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운 과거 가까운 미래
그 사이의 오늘
“오늘은 전포동에 가보려고요.”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린다. 얼마 전부터 어느 뮤지션의 유튜브 채널을 구독하고 있다. 자신만의 루틴과 일탈을 번갈아 소개하는데 자극적이지 않아 눈도 귀도 편안하다. 모두가 자신의 채널을 가진 시대, 내게 맞는 채널을 만나는 건 정말 반가운 일이다. 그가 전포동을 소개한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고향 부산에 내려갈 때면 서울 살이로 알지 못했던 새로운 장소들을 찾아낸다. 로컬이지만 로컬이 아닌, SNS에 기대 갈 곳을 찾는 이방인보다는 조금 더 확실한 정보로 갈 만한 곳을 소개한다. 그 덕에 나도 로컬이 아니지만 로컬인 듯 부산에 다녀왔다.
부산역에 도착하면 항상 비슷한 경로를 따라 움직였었다. 역사를 빠져나와 택시 승강장으로 가 tj 택시를 타고 해운대로, 해운대 숙소에 짐을 풀고 해운대, 광안리, 달맞이고개, 청사포 라인으로 오고갔다. 그 익숙한 풍경이 나에게는 부산의 전부였고 부산을 찾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번엔 좀 달랐으면 했다. 자꾸 익숙한 것에 매몰되는 나에게 여행이 가진 ‘탐험’이라는 미덕을 다시 일깨우고 싶었다. 일면식도 없지만 영상을 보며 친근해진 뮤지션이 말했던 전포동을 여행지로 정해놓고 부산 출신 친구에게 연락했다.
“내 부산간다, 아이가.”
나의 어설픈 사투리에 친구도 어설픈 표준말로 대답했다. 본인은 절대 사투리를 쓰지 않는 거라고 주장하는, 소리의 높낮이가 그대로 남아있는 누가 봐도 부산 사투리인 귀여운 말투.
“부산 사투리 엉망이시네요. 그냥 편하게 이야기하세요.”
서로를 한껏 비웃으며 한바탕 웃음을 터뜨린 뒤 전포동에 대해 물었다. 이번에는 전포동에 다녀오려는데 전포동은 어떤 곳이냐, 그곳에서 놀아본 적이 있냐는 말에 친구의 억양이 다시 올라갔다. 친구는 전포동은 예로부터 그냥 지나는 길이었다고 했다. 서면에서 놀기 위해 지나쳐 가는 길, 그 정도의 이미지였다고.
“많이 바뀌었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나도 아직 한 번도 안 가 봤다.”
전포동 사잇길은 이국적이었다. 한때 공구상가로 쓰였던 건물 사이사이 다양한 디저트를 파는 카페며 음식점, 네일샵, 잡화점, 옷가게가 들어서 있었다. 건물 지하나 2층엔 구제의류샵이 있었는데 오래된 건물 특유의 서늘한 시멘트 냄새가 풍겼다. 지하 공간을 따라 구제옷가게가 끝없이 늘어서 있던 런던 브릭레인의 건물 같았다. 골목을 이어 연결된 카페들은 런던의 소호 뒷골목 느낌이었다.
개성있는 작은 상점들이 반짝이는 알전구를 걸고 시선을 사로잡던. 작은 상점과 어느 귀여운 수제 디저트집은 아메리카풍이었고 이어진 골목의 맨 안쪽의 쌀국수집은 동남아시아의 열기까지 옮겨놓은 듯했다. 건물과 건물이 선 사이 좁은 골목, 예전엔 자전거나 오토바이 한 대쯤 지나갔을 법한 골목으로 카페들이 저마다 창을 내고 야외의자를 설치해놓은 모습은 딱 이국의 휴양지 모습이었다. 가까운 미래로 미뤄뒀던 먼 나라에 도착한 느낌.
가까운 미래를 지나면 가까운 과거가 펼쳐졌다. 오래된 작은 공장과 오래된 전파사와 오래된 공구가게와 그들이 얼마나 오래됐는지 알려주는 조금 비틀어져 반쯤 내려온 셔터와 시대를 가늠하게 하는 이젠 잘 쓰지 않는 예전 서체로 쓰인 간판.
아주 먼 옛날이 아니라 얼마 전, 기억하고 가늠할 수 있는 시간이 그곳에 남아 있었다. 새 책의 사이사이 끼워진 헌책 같은 풍경. 책장에서 여러 번 읽고 또 읽어도 질리지 않은 헌책을 꺼내 읽듯 그 풍경을 바라봤다. 사라지지 않고 그 페이지에 그대로 남아 있는 밑줄 그은 문장 같은 삶이 아직 존재했다.
아직 문이 열린 전파사, 이제 쓰는 사람이 있을까 싶은 브라운관과 라디오와 두꺼운 모니터가 얼핏 보이는 그곳. 작은 것을 자세히 보게 해주는 작은 스탠드를 켜고 크고 작은 문제들을 해결하던 손은 이제 무얼할까. 여전히 무언가를 고치고 있는 걸까. 둘러보면 둘러볼수록 전포동은 보이지 않는 손자국이 가득한 곳이었다. 가까운 과거를 완성한 손과 가까운 미래를 만들어 낸 손.
과거를 완성한 손과 미래를 보여주는 손 사이에 오늘 전포동을 찾은 다양한 사람들의 손이 골목을 채웠다. 다른 세계를 뚝 떼어놓은 듯한 공간의 구석구석에서 사람들이 자신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어떤 손은 먹기 좋게 음식을 자르고, 어떤 손은 커피 잔을 쥐고 여유의 시간을 만끽한다.
어떤 손은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고 어떤 손은 스마트폰을 만지며 주문한 음식을 먹는다. 먼저 와 있던 어떤 손은 크게 흔들며 문을 밀고 들어오는 친구를 반기고, 어떤 손은 천천히 흔들리며 이별한다. 어떤 손은 눈물을 닦아주고, 어떤 손은 등을 두드려주고, 어떤 손과 손은 서로 맞잡고 온기를 나눴다.
테이크아웃한 커피를 한잔 들고 바둑판처럼 나뉜 넓지 않은 구역의 길지 않은 골목들을 여러 번 반복해 걸었다. 걸을 때마다 손들의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그 풍경에 섞여 풍경의 일부가 되어 걷는 것은 무척 즐거운 일이었다.
어떤 것은 사라졌고, 어떤 것은 살아남았다. 헌책과 새책이 공존하는, 언젠가 다시 읽고 싶고 읽어도 읽어도 지루하지 않은 헌책과 지금의 나에게 영감을 주는 새로운 책이 가득한 책장 같은 곳. 전포동은 그런 곳이었다.
친구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내 부산이다”
어설픈 나의 사투리에 친구는 지긋지긋하다며 전포동 관람기를 들려달라고 했다.
“여긴 손을 잡고 걸어야 하는 곳이야. 잡은 손을 놓지 않고 걷고 또 걸어야 하는 곳.”
조용하던 곳인데 신기하다는 친구와 가까운 미래에 가까운 과거의 이야기를 나누러 오기로 했다.
뮤지션의 유튜브 채널에 새로운 영상이 올라왔다는 알람이 울렸다. 좋아요를 누르는 것으로 새로운 장소를 소개해준 그에게 고마움을 남겼다. 가까운 미래 그의 채널도 전포동처럼 왁자해졌으면, 아니 그 전에 여러분, 반려길 브런치 L의 글에 댓글 많이 부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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