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르무통 LeMouton Jun 21. 2024

새롭게 나아갈 웅대한 꿈을 꾸던 곳, 공산성의 산책길

꿈이 함락된 우리에게

다시 시작할 용기를 

밤과 꿈이 있는 공주의 길 


이번 반려길 산책을 함께한, 나의 반려신발 르무통 메이트(그레이)


왜 하필 공주냐고 물었다. 전국의 그 수많은 곳 중 왜 공주였을까? 사업에 실패한 이후 갑자기 사라졌던 N은 모든 계절을 보낸 후에야 연락을 해왔다. 목소리를 듣자마자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까지 연락을 끊고 살 수 있냐고 버럭 화를 냈다. 슬슬 웃기만 하더니 말을 꺼냈다. 


“기억할 줄 알았는데…”


“그게 무슨 소리야, 답답하게. 알아듣게 좀 말해봐.”


못 보던 새 더 느려졌다고 면박을 주면서 생각해보니 기억이 났다. 어느 날 도서관 미디어실에서 공주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보던 N이 불쑥 그런 말을 했었다. 


만약에 인생에 걷잡을 수 없이 힘든 상황이 오면 공주로 가야겠어


“만약에 인생에 걷잡을 수 없이 힘든 상황이 오면 공주로 가야겠어. 고구려에게 풍납토성, 몽촌토성이 함락되고 아차산에서 개로왕이 죽은 다음에, 아들 문주왕이 남쪽으로 남쪽으로 내려가서 정한 도읍이 공주잖아. 백제가 다시 일어설 힘을 얻게 해준 곳. 원래 이름이 웅진이었던 것도 맘에 들어. 기운이 막 넘쳐나는 것 같아.”


그래, 그때 나는 좋은 생각이라고 맞장구를 쳤었다. 그날 우리는 카페로 가 노트북을 켜고 앉아 장난처럼 놀이처럼 공주에 대해 한참을 찾아봤었다. 인생에 살 곳을 옮길 정도의 힘든 일이 닥칠 거라고 상상하지 못했던 시절이었다. 왜 아니겠는가 20대 초반의 우리에게 실패란 소개팅이 망하거나 시험을 망치거나 교환학생에서 떨어지는 정도였을 뿐이었다. 


이번 반려길 산책을 함께한, 나의 반려신발 르무통 메이트(그레이)


“이러지 말고 우리 당장 공주로 여행 가자.”


나의 채근에 N은 마치 미래를 보고 온 사람처럼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 아껴둘거야. 너무 사는 게 힘들고 어려울 때 꺼내 쓸 거야. 다 비운 상태로 가면 다시 나를 잘 채워줄 것 같아.”


당장의 여행이 아니라도 충분히 재미있는 일이 많았으므로 우리는 금방 공주를 잊었다. 졸업을 하고 각자의 삶을 살았다. 나는 에디터로 전국을 쏘다녔고 항상 엉뚱한 계획을 세우던 N은 스타트업을 시작했다. 


우리의 삶은 너무 달라졌다


우리의 삶은 너무 달라졌다. 내가 방학 때 단기 어학연수를 다녀오는 동안 N은 벤처창업스터디에 참가했고 그곳에서 사업을 함께 할 크루들을 만났다. N이 사업을 시작하면서 4년 내내 붙어다녔는데 1년에 4번도 만나기 어려웠다. N은 매일 밤을 샜고 무섭게 일만 했다. 새로운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투자자를 찾아다니면서 고군분투했다. N의 아이템은 금융과 관련되어 있었는데 규제가 많아 그동안 상용화가 어려웠던 것이었다. 


점점 전화를 하는 횟수가 줄다가 서로의 생일도 지나치게 됐다


너무 오래된 규제들이 21세기에 맞게 풀린다면 N의 아이템은 대박을 칠 수도 있는 그런 것이었다. 투자자들은 아이템의 기획이 좋아 선뜻 투자를 결심했다가도 마음을 바꾸기 일쑤였다. 풀릴 듯 풀릴 듯 N은 어려운 시험문제를 받은 학생처럼 매일의 문제를 풀어나갔다. 우리 디지털보다 아날로그를 좋아하던 사람들 아니었나? 어쩌다 짬을 내 겨우 만나도 연락을 하고 지시를 내리느라 안부를 나눌 시간이 없었다. 둥글던 N은 자꾸만 뾰족해져갔다. 점점 전화를 하는 횟수가 줄다가 서로의 생일도 지나치게 됐다. 카카오톡에 알림이 떠도 선뜻 연락을 하게 되지 않았다. 


