 살아내는 우리들처럼. 이번엔 내가 호스트가 된 듯 아티스트에게 추천받은 곳으로 안내해 식사를 했다. 야근을 하며 어두운 사무실에서 J에게 듣던 바다가 눈 앞에 펼쳐진 레스토랑이었다. 즐거운 대화를 마치고 헤어지기 전에 나는 J의 손을 잡고 팝업매장으로 향했다. 걷기 좋은 동네에 사는 그녀에게 꼭 발이 편한 신발 한 켤레를 선물하고 싶었다. 여기까지 와서 왜 언니가 밥을 사고 선물까지 사주냐며, 내가 좋아하는 춤 추는 듯한 억양으로 사양하는 J에게 새신발을 신겼다.
나는 여름으로 향하는 봄의 중간쯤이 되면 바닷마을 사람이 되어 살았던 며칠을 떠올려. 생각하는 것만으로 마음이 싱그러워져.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 이 신발을 신고 바닷가를 걸을 때 서울에서 씩씩했던 눈부셨던 너의 시간을 기억했으면 좋겠어. 다음에 다시 이곳에 오면 그때도 나란히 같은 신발을 신고 걸어보자. 너는 여행자가 되고 나는 바닷마을 사람이 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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