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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르무통 LeMouton Jun 14. 2024

다정하고 따뜻한 도란도란 시나브로길


또 다른 반짝임이 가득한 별의 뒷편처럼 

전주의 삶이 빛나는 도란도란 시나브로 산책길 6코스


초여름의 초록이 눈부시던 즈음 독서모임에서 전주로 여행을 떠났었다


전주가 관광지로 핫해지기 시작했을 무렵이었으니 10여년 전쯤으로 기억한다. 초여름의 초록이 눈부시던 즈음 독서모임에서 전주로 여행을 떠났었다. 매주 한 권의 책을 읽고 주말에 상수동의 카페에서 모이던 우리가 읽는 책의 장르는 정말 다양했다.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 같은 벽돌책부터 머릿속을 말랑말랑하게 해주는 산뜻한 에세이나 난해한 시집까지 모임은 누군가의 취향을 따라가고 나의 취향을 소개하는 시간이었다. 


이번 반려길 산책을 함께한, 나의 반려신발 르무통 스위트(폼그린)


전주 여행의 발화점은 최명희 선생의 소설 <혼불>이었다. 우리도 <토지>나 <태백산맥>, <객주> 등의 한눈에 시대를 읽을 수 있는 대하소설을 읽어보는 게 어떠냐는 제안 끝에 누군가 <혼불>을 읽은 이야기를 해줬다. <토지>보다 짧지만 순우리말이 많이 나와 읽는 내내 밀도가 너무 높아 힘들었는데 다 읽고 나니 공부를 마친 것 같은 뿌듯함이 들었다고 했다. 약간의 지적허영을 가지고 있던 우리는 그렇다면 <혼불>로 대하소설을 시작하는 건 어떠냐는 의견을 주고받았고, 암 투병으로 작품을 맺지 못하고 타계한 작가에 대한 이야기까지 하게 됐다. 최명희는 전주 사람이었고, 남도 사람들의 삶과 글을 짚어보다가 우리는 다음 주엔 전주에 갑시다, 라고 결정했고 모두 들떴다. 


이번 반려길 산책을 함께한, 나의 반려신발 르무통 클래식2(다크네이비)


그때 여행준비를 해야 하니 이번 주 책 읽기는 패스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책을 읽는 대신 전주 한옥마을 근처의 가볼만한 곳들을 알아보는 시간을 갖자는 것이었다. 각자 전주 가이드가 되어 보자는 취지였는데 사실 그 의견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진 않았다. 전주로의 여행, 이라는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모두의 마음은 이미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좀 전까지 남도의 문학에 대해 토론하던 사람들은 헤어질 시간을 훌쩍 넘겨가면서 전주의 최고 국밥집에 대한 논쟁을 벌였다. 문학은 미식을 이기지 못했고 우리는 비빔밥은 무얼 먹을 것인지, 막걸리 한 주전자를 주문하면 열 몇 가지의 안주가 나온다는 막걸리 한 상을 어디에서 먹을지 고민하다가 그날만큼은 하루 네 끼를 먹자고 약속하고 헤어졌다. 


깨끗하고 조용한 작은 도시가 나타났다


당일치기 여행이라 상수역에서 아침 일찍 만나 전주로 향했다. 다들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야 해서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을텐데 목소리가 한옥타브쯤 올라가 있었다. 회비를 걷기 위해 가위바위보로 총무를 정하고 얼른 커피를 샀다. 빵이나 김밥을 살까 하다가 누군가 “멈춰! 우리는 전주에 가는 거라고, 한 끼라도 더 먹어야지” 하는 바람에 커피만 한 잔씩 테이크아웃을 해 차에 탔다. 노래가 우리의 어깨를 들썩이게 했다. 미식은 전주에서 시작해야 하므로 천안휴게소의 호두과자를 애써 외면하고 달리고 달렸다. 지루한 고속도로 위 시시때때로 변하는 풍경을 지나 인터체인지를 빠져나오니 깨끗하고 조용한 작은 도시가 나타났다. 


한옥마을에 이르기 전부터 전주가 좋아졌다


6월의 햇살로 샤워를 마친 작고 낮은 건물들이 너무 단정해서 단박에 호감이 갔던 걸로 기억한다. 한옥마을에 이르기 전부터 전주가 좋아졌다. 전주는 늘 뒤죽박죽 꿈과 계획을 요란하게 바꾸고 갈팡질팡하던 나 같은 사람을 진정시켜주고 반듯하게 서게 해줄 것 같았다. 언젠가는 이곳에서 살고 싶다는 혼잣말을 들은 일행이 살기 좋은 곳이라는 게 딱 느껴진다면서 나의 말을 거들었다. 이 작은 도시의 도로 곳곳만 다녀도 마음의 평온을 찾을 것 같다고 생각하는 사이 한옥마을에 도착했다. 


이번 반려길 산책을 함께한, 나의 반려신발 르무통 스위트(폼그린)


장거리 운전을 기꺼이 맡아준 회원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고, 트렁크에서 각자의 가방을 꺼내 맸다. 전주에서의 첫 끼는 콩나물국밥으로 정해놓아서 전동성당, 경기전이 눈앞이었는데 쿨하게 지나쳤다. 국밥과 비빔밥과 초코파이와 떡볶이와 떡갈비와 아무튼 먹을 수 있는 것들을 놓치지 않는 사이사이 관광지를 돌아봤다. 


