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 시간 사이
봄빛은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아서
겹처마 아름다운 존덕정 근처 고양이가 지나간다. 천천히 우아한 속도로 햇빛이 떨어지는 흙길을 지나 폭신한 이끼를 밟고 꽃잎을 맞으며 걷는다. 숙종의 극진한 사랑을 받으며 임금과 함께 산책했다는 황금빛 고양이 금손이의 후손인가. 아니면 금손이와의 추억을 잊지 못하는 숙종의 현현인가. 꽁무니를 쫓으며 전하, 라고 부르니 정체를 들켰다는 듯 연못 옆으로 재빨리 자취를 감춘다.
세상의 컨텐츠들은 숙종을 희빈 장씨와의 에피소드만으로 소비했지만 후원에 오면 집사 숙종을 느낄 수 있다. 화가 많고 감정기복이 심했던 숙종을 잠시라도 평온하게 만들어주었을 금손이. 숙종이 세상을 떠난 날부터 스무날 식음전폐 산책 중 단곡만 하다 함께 별이 되었다는 금손이. 금손이를 사랑한 왕과 임금을 사랑한 고양이의 이야기가 있는, 창덕궁. 그러니까 창덕궁은 사랑이야기가 넘실대는 곳이다.
능수벚꽃나무의 꽃잎이 봄빛에 흐드러진다. 그 옆으로 몇백 년을 살아온 소나무들이 스탠드에 자리를 잡고 서 있다. 귀를 모으고 비밀이야기를 관람하는 관객처럼 집중하고 있는 그 나무들은 낙선재의 사랑이야기를 전부 다 알고 있겠지. 낙선재로 들어서면 조선 왕으로 7세에 최연소 즉위한 헌종이 경빈 김씨를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 지었다는 석복헌이 보인다. 선을 즐기는 곳이라는 뜻의 그곳은 사랑하지 않고 못 배길 것 같은 공간이다.
정교하게 다듬어진 각기 다른 문살과 모르는 척 숨어 사랑하는 이를 기다리기 좋은 방과 방 사이 둥근 만월문. 분명 수줍은 입맞춤을 나누었을 누마루! 당신을 만나기 전 첫눈에 반한다는 말 믿지 않았지만 이제 알게 됐다는 고백. 자신의 곁에 머물러 달라던 임금이기 이전 한 남자의 애타는 마음과 600일 만에 세상을 등진 남자를 60년간 그리워했던 여자의 그리움이 곳곳에 묻어 있다.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그들의 사랑이야기를 벚나무 가지 흔드는 바람에게 실어 전해줬으면. 그러니까 낙선재를 거닐면 사랑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 안달이 난다.
부용지의 연못가 까치가 날아오른다. 왕실의 비밀의 정원이라 불리는 후원. 궁궐 건물 뒷편에 있다고 해 후원이 됐다. 궁궐의 북쪽에 있어서 북원이라고도 하고, 왕족이나 초대받은 관리 이외에는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금지 구역이어서 금원, 궁궐의 안쪽에 있다고 해서 내원 왕의 정원이라는 의미로 상림원이라고 불렸지만 공식 명칭은 후원이다.
그 후원에 정조의 흔적이 가득하다. 들어서자마자 감탄을 자아내는 소나무 한 그루를 품은 작고 둥근 섬이 눈에 띈다. 그 섬을 안은 네모반듯한 연못 부용지 옆에 작은 누정이 있다. 숙종 때 택수재라 불리던 걸 다시 고쳐지으며 정조는 활짝 핀 연꽃이라는 의미로 부용정이라 이름 붙였다. 그곳에서 정조는 머리도 식히고 계절도 느끼고 가끔 비단 돛을 단 배를 띄워 낚싯대를 드리우기도 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전 국민이 다 아는 성가 덕임이를 생각했을 것이다. 사는 내내 암살의 위협에 자유롭지 못했던 출중한 임금 정조. 그는 외롭고 고독한 삶을 살았지만 지켜주고 싶은 사람, 곁에 있고 싶은 사람이 있어 버틸 수 있었다. 봄빛이 닿은 연초록 나뭇잎처럼 싱그러운 그녀가 마침내 자신의 청을 받아주었을 때 그의 마음은 어땠을까. 빛나던 그녀가 스산한 겨울 바람을 맞은 낙엽처럼 세상에서 사라져버렸을 때의 심정은 어땠을까. 그러니까 어느 계절이든 후원에 가면 정조와 의빈 성씨의 절절한 사랑이 배어있다.
연못 너머까지 빛이 쏟아진다. 끝나지 않은 정조의 흔적. 정조는 즉위 직후 부용지 북쪽 언덕 높은 곳에 아래층은 규장각, 윗층은 주합루라 불리는 2층 누각을 지었다. 규장각에는 역대 왕들의 글과 글씨, 초상화까지 모두 보관했고, 8만 권 이상의 책이 있었다. 연구의 장을 펼쳐놓았던 것이다. 그 주합루로 가려면 영화당을 거쳐야 한다. 영화당의 동쪽 정면에 춘당대라 부르는 넓은 마당이 펼쳐져 있다. 영화당은 부용지 근처에서 가장 오래된 곳으로 그곳에서 왕은 쉬기도 하고 춘당대에서 열리는 과거시험을 지켜보기도 했다.
춘당대시라 불리던 그 과거시험을 본 이들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장원으로 과거에 급제한 이몽룡이다. 그날의 시험 주제는 ‘춘당춘색 고금동(春塘春色 古今同) 춘당대의 봄빛은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다’였다. 아직 어린 도련님이던 몽룡이 고향에 두고 온 춘향을 생각하며 어떤 시를 지었을까? 몽룡은 허구의 인물이지만 떨리는 마음으로 붓을 대었을 몽룡을 상상해본다. 그러니까 따스한 공기가 가득한 창덕궁은 오래된 사랑이야기의 배경이기도 하다.
창덕궁은 1405년 태종 때 이궁으로 건립된 이후, 임진왜란과 여러 차례의 화재로 소실과 재건을 거쳤다. 그럼에도 이곳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자랑스러운 우리의 역사로 남아 있을 수 있는 데는 자연에 있다. 터를 밀고 중국의 건축을 본 따 지은 경복궁과 달리, 창덕궁은 구비구비 골짜기와 물이 흐르는 전형적인 우리네 지형을 그대로 살리며 지었다. 부서지고 다시 짓고 무너지고 다시 올리기를 반복하는 동안 전부 밀어버리고 반듯하게 만들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그 덕에 지금의 나도 땅의 모양대로 난 길을 따라 걸으며 사랑을 느끼는 기쁨을 얻는다.
사랑해본지 하도 오래라 사랑이야기를 쓸 수 없게 됐다는 후배와 다녀온 창덕궁의 길. 나의 것이었으면 하고 욕심부리게 되는 길. 그 길 위에 소문난 사랑만 여러 개. 작지만 결코 작지 않고 소박하지만 분명 뜨거웠을 알려지지 않은 사랑들도 그 길을 지났겠지.
담벼락 아래서, 옆으로 난 작은 문 위에서, 달빛에 빛나던 매화나무 밑에서, 후원이 펼쳐지는 네 개의 골짜기의 물과 나무와 돌과 바람 사이사이 얼마나 많은 사랑이 있었을까. 가만히 흙길을 걷다 보면 이내 발끝에 닿는 오래된 아름다운 것들처럼 오래도록 식지 않을 사랑들이 여기저기 피어났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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