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몸에 사랑을 가득 품고
내 운명을 구원한 너에게
자라섬은 강아지와 함께 하는 산책 코스로 정말 최고다. 잘 가꾼 넓은 잔디밭이 여기저기 있고 섬의 지형을 따라 나무와 꽃과 얕은 동산과 돌길을 번갈아 걸을 수 있다. 옆구리에 강 풍경을 끼고! 자라섬에 갈 때면 공을 챙겨간다. 가끔은 운 좋게 에너지 넘치는 강아지와 실컷 공놀이를 할 수도 있다. 오프리시는 불가하므로 길고 긴 리드줄을 몸에 걸고!
자라섬은 둘레를 둘레둘레 걷기만 해도 좋다. 벌써 더운 기가 올라오는 5월, 강아지는 혀를 길게 빼고 자라섬을 누빈다. 길고 넓게 걸을 수 있는 곳, 자라섬에서 양껏 걷고 뛰는 나의 강아지를 볼 때마다 운명에 대해 생각한다.
처음 만났을 때 강아지의 추정 나이는 7살이었다. 의사는 강아지의 길고 부드러운 입술을 들어 치아를 확인하며 말했다. 정확하진 않지만 7살즈음 되어 보여요. 더 어릴 수도 혹은 나이를 더 많이 먹었을 수 있지만 그 언저리일 겁니다. 7살 강아지, 어느 날 갑자기 동네를 떠돌아 다니던 강아지. 도대체 어디서 왔을까?
때에 절은 붉은 줄무늬의 목줄을 하고 있었는데 목줄을 채웠던 사람은 왜 강아지를 놓아버린 걸까. 목욕으로 해결되지 않을 정도로 엉키고 뭉친 털을 잘라내며 생각했다. 우리 강아지는 몇 명의 주인을 거쳤을까? 단 한 명에게 버림 받은 거였다면 차라리 마음이 덜 아플텐데, 새로운 보금자리를 만나고 쫓겨나고 만나고 쫓겨나는 걸 반복하진 않았겠지.
떠돌던 강아지도 훌륭한 집강아지가 될 수 있다고, 20kg이 넘는 강아지도 충분히 집안에서 함께 지낼 수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우리 강아지의 히스토리를 이야기할 때마다 TV프로그램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오래 살지 못할 거라는 수의사 선생님의 말을 듣지 못하도록 키우던 강아지의 귀를 막던 할머니의 손. 미안해, 자꾸 너의 아픈 이야기를 소문내서. 하지만 옛일 따위 다 잊고 신나게 뛰어 노는 최고로 멋진 강아지의 모습을 보고 또 다른 멋진 강아지 친구가 신나는 견생을 살 수 있게 될지도 모르는 거니까, 좀 봐줘.
구조되어 집에 왔을 때 강아지는 혹시 자기를 해치는 건 아닌지 호시탐탐 낯선 환경에서 탈출하려고 했다. 함께 살게 되면서 가장 먼저 한 일은 강아지를 안심시키는 것이었다. 괜찮아, 다 괜찮아, 널 아프게 하지 않을 거야. 괜찮아, 다 괜찮아, 이제 우리 잘 해보자.
집 안과 밖을 구분하는 것, 집 안은 절대 배변하는 장소가 아니라는 걸 익힐 때까지 우리 둘 다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래서 그렇게 큰 개는 밖에서 키워야 한다, 는 참견을 들을 때면 귀를 꼭 막고 입을 꾹 닫았다. 괜찮아질거야, 좋아지겠지, 잘 할 수 있어, 믿어준 대로 강아지는 조금씩 적응해갔다. 밥 때를 기다리고, 간식을 요구하고,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꼬리를 흔들면 반겨줬다. 그러다가… 뒷다리 사이로 말려 들어갔던 강아지의 꼬리가 조금씩 펴지다가 마침내 하늘을 향해 쭉 뻗어 360도 빙그르르 돌았던 날 꼬리가 없는 나는 고마운 마음을 표현할 길 없어 그저 껑충껑충 뛰기만 했다. 뛰면서 다시는 네가 혼자 있을 일은 없을 거라고 이제 너의 운명은 안정기에 접어들었다고 소리쳤다.
