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마다의 일기가 쓰여지는 곳 양재천에서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하여
걸을 때마다 다른 풍경이 펼쳐지는 어떤 길은 허구로 쓰인 길고 긴 소설 같고, 주변의 풍경이 응축된 단촐한 어떤 길은 짧고 깊은 시와 같다. 양재천을 책으로 비유하자면 여럿이 함께 쓰는 일기장이 아닐까. 커다란 빈 노트를 공유하며 매일 각자의 기분을 솔직하게 적어낸 일기장. 물과 숲과 테라스를 활짝 열어둔 카페와 유리창 밖까지 존재감을 뿜어내는 디자인 숍과 골목골목 숨어 있는 크고 작은 일터. 삶과 일과 휴식이 서로 만나고 부딪히고 교차하며 지나가는 곳, 양재천 주변 길을 걸으며 쓴 오늘의 일기.
모처럼 양재천이다. 도심 한가운데, 언제든 지날 수 있는 곳이라 오히려 조금 소홀했던 반려길에 들렀다. 양재천 주변을 걸으면서 저 사람은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내고 있을까, 일기장에 어떤 내용을 쓸까 생각하며 사람들을 관찰하다보면 시간이 훌쩍 지나있곤 한다.
폴딩 도어를 활짝 열고 테라스를 개방한 카페에 앉아 책을 읽는 사람은 재택근무가 가능한 직업일까? 근처 스타트업의 직원일까? 잠시 일을 쉬는 중일까? 디자인 숍에 들어가고 있는 중년 여인은 어떤 물건을 사러 가는 것일까? 강아지와 산책을 나온 남자와 강아지는 이곳을 몇 번이나 걸었을까? 언니와 함께 도도도도도 달리듯 걸어오는 작은 강아지 두 마리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는 어디일까? 그들의 일기장에 어떤 이야기가 쓰일까? 산책도 할 겸 잠시 쉬러 다녀와야지 하고 찾았다가 쓸데없는 생각을 하느라 반나절을 통째로 보내기 일쑤인 양재천에 여름으로 향하는 햇살이 가득하다.
양재천을 찾은 날 나의 일기는 대부분 타인의 삶에 대한 상상과 공상에 대한 내용이지만 6월, 오늘의 주제는 ‘쓰레기’이다. 연재를 시작하며 한번 털어놓았지만 쓰레기 강박이 있다. 내가 버린 것들이 태평양 바다를 둥둥 떠다니는 것에 대한 공포 때문에 낡은 소파도 바꾸지 않는다. 가전제품도 고치다 고치다 수명을 다할 때까지 쓴다. 한번 내 손에 들어오면 쉽게 놔버리지 못한다.
이런 습관은 대부분 긍정적으로 발휘되지만 때론 곤란해지기도 한다. 물건이 위생과 연결될 때, 아 이럴 땐 정말 어찌해야 하는지. 가령 적어도 1년에 한 번 수건을 바꿔야 한다는 말에 수건을 바꾸는데 기존의 수건을 버리지 못해 발수건, 걸레만 수십장이다. 강아지 외출용, 강아지 방석커버용, 강아지 목욕용, 세차용, 피크닉용 깔개로 나름의 재활용을 하고 있는데 이게 과연 맞는 건지 싶다.
무엇보다 요리할 때! 골고루 잘 무쳐야 하는 나물반찬이나 국수 같은 것들을 비빌 때는 비닐 혹은 라텍스 장갑을 끼고 조물조물 양념이 배게 해야 하는데 나는 늘 젓가락을 사용한다. 맨손으로 하자니 결국 세제를 쭉 짜서 거품을 내 손을 씻는 행위가 오염수를 만드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젓가락 두 짝을 양손에 잡고 설렁설렁 뒤적뒤적 대충대충한다. 가뜩이나 같은 재료로 맛없게 만들기 1등인데 안타깝기가 그지없다.
뭐 어차피 반찬을 만드는 일이 잦은 건 아니다. 문제는 배달 혹은 테이크아웃 음식이다. 플라스틱 그릇에 플라스틱 뚜껑을 씌우고 플라스틱 숟가락이나 포크와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물티슈가 들어 있는 비닐봉투를 볼 때마다 스트레스가 잔뜩 쌓인다. 이걸 어쩌나 싶고 앞이 캄캄하다. 그게 싫어 용기를 들고 다니며 테이크아웃을 해보지만 적지 않은 곳에서 미리 따로 용기에 담아두었기 때문에 안된다거나 사이즈가 맞지 않아 안 된다며 거절을 당하기도 한다.
