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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르무통 LeMouton May 31. 2024

푸르른 청춘과, 신록의 계절 5월


춘천의 오월

청춘의 시간 속으로  


스무살 무렵 강원대학교 후문에 있던 O의 자취방은 나의 피난처였다


스무살 무렵 강원대학교 후문에 있던 O의 자취방은 나의 피난처였다. 성인이 되면서 고분고분 말 잘 듣던 딸에서 희대의 반항아로 거듭난 당시의 나는 엄마의 잔소리라면 단 한마디도 듣지 않으려 했다. 성에 찰 만큼 우수한 성과를 가져오진 못해도 하라는 대로 말 잘 듣던 딸이 대학에 가고 갑자기 돌변하자 엄마는 위기를 느낀 것 같았다. 사사건건 잔소리를 하며 기선을 제압하려 했다. 현관에서 신발을 신는 그 잠깐의 시간도 놓치지 않았다. 옷차림을 지적하고 향수의 향까지 나무랄 정도였다. 어른이 됐다고 생각한 나는 그런 간섭에 결코 참지 않았다. 현관문을 쾅, 하고 닫은 건 스무살이 되어서 처음이었다. 이왕 하는 반항, 외박을 해버릴거야. 마음 먹은 것도.


이번 반려길 산책을 함께한, 나의 반려신발 르무통 메이트 (블랙)


관계라는 게 참 재미있어서 가깝다가도 문득 멀어지기도 하고 그리 애틋하지 않았는데 길고 오래 지속되기도 한다. 사실 O와 나는 고등학생 기준의 절친은 아니었다. 고등학교 3년 내내 같은 반도 아니었다. 처음 인사를 나눈 건 2학년 때였다. 성격이 밝고 유쾌한 O의 이야기를 많이 들은터라 O의 반에 친구를 만나러 갔다가 “안녕”하고 먼저 말을 걸었다. “안녕!” 경쾌한 답이 돌아왔고 가끔 친구를 보러 O의 반에 놀러 갈 때마다 말을 섞는 시간이 길어지곤 했다. 그러다 결정적으로 친해진 계기가 있었는데.


이번 반려길 산책을 함께한, 나의 반려신발 르무통 메이트 (블랙)


우리는 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다. 찰랑찰랑까지는 바라지도 않는 숨이 좀 죽기만 해도 감사하고 지내볼 것 같은 곱슬머리. 이 제멋대로인 머리카락을 어떻게 예쁘게 만들까로 O와 나는 자주 정보를 교환했다. 그러던 어느 날 O가 서로 스트레이트 파마를 해주는 게 어떠느냐고 제안을 했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미용실에 가서 파마를 하기에 고등학생의 용돈은 매우 소박했고, 명절날 생긴 가욋돈은 덕질에 쓰기에도 빠듯했다. O가 부모님이 맞벌이 중이라 귀찮은 동생만 치우면 집이 빈다며 주말에 자기 집으로 오라고 했다. 그렇게 서로 사이좋게 뚜꺼운 종이를 대고 서로 스트레이트 파마를 해줬다. 서툰 솜씨고 약이 좋지도 않아서 중간중간 서로의 머리카락을 많이 끊어먹었지만 찰랑이는 생머리를 갖게 된 것만으로 만족했다. 


서로의 머리를 감겨주면서 많이 가까워졌다


O의 집 욕실은 세탁기가 변기 옆에 있는 널찍한 편이었다. 세면대 옆 아래쪽에 수도꼭지가 하나 더 있었는데 그 아래에는 큼직하고 빨간 고무대야가 있고 호스를 통해 계속해서 물이 공급되고 있었다. 우리는 그 샘물 같은 수도꼭지에서 앞에 주저앉아 엉덩이를 반쯤 들고 짧은 호스를 들어 서로의 머리를 감겨주면서 많이 가까워졌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O를 만나러 춘천에 가게 될 줄은 몰랐다


생머리 변신은 한 번으로 만족해야 했다. 곧 겨울 방학을 맞았고, 긴 겨울이 지나면 고3이 될 운명이었다. 고3에게 스트레이트 파마는 어울리는 단어가 아니었다. 특히 O는 공부를 열심히 하는 모범생이었다. 궁금했는데 한 번 해봤으니 더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고 말했다. 나는 다시 생머리를 찰랑이고 싶었으나 O의 말에 수긍했다. 그렇게 곱슬머리를 질끈 묶고 1년이 지났고 졸업을 하고 각자 합격한 대학으로 흩어졌다. O는 강원대학교에 합격했고, 부모님께 학비 걱정 덜어드리려고 국립대를 지원했는데 자취를 하느라 오히려 더 부담을 지우게 됐다는 어른스러운 말을 하며 춘천으로 떠났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O를 만나러 춘천에 가게 될 줄은 몰랐다. 


뒤늦은 반항심에 집을 나와 O에게 전화를 했을 때 O는 반색했다. 당장 오라고, 걱정 말고 오라고 했다. 춘천 가는 기차를 타고 MP3에 담아둔 김현철의 춘천 가는 기차를 들었다. 춘천 가는 기차는 나를 데리고 가네, 오월의 내 사랑이 숨 쉬는 곳. 흥얼흥얼 노래를 따라하며 초록으로 가득한 창밖 풍경을 바라봤다. 오월의 사랑을 찾아 떠나는 건 아니었지만 내 친구가 숨 쉬고 있는 오월의 춘천으로 가는 길은 싱그러웠다. 