운명에 대해 생각한다. 강아지를 만나기 전이었다. 술자리에서 명리학을 공부했다는 누군가에게 내 사주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생년월일시를 말하고 눈을 반짝이며 의자를 당겨 앉았지만 좀처럼 그의 입은 열리지 않았다. 애플리케이션에 사주정보를 입력하던 그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음, L 씨의 사주는… 이라는 말을 어찌나 천천히 하던지. 왜요, 별로야? 아뇨 아뇨, 그렇진 않아요.
그는 결심했다는 듯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라는 사람은 나무에 비유할 수 있다고 했다. 나무 중에서도 바위를 뚫고 자라난, 바위 위의 멋지고 큰 소나무라고. 술자리에 있던 친구들이 오~ 하고 탄성을 보내왔다. 바위 위의 멋지고 큰 소나무, 근사하다는 친구들의 말 사이로 문제는, 이라며 사주를 본 그가 말을 이었다. 문제는 외롭다는 거예요. 숲 속의 나무도 아니고 들판의 나무도 아니고 바위 위라, 외로워요. 외롭다는 말에 내가 한숨을 쉬고 술을 들이켜자 그가 다급하게 말했다. 외로운 건 나쁜 게 아니에요. 그리고 바위 위의 나무를 누군가 발견하면 그걸로 끝이에요. 멋진 나무가 있다는 소문이 나면 사람들이 엄청 드나들거든요.
그날밤 집으로 돌아오면서 괜히 눈물이 났다. 혼자 있는 걸 즐기며 산다고 생각했는데 외로움이 운명이라고 하니 사무치게 외로워졌다. 갑자기 험준한 산등성이, 오르지도 내려가지도 못하는 단단한 바위 위에 선 기분이었다. 나는 왜 하필 그 해, 그 달, 그 날, 그 시간에 태어나 이렇게 외로운 것인가, 억울하고 화가 나서 편의점에 들러 술을 샀다. 씻지도 않고 주저 앉아 500ml 맥주캔을 따서 노트북을 열었다.
메일함 속 먼 곳에 사는 친구들과 주고받았던 편지를 다시 읽고, 업로드했던 SNS의 사진들을 하나하나 살펴봤다. 내가, 외로운가? 알고보니 나는 외로웠던가? 신기하게도 갑자기 사무치게 외로웠다. 그날 아침까지만 해도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 고즈넉한 내 삶에 대만족이었는데. 나이를 먹고 속을 다 내어보여도 괜찮을 친구들이 하나 둘 자신의 삶을 만들어 떠나고, 나의 생을 온전히 책임지기 위해 고군분투 하는 동안, 괜찮다고 아무렇지 않다고 지나쳤는데 아니었구나. 곱게 포장해 마음 한쪽 구석에 잘 숨겨놨던 외로움이 갑자기 제 모습을 드러냈다.
그날 이후 나는 때때로 외로웠다. 전에는 외로움이라고 느끼지 못했던 것들도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차라리 듣지 않았더라면, 모르고 살았더라면 좋았을 걸. 괜히 그런 건 왜 물어서 스스로를 볶아대고 있나 후회를 하는 날이 잦아지던 그 즈음 강아지가 내 삶 속으로 들어 왔다. 강아지를 돌보느라 나는 내 팔자고 운명이고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자고 일어나면 강아지가 마킹해 놓은 패드를 빨고, 집안에 싼 똥을 치우고, 밥을 먹이고 씻기고 산책하고 또 산책하고 또 산책을 하고. 강아지와 있느라 사람들로부터 고립되었지만 사람에 싸여 있을 때보다 덜 외로웠다.
어느 날 강아지와 자라섬에 산책을 나가 긴 리드줄을 매고 공놀이를 했다. 강아지는 귀를 펄럭이며 천천히 걸어와 입에 문 공을 내 발 아래 떨어뜨리길 반복했다. 나는 그 때마다 두 팔을 벌렸고, 강아지의 얼굴을 잡고 뽀뽀를 쪽, 했다. 꼬리를 360도 빙글빙글 돌리며 눈 맞추는 강아지를 쓰다듬으며 알았다.
이 녀석이 살아 있는 한 나는 외로울 일은 없을 것이다. 강아지를 구해줬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강아지는 자신의 운명을 걸고 온 힘을 다해 바위 위에 위태롭게 서 있는 나를 찾아와 준 것이었다. 온몸에 사랑을 가득 품고서.
그런 강아지를 위해 자라섬을 찾는다. 너른 초록의 기운을 흠뻑 받으며 충만한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내 외로움의 부스러기를 가뿐하게 쓸어내주는 나의 데스티니, 오늘도 걱정없이 꿀잠자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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