이번 반려길 산책을 함께한, 나의 반려신발 르무통 메이트(그레이)


사업이 위태롭다는 이야기를 들은 건 N 아버지 장례식에서였다. N은 학창 시절 가까이 지냈던 나와 몇몇이 함께 둘러앉은 테이블에 와서 허기진 사람처럼 사업 이야기를 했다. 이제 잘 나가는 척 허세를 떨 기운도 없다고. 모든 에너지를 다 써버린 것 같다고. 너무 지쳐서 어디로든 떠나버리고 싶다고 했다. 회사가 아니라 자신의 삶이 조금씩 함락되고 있다면서. 그리고 얼마 후 N이 갑자기 사라졌다. 이야기도 없이 가버려서 서운했지만 괜찮았다. 몇 년 동안 쉬지 않고 일한 N이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가고 싶다는 꿈을 이뤘길 바랄 뿐이었다. 


나에게 공주는 나태주 시인이었다


N과 오랜만에 전화통화를 나눈 뒤 나는 친구를 만나기 위해 공주로 가고 있다. 공주, 오늘이 오기 전까지 나에게 공주는 나태주 시인이었다. 어느 가을 인터뷰를 위해 공주에 있는 시인의 집을 찾았었다. 작은 마당에서 귀여운 페도라를 쓰고 장화를 신은 채 앉아 꽃밭에 물을 주던 시인의 모습이 선명하다. 그 장면이 마치 시인의 시처럼 각인되어 있다. 풍금이 있던 큰 방에 앉아 인터뷰를 했는데 중간에 불쑥 독자들이 들어왔다. 어디에서 왔어요? 어서 앉아요. 매일 보는 이웃을 맞이하듯 인사하는 시인의 목소리도 시와 같았다. 그날 시인이 나에게 공주에 대해 어떤 이야기도 하지 않았지만 공주는 한동안 꽃과 이웃과 풍금이 있는 풍경으로 그려졌다. 사라진 친구를 1년 만에 만나러 온 공주, 이제 공주는 나에게 어떤 풍경을 보여줄까? 


공산성 매표소 앞에서 N을 만났다


공산성 매표소 앞에서 N을 만났다. 건강해보였다. 반가우면서 괜히 오랜만에 만나면서 무슨 산성 앞이냐고 궁시렁댔다. N은 공주에 있는 내내 가장 많이 걸었던 곳이 공산성이라고 했다. 아침에 일어나 산성을 한바퀴 돌고 시장에 들러 요기를 하고 타박타박 중동성당까지 걸어가 기도를 하는 게 자신만의 리추얼이었다고. 


용의 등줄기를 걷는 기분이었다


“대신 입장료는 내가 내줄게. 흐흐.”


“야, 입장료까지 내고 들어가야 한다고? 어디가서 알밤빵이나 먹자.”


알밤빵, 알밤떡 실컷 먹게 해줄 테니 일단은 공산성을 걷자며 N은 성큼성큼 걸어가 입장티켓을 사왔다. 


“얼마 전까지는 무료였어. 코로나 때 무료개방했던 게 이어졌는데 다시 요금을 내야 하네. 전처럼 자주 오지 못하는데, 그래도 3천원 지불할만해.” 


뒤로 돌아 걸어가면 반짝이는 금강이 보였다


성문 안으로 들어가 성곽을 따라 길게 난 길을 올랐다. 용의 등줄기를 걷는 기분이었다. 백제가 한성에서 웅진으로 도읍을 옮긴 후 쌓은 왕성이었다. 해발 110m 공산의 능선과 계곡을 따라 쌓은 천연의 요새. 2km가 넘는 능선을 걷는데 앞을 보고 있으면 공주 시내가 훤히 보였고 뒤로 돌아 걸어가면 반짝이는 금강이 보였다. 


무언가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용기를 주는 곳


“문주왕이 왜 이쯤에서 멈춰서 도읍을 정했는지 알 것 같아. 적을 막아주고 나를 감싸주는 정말 딱 그런 곳이잖아. 무언가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용기를 주는 곳.” 


이번 반려길 산책을 함께한, 나의 반려신발 르무통 메이트(그레이)


N은 실패한 사람이 아닌 새롭게 도전하는 사람의 표정으로 환하게 말했다. 멋지구나 내 친구. 산성을 걷고 내려와 산성시장 떡집에서 알밤떡을 하나 사먹고 제민천을 지나 중동성당까지 걸으면서 어쩐지 나에게도 새로운 도전이 펼쳐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집으로 가기 전에 한 번 더 공주의 구석구석을 걸어봐야지. 





반려길이란?

길을 입양해서 가꾸며 평생을 돌보는 나의 반려길 프로젝트, 르무통이 시작합니다. 


* 나만의 반려길을 소개해주세요

댓글에 나만의 반려길을 소개해 주세요. 그 길을 사랑하고 아끼는 이유, 길의 위치, 역사, 길에 얽힌 이야기 등을 자유롭게 적어주세요. 에디터 L씨가 그 길을 소개합니다. 매주 3명의 당첨자를 선정해 르무통 공식몰 적립금 5만원과 르무통 매거진을 드립니다.

이전 14화 다정하고 따뜻한 도란도란 시나브로길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