이번 반려길 산책을 함께한, 나의 반려신발 르무통 클래식2(다크네이비) 와 스위트(폼그린)


시에서 작정하고 오래된 거리를 손 본 흔적이, 곳곳에 묻어났다. 당시의 전주 한옥마을은 아직 지금처럼 매끄럽기 전이었는데도 제법 관광지의 태가 났다.  


한옥마을의 중심쪽이 아닌 반대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애초에 책을 읽는 대신 각자 전주의 가이드가 되어보자던 약속은 맛집 투어로 끝나나 했는데 평소에도 성실하던 회원 S가 진짜 가이드처럼 우리를 인솔했다. S는 그 전 해에 전주에 왔다가 반한 곳이 있다며 한옥마을의 중심 쪽이 아닌 반대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오즈로 향해 나아가는 도로시와 일행처럼 두근대는 마음으로


어, 거기 뭐가 있어요? 진짜 로컬들만 아는 맛집으로 데려가는 건가 살짝 기대하며 S를 따라 걷던 우리는 뜻밖의 장소와 마주했다. 도로 아래 작은 터널이 있었다. 우와! 모두의 탄성에 살짝 미소를 띈 S는 이 터널을 지나면 더 좋은 게 있다고 우리를 데려갔다. 오즈로 향해 나아가는 도로시와 일행처럼 두근대는 마음으로 초여름의 빛이 핀조명처럼 우리를 비추는 터널을 통과하니 물길이 보였다. 전주천이라고 했다. 물이 보이는 왼쪽은 산이 있었고 그 사이사이 오르막을 만들어 아담한 살림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여기는 전주에서 사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잖아요


“지난 전주 여행 때 우연히 이곳에 들렀는데 정말 좋았어요. 화려해진 경기전 인근보다 저는 여기가 더 전주 같더라고요. 저쪽은 전주를 보려는 사람들이 모여 있다면 여기는 전주에서 사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잖아요.” 


S다웠다. S는 별의 뒤쪽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S다웠다. S는 별의 뒤쪽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빛의 뒤, 한 걸음만 앞으로 나오면 반짝일 수 있는 그러나 아직은 빛의 그늘에 머물러 있는 모든 것을 끌어안았다. 주인공보다는 조연을 단역을 사랑하는 사람. 차트에 올라온 아이돌보다 매번 싱글을 낼 때마다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는 중소엔터사의 아이돌들을 그중에서도 가장 팬이 적은 멤버를 사랑하는 사람. 


이름 나지 않는 것들을 사랑하게 된다


줄을 선 맛집보다 맛집에 가려진 한적한 골목 안쪽의 밥집을 자주 찾고, 사장님 혼자 모든 일을 다 해내는 아담한 테이블이 서너 개뿐인 작은 카페의 단골인 사람. “모두가 사랑을 주는데 굳이 나까지 보탤 필요가 없다”는 게 S의 생각이었다. “이름 나지 않는 것들을 사랑하게 된다”던 S가 골라온 책들은 항상 처음 들어본 작가의 책이었다. 


이후로 여러 번 전주를 찾았다


10년 전의 이야기다. 모임은 없어졌고, 각자의 삶을 사느라 회원 간의 연락도 뜸해졌다. 재미있게도 요즘 상수동에 가면 전주가 떠오르고, 전주에 오면 상수동 카페에서 주말마다 책 이야기를 나누던 때가 생각난다. 이후로 여러 번 전주를 찾았다. 여행보다는 출장이 많았다. 올 때마다 나는 웬만하면 그때 S가 알려줬던 한벽굴에서 전주천을 따라 걷는 전주 산책을 시작한다. 


한벽루에 올라가 잠시 전주천을 내려보며 바람을 쏘이고


한벽루에 올라가 잠시 전주천을 내려보며 바람을 쏘이고 승암사까지 가는 길 오래된 삶의 흔적들을 한참 바라보며 서 있는다. 편안하고 조용한 마을 길, 담벼락에 놓인 작은 자전거, 시멘트로 발라 놓은 계단 가장자리를 장식한 화분, 저 산 위에 지어놓은 누군가의 집. 그 마당에서 내려다보는 전주천은 어떤 모습일까 상상해본다.


이번 반려길 산책을 함께한, 나의 반려신발 르무통 스위트(폼그린)


천천히 물길을 따라 걸으며 결국은 만나게 되는 한옥마을의 남천교에 닿으면 청연루에 앉아본다. 

그곳에서 바람을 맞으며 S가 말했던 이름 나지 않은 것들을 떠올린다. 이름 나지 않는 것의 카테고리에 내가 들어가 있다. 


작지만 빛나는 것들을 발견하는 사람으로 살았으면 좋겠다


내 이름과 나의 글이 세상의 주목을 받기를 꿈꾸던 때가 있었다. 그땐 S가 왜 반짝이는 것들을 대신 한 걸음 뒤쪽의 것을 사랑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모두가 바라봐주어 빛나는 반짝임은 아니어도 누구나 깊고 작은 반짝임을 가진다는 걸 알게 된 지금은 나도 S를 닮고 싶다. 작지만 빛나는 것들을 발견하는 사람으로 살았으면 좋겠다. 



반려길이란?

길을 입양해서 가꾸며 평생을 돌보는 나의 반려길 프로젝트, 르무통이 시작합니다. 


* 나만의 반려길을 소개해주세요

댓글에 나만의 반려길을 소개해 주세요. 그 길을 사랑하고 아끼는 이유, 길의 위치, 역사, 길에 얽힌 이야기 등을 자유롭게 적어주세요. 에디터 L씨가 그 길을 소개합니다. 매주 3명의 당첨자를 선정해 르무통 공식몰 적립금 5만원과 르무통 매거진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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