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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르무통 LeMouton May 10. 2024

청담동 고즈넉한 주택가에서 봉은사까지


화려함 뒤 

삶이 살아 있는 담벼락 아래


이번 반려길 산책을 함께한, 나의 반려신발 르무통 메이트 (라이트블루)


청담동에서 처음 술을 마신 건 사회 초년생 때였다. 명품숍은 그 시절이나 지금이나 나에게 큰 자극이 아니었으므로 청담동은 관심지역이 아니었다. G의 생일파티 장소가 홍대나 서촌이 아닌 청담동이라는 이야기에 그곳에 술 마실 곳 조금 더 정확하게 우리가 술 마실 곳이 있나 의아했다. 


G는 나보다 먼저 사회생활을 시작한 선배였지만 같은 20대였고 우리가 그곳에서 어울린 적은 없었다. 그 시절 청담동은 어른들이 노는 곳, 아니 노는 곳이라기보다 나와 다른 삶을 사는 사람들의 삶이 있는 곳이라고 생각했다. 연예인이나 건물주 같은. 


그 시절 청담동은 나와 다른 삶을 사는 사람들의 삶이 있는 곳이라고 생각했다.


“버스에서 내렸어? 아니 버거킹 쪽 골목 말고 큰길로 와. 대로로 쭉 올라와야 하는데, 엠넷 쪽까지. 아 다른 버스를 탈 걸 그랬다.”


설명을 하다 말고 답답했는지 G는 자기가 큰길 앞으로 나와 있겠다고 했다. 길 가장자리로 빌딩들이 늘어선 6차선의 도산대로를 따라 오르막을 올랐다. 선릉 쪽으로 가는 버스가 아니라 영동대교 방향 버스를 타고 한 정거장을 더 갔어야 했다는 후회를 할 즈음 저 멀리 G가 보였다. 다른 친구에게 위치를 설명하는지 휴대폰을 귀에 대고 높이 든 팔을 열심히 흔들고 있었다. 


“생일 축하해”


“고마워, 여기서 금방이야.”


모두 자유로운 분위기로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G를 따라 도착한 레스토랑은 배낭여행으로 다녀온 파리 어느 골목에 있는 것을 뚝 떼놓은 분위기였다. 차양에는 프랑스의 와인 등급을 뜻하는 알파벳이 적혀 있었고 그 아래 작은 테라스 테이블에 여유로운 표정의 사람들이 와인잔을 부딪혔다. 상당히 이국적인 풍경이었다. 


“뭐야 여기 파리야?”


G는 웃으며 눈이 동그래진 나를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는 안으로 안내했다. 외국에서 예술 관련 공부를 하고 돌아온 G의 외국인 친구 한둘과 건너건너 이야기를 듣던 커플, 배우지망생인 G의 후배가 보였다. 미드 아니 프드의 한 장면인 듯 모두 자유로운 분위기로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처음 만났지만 전공도 하는 일도 제각각이라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다. 


꽤나 근사한 시간이었다


공통 분모인 G와의 만남이나 G와 함께했던 에피소드만 이야기하는데도 와인 한 병이 비워졌다. 나를 만날 때 통화하던 G의 동료가 마지막으로 도착할 즈음엔 이미 모두 친해져 있었다. 서로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지만 누군가를 축하해야 한다는 공동의 목표를 향해 나아갔고 그건 꽤나 근사한 시간이었다. 


같은 목표를 가진 우리는 아카시아 향이 묻어나는 5월의 밤이 깊어질 때까지 천천히 마시며 시간을 보냈다. 대화 내용이 한탄이나 험담이기 쉬웠던 여느 술자리와는 다른 차원의 시간이었다. 누군가 빈 잔에 와인을 따라주었다. 가느다란 잔의 목을 살짝 잡았다. 


이번 반려길 산책을 함께한, 나의 반려신발 르무통 메이트 (라이트블루)


순간 그즈음 보았던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의 한 장면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주인공 길처럼 다른 시공간으로 넘어온 느낌. 지금도 청담동 와인바에서 벨 에포크를 떠올렸던 그 밤을 자주 추억한다. 그날 헤어져 집에 갈 때 나는 처음 왔던 길이 아닌 반대쪽 주택가를 가로질러 갤러리아 백화점이 있는 압구정 쪽으로 걸었다. 어둠이 짙어 어렴풋했지만 그 골목은 큰길가와 다르게 아늑했다. 네온사인 대신 거실이나 침실의 조명이 골목을 밝혔다. 청담동이라는 이름에서 오는 화려한 이미지와 조금 다른 고요한 삶이 내려앉아 있었다. 


5월, G의 생일 무렵이 되면 주말 하루쯤 시간을 내 그 길을 걷는다. 지금 생각해도 그날의 모든 것이 좋았다. 와인이라는 게 사람을 천천히 말하게 해준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 지금도 난 시간을 느릿하게 보내고 싶을 때 와인을 마신다. G가 친구들을 불러 모아 생일파티를 한 건 그 해가 마지막이었다. 외국계 회사에 다니던 G는 본사에서 일할 기회를 얻어 유럽에 살고 있다. 얼마 전 G와 영상통화를 하다가 그날 이야기를 나눴다. 