강원대 후문 저 안쪽에서 어설프게 화장을 한 O가 손을 흔들었다


강원대 후문 저 안쪽에서 어설프게 화장을 한 O가 손을 흔들었다. 나는 당장 거울을 보고 싶었다. 화장한 내 얼굴도 저렇게 어색할지 궁금했다. 어설픈 화장이었지만 가방을 메고 두꺼운 전공서적을 한팔에 안고 있는 O는 제법 대학생 같긴 했다. 졸업한 지 석 달 지났을 뿐인데 스물의 시간은 너무 빨랐고 석 달 만에 우리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고 있었다. 


O의 자취방은 빌라의 반지하였다. 방 하나 아담한 거실 하나 화장실 하나. 작지만 완벽한 자기만의 공간을 가진 O가 부러웠다. 아무도 간섭할 사람 없는 O의 자취방에서 우리는 진짜 어른이 된 것처럼 밥을 해먹고 술을 마셨다. 성적이나 기껏해야 스트레이트 파마를 해야 하는 곱슬머리 걱정을 하던 우리는 사랑과 스스로를 부양해 나가야 할 앞날에 대해 밤이 깊도록 이야기를 나눴다. 


그 연못에 빠지면 온몸에 독이 오른대


다음 날 아침 수업 다녀올 테니 쉬고 있으라는 O를 따라 일어나 나가려는 O를 불러세웠다. 우리 서로 눈썹을 그려주자! 원래 눈이 짝짝이라 눈썹도 살짝 비대칭인 나는 지금도 눈썹을 제대로 그리지 못하는데 그땐 더 가관이었다. 평생 눈썹 한 번 그려본 적 없는 모범생 O는, 말해서 무엇하랴. 그녀는 비대칭이 문제가 아니라 뭐랄까 눈썹 앞머리를 지나치게 인위적으로 당겨 그려 지나치게 도드라졌다. 우리는 엉덩이를 치켜들고 거품이 잔뜩 난 머리카락을 헹궈주던 그때처럼 서로의 눈썹을 보고 깔깔깔 웃으며 우리가 조금 더 예뻐지도록 최선을 다했다. 


새로운 눈썹으로 한결 부드러워진 인상의 O가 오전 수업만 하면 되니 심심하면 학교 주변을 걸어보라고 했다. 학교 안에 커다란 연못이 있는데 일단 그곳을 한 바퀴 둘러보고, 연못가 벤치에 앉아 책도 읽으라며 나를 부추겼다. 조심해야 해, 그 연못에 빠지면 온몸에 독이 오른대. O는 깔깔 웃으며 실제로 독이 올랐다는 선배의 선배의 선배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들려줬다. 혼자 있기도 심심하고 정성껏 그린 눈썹이 아까워 나는 O와 함께 자취방을 나섰다. 


이번 반려길 산책을 함께한, 나의 반려신발 르무통 메이트 (블랙)


O를 강의실까지 배웅해주고 연적지 앞에서 깊은 연못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캠퍼스 안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수업에 들어가느라 분주한 학생들이 나를 지나쳐갔다. 넓고 넓은 캠퍼스를 걸으며 나는 왜 이곳에 있는가 싶었다. 갑자기 학교에 가고 싶어졌다. 석 달 열흘 춘천에 숨어지내며 엄마 애간장을 태우겠다는 어이없는 결심은 또래들의 바쁜 모습에 스르르 사라져버렸다. 수업을 끝낸 O와 점심을 먹고 짐을 챙겨 다시 기차를 탔다. 왜 벌써 가느냐는 O에게, 그래야 네가 다음에도 날 반겨줄 거라고 했더니 O는 웃으며 크게 손을 흔들었다.


아마 그 후로도 두서너 번 도망치고 싶을 때면 춘천 가는 기차를 타고 O의 자취방을 찾았던 걸로 기억한다. 그 새 내 생활도 달라져 엄마와의 다툼이라기보다 미래에 대한 걱정에 숨이 막히거나 사랑에 실패했을 때 춘천으로 달려갔다. 눈썹 문신으로 더 이상 그릴 필요가 없게 된 세련된 선배가 된 O와 비슷한 고민을 나누고 소주에 닭갈비를 먹고 푸르름이 드넓게 펼쳐진 강원대학교 캠퍼스를 걸으면 모든 게 조금 나아지곤 했다. 


이번 반려길 산책을 함께한, 나의 반려신발 르무통 메이트 (블랙)


그리하여 나에게 춘천은 내 청춘의 상징 중 하나가 됐는데 그래서 오월의 신록이 싱그러워질 때면 강원대를 찾는다. 리모델링도 하고 새 건물이 들어서면서 O와 나의 청춘이 머물던 때와 사뭇 달라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크고 넓고 자연이 가득하다. 처음 그랬던 것처럼 연못 연적지에서 걷기를 시작한다. 운동장을 지나고 율곡관을 지나 집 현관을 거쳐 얼마 전 새로 지은 중앙도서관과 광장을 지나 다시 연적지까지. 


숨 돌릴 시간, 잠시 벗어나서 모든 걸 잊을 수 있었던 공간


그 사이사이 숲길을 들리며 천천히 걸어 1시간 정도 걸리는 산책길. 그 길을 걷다 보면 바쁜 청춘들이 스쳐 지나간다. 어떤 고민과 어떤 생각으로 그곳을 지나고 있을까? 그들에게 학교의 캠퍼스가 청춘을 지켜낼 힘을 주는 믿음직한 반려길이길 바란다. 


춘천은, 강원대 캠퍼스는 내게 어떤 것도 묻지 않고 당장 오라고 반겼던 O의 마음이다. 숨 돌릴 시간, 잠시 벗어나서 모든 걸 잊을 수 있었던 공간. 이제는 서울에 살고 있는 O에게 오랜만에 전화를 걸어야겠다. 




반려길이란?

길을 입양해서 가꾸며 평생을 돌보는 나의 반려길 프로젝트, 르무통이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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