오늘도 양재천에 오기 전 김밥집에 들렀었다. 도시락통을 가지고 가서 김밥 2줄을 넣어달라고 부탁했다. (한 줄로는 배가 차지 않는다) 김밥을 말아 썰던 직원이 규격에 맞춘 박스에 넣어야 하기 때문에 곤란하다고 했다. (아 스트레스) 어쩔 수 없이 그렇다면 쿠킹포일에 싸달라고 하니 마지못해 그렇게 해줬다. 텀블러에 미리 담아온 녹차로 목을 축이고 도시락통에 담긴 김밥(2줄)을 먹으며 여름과 관련된 책을 읽는 게 목표였는데, 그게 살짝 어긋나버렸다. 알맹이가 사라지고 외롭게 남은 은색의 쿠킹포일을 둥글게 뭉치며 단출하게 더 단출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나의 흔적이 어디에도 남지 않는 삶. 매 순간 쓰레기를 배출할 수밖에 없는 현대인에게 그것은 불가능한 꿈이다. 나의 흔적이 내 눈앞에 보이지 않더라도 어딘가에 분명히 존재할 테니까.
환경운동가에게 바닷가 쓰레기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었다.
“바닷가에 쓰레기가 떠다니는 게 일부러 버려서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만도 않아요. 강풍이나 태풍에 날아가고 휩쓸려서 쓰레기가 되기도 하거든요. 어부들은 그물망을 고쳐 쓰지 함부로 버리지 않아요. 일부러 버린 물건들이 없지 않겠지만 많은 쓰레기들이 부주의해서 생겨요. 여행객들이 무심코 놓은 종이컵이나 빈 병이 바람에 날아가기도 하고. 쓰레기봉투 위에 아슬아슬하게 올려놓은 과자봉지가 날아가기도 하고. 바람 탓을 하기엔 좀 미안한 일이지만 바람이 쓸어가는 일이 적지 않아요.”
바람에게 미안하지만 그녀는 쓰레기를 보면 누군가의 모자란 행동이라고 생각하기보다 바람이 심술을 부린 거겠지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쓰레기를 줍는 것도 화나지 않고, 바다 위의 쓰레기를 보고도 한숨이 덜 나온다면서. 양재천 주변은 비교적 깨끗하게 관리되고 있는데도 가끔 쓰레기들이 보이곤 했는데 그 또한 바람의 장난이었을지 모르겠다. 내용물을 채우지 않고 아슬아슬하게 옆에 세워 둔 종이컵이나 휴지 조각을 장난꾸러기 바람이 날려 보낸 걸지도.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가방에서 휴대용 쓰레기봉투를 꺼냈다. 언젠가 옷을 샀더니 넣어준 봉투를 잘 접어서 가지고 다닌다. 코팅이 된 튼튼한 봉투였다. 바로 버렸다면 그대로 쓰레기가 되었겠지만 쓰레기를 담는 봉투로 재탄생해 열심히 제 역할을 하고 있는 나의 애정을 듬뿍 받는 소지품이다.
쓰레기봉투에 김밥을 쌌던 쿠킹포일을 넣고 어느 벤치 옆에 떨어진 종이컵이나 솔가지 사이에 숨어 있는 마른 물티슈 같은 바람의 장난으로 길을 잃은 쓰레기들도 주워넣었다. 바람의 장난이라고 생각하니 쓰레기를 줍는 것이 누군가의 실수를 어루만지는 일이 됐다. 쓰레기를 주우며 나의 실수도 누군가가 어루만져 줄 거라 기대한다. 우리가 서로서로 실수를 쓸어 담아 준다면 세상은 좀 더 깨끗해지겠지.
쓰레기를 수습하고 기분 좋은 포만감을 느끼면서 그늘에 앉아 책을 읽었다. 김연수 작가의 <너무나 많은 여름이>는 다정하고 따뜻한 이야기로 가득했다. 나는 그중 이 구절에 밑줄을 그었다.
“지금까지 우리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야. 과거는 다 잊어버리자. 내가 어떤 집에서 태어났고, 어떤 사람이었는지, 누구를 만나 사랑했고, 어떤 꿈을 가졌었는지는 다 잊어버리자. 대신에 오로지 미래만을 생각하기로 해. 이제까지는 과거가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면, 앞으로는 미래가 지금의 나를 만들 수 있도록 말야.”
오늘의 양재천 일기는 쓰레기로 시작해 희망으로 마무리한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보다 중요한 건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말 잊지 말고 기억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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