이번 반려길 산책을 함께한, 나의 반려신발 르무통 메이트 (라이트블루)


“좋은 기억이야. 나도 그날 모처럼 편안하고 즐거운 생일이었어. 어른의 생일이란 이런 건가, 싶은 파티였지.”


G는 어른의 생일을 보내고 이후로 더는 미룰 수 없는 진짜 어른의 삶에 진입했는데 오히려 그런 시간을 보내는 게 더 어렵다고 했다. 


G의 말대로 어른의 삶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먹고사는 게 녹록치 않다. 그래도 계절마다 꺼내 펼칠 좋았던 기억 한두 개씩 있으니 어른의 삶도 그리 나쁘기만 한 건 아니다. 인생의 풍요는 좋은 기억이 얼마나 많으냐가 아니라 그런 기억을 얼마나 잘 가꾸느냐에 달렸다고 생각한다. 5월이 되면 청담동 길을 괜히 한 번 걸어보고, 7월 9월 12월 그 계절의 좋았던 날을 추억해보는 것. 


오랜만에 온 청담동 주택가는, 10년 전의 고즈넉함을 그대로 지키고 있다


오랜만에 온 청담동 주택가는 여전하다. 사이사이 조금 높은 새 건물들이 들어섰지만 10년 전의 고즈넉함을 그대로 지키고 있다. 도심 한복판이라기에 한적한 교외의 리조트 같은 붉은 벽돌의 빌라는 꽤 오래된 건축물이다. 일부 동은 재건축을 앞두고 정리가 됐고 일부만 남았다. 


현대적 건물 사이에 이국적으로까지 보였던 특유의 분위기가 사라지는 게 아쉽지만 주민들에겐 반가운 일일 것이다. 이곳을 걸으면 사이사이 골목을 천천히 걷다가 작고 귀여운 청담은행나무공원을 둘러보고 근사한 카페에 앉아 커피를 한잔 하는 걸로 산책을 마무리했는데, 몇 해 전부터는 쭉 걸어나간다. 


초록이 가득했다


청담동 주택가를 벗어나 도산대로를 건너면 청담공원이 있다. 그 근처에서 점심약속이 있어 식사를 하고 길을 따라 걷다가 공원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는데, 순간이동을 한 듯 청담동이라는 이미지와 전혀 다른 느낌의 초록이 가득했다. 자꾸 잊는다. 무슨 무슨 이름이 주는 이미지에 갇혀 그곳이 사람 사는 곳이라는 걸. 


산책로를 걷다보면 그곳이 주민들에게 정말 소중한 반려길이겠구나 싶다


교외 지역의 공원과 비교하면 아담하지만 도시 한복판에 제법 큰 공원이다. 간단하게 스포츠를 즐길 수 있는 공간부터 산속 산책로까지 잘 갖춰져 있다. 어느 계절이든 마실 것 하나 가볍게 손에 들고 걷거나 쉬기 좋은 공간. 곱게 흙이 다져진 산책로를 걷다 보면 그곳이 주민들에게 정말 소중한 반려길이겠구나 싶다. 


오르고 내리고 숨이 차고 숨을 고르고


청담공원에서 잠시 휴식을 하고 다시 주택을 따라 걷는다. 가끔 만나는 오르막길이 잠시 걸음을 멈추게 하지만 그 너머 다시 완만한 길이 열린다. 오르고 내리고 숨이 차고 숨을 고르고, 반듯한 대로로 차를 몰아갈 때와 다른 길을 걸으며 삶을 생각한다. 오르고 내리고 숨이 차고 숨을 고르고.


축하하기 위해 모인 그날의 우리들처럼, 선하고 아름답다


부처님 오신 날이 있는 5월, 청담동 주택가를 관통해 닿은 봉은사 앞은 오색 연등이 가득하다. 등은 누군가의 안녕을 기원하는 것을 목표로 모여 있다. 축하하기 위해 모인 그날의 우리들처럼, 선하고 아름답다. 오색의 등을 바라보며 합장을 하고 몰래 기도를 남긴다. 이번 계절에도 두고두고 꺼내 즐길 예쁜 추억 하나 만들게 해 달라고. 좋은 삶의 재료는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걸 새삼 깨닫는 아, 푸르름 가득한 5월의 걷기. 



반려길이란?

길을 입양해서 가꾸며 평생을 돌보는 나의 반려길 프로젝트, 르무통이 시작합니다. 


* 나만의 반려길을 소개해주세요

댓글에 나만의 반려길을 소개해 주세요. 그 길을 사랑하고 아끼는 이유, 길의 위치, 역사, 길에 얽힌 이야기 등을 자유롭게 적어주세요. 에디터 L씨가 그 길을 소개합니다. 매주 3명의 당첨자를 선정해 르무통 공식몰 적립금 5만원과 르무통 매거진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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