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틈없는 꽃그늘 아래
우리는 다시 사랑을 시작하고
L에게
꽃이 핀다. 가끔 심술궂은 찬바람이 분위기를 망치기도 하지만 그래도 바람에 꽃향기가 묻어나니 봄은 봄인가봐. 잘 지내지?
나는 지금 부산이야. 꽃향기를 머금은 바람이 코끝에 닿자마자 이곳에 왔어. 올해부터 새로운 목표가 생겼거든. 무슨 이야기부터 해야 할지 막막하다. 이렇게 편지를 써본 게 정말 오랜만이잖아. 전엔 메일도 길게 길게 쓰고 그랬었는데, 실시간으로 안부를 확인하는 게 가능해지면서 그런 낭만이 다 사라졌어. 뭘 하고 사는지 어디에 있는지 시시콜콜 알리고 전달받는 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닌 것 같아. 그런 시스템이 서로 더 침묵하게 만드는 건 아닌가 생각하곤 해. 그동안 나도 L에게 짧은 생존 신고만 했었는데 오늘은 길게 이야기를 하고 싶어졌어. 새롭고 낯선 곳에 와서 일까? 안 하던 일을 하고 싶어지네.
지금 있는 숙소는 아주 작은 방인데 바다가 보이는 쪽 창이 정말 커. 벽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어. 눈앞에 광안리 바다가 너무 가깝게 보여서 모래사장에 앉아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야. 침대가 하나 있고 지금 이 편지를 쓰고 있는 화장대 겸 책상이 있고 창가 아래 작은 테이블에는 다 마신 탄산수 병에 버터플라이를 꽂아뒀어. 우리 함께 여행을 갈 때마다 가장 먼저 했던 일이 동네 꽃집을 찾는 거였잖아. 숙소 근처 꽃집에서 가장 싱싱하고 예뻐 보이는 꽃 몇 송이를 사와서 음료수를 벌컥벌컥 마셔 비우고 꽃을 꽂았지.
“아 이제야 우리집 같네.”
L이 그 이야기를 하면 낯선 곳에서 불안했던 마음이 싹 가라앉곤 했지. 전부 남이 선택한 것들로 꾸며진 낯선 공간이 순식간에 익숙해지는 마법이었어. 지금도 내 시야에서 선명하게 보이는 저 꽃 덕에 이 작은 방이 오래 전부터 지내온 내 방 같아.
어딜 가든 사흘만 지나면 로컬이라던 L의 말이 생각난다. 이틀 전에 왔으니 오늘이 사흘째 광안리인데 나도 벌써 동네 주민이 다 되었어. 단골집은 아직이지만 골목길을 다 알게 됐거든. 편의점에 가기 위해 어느 골목으로 가야 더 빠른지, 큰길을 따라 가면 어떤 동네가 나오는지, 출근하고 퇴근하는 사람들의 표정은 어떤지 그런 것들을 유심히 봤지.
숙소에서 바닷가를 따라 걸어가다 보면 작은 공원을 만나는데 거길 지나면 엄청 큰 아파트 단지가 나와. 지금 L이 지도를 열어 볼 수도 있겠다. 지도에 ‘남천동 벚꽃길’이라고 치면 나오는 바로 거기야.
지도를 열고 몸을 왼쪽으로 틀고 고개를 오른쪽으로 기울여서 보면 꼭 기와집 지붕 같은 모양의 지형이 나오잖아. 그 안이 다 한 아파트 단지더라구. 1980년 1월부터 입주가 시작됐다고 하니까 벌써 40년이 넘은 곳인데 처음부터 고급아파트로 지었는지 지금도 아주 단정하고 깔끔해. 곧 재건축이 된다는데 그땐 지금의 모습이 사라지고 없겠지.
어제 오전에 광안리 바닷가 근처를 좀 걷다가 점심을 먹고 그 아파트 단지 쪽으로 가서 한참을 걸었어. 우리가 여행 가면 자주 하던 코스 바꿔가며 걷기를 했지. 왼쪽으로도 돌아보고, 오른쪽으로도 돌아보고, 사잇길로도 지나봤어. 길마다 차들이 늘어져서 주차되어 있더라고. 컬러도 크기도 모양도 사용 흔적도 전부 다 제각각인 차들을 하나하나 눈 맞추듯 지긋이 바라보며 지났어. 저 작고 귀여운 핑크색 차는 주인을 태우고 어떤 길을 달릴까, 저 탑차의 주인은 어떤 걸 싣고 달릴까, 노란봉고에는 몇 명의 아이들이 타는 걸까, 검정색 세단의 주인의 고민은 어떤 것일까 같은 것들 것 생각하면서 말야.
요즘은 그런 게 너무 궁금하고 또 신기해. 전부 다 다른 생각을 하고 다른 삶을 산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워. 우리는 모두 이 세상에 등장하거나 퇴장할 때는 비슷한데 머무는 동안 너무 다르게 지내잖아. 그런데 또 40년이나 된 이곳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지났고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을까 상상하다 보면 비슷비슷한 삶이 보여.
아침 등교길에 버스정류장에서 친구들을 만나고 학원이 끝나면 같이 돌아온 추억이라든가 같이 장을 보고 같은 교회나 성당에 다닌다거나 하는 것들 말야. 매일 해변가를 걷다가 만나 친해져서 집에 초대해 차를 한잔 하는 사이가 됐다던가 하는, 사소하고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그런 일들을 겪었겠지. 오래된 아파트 단지를 걸으면 사람 사는 건 같고도 다른 것인가 그런 생각을 들어.
이곳은 정말 걷기 좋아. 지루할 틈이 없더라고. 바닷가 쪽에 자전거 길이 있는데 자전거를 무료 대여해주는 대여소도 함께 있어. 걷다가 지루하면 자전거를 한번 타볼까 생각중이야. 시간이 된다면 관광객이 거의 없는 평일 오전에 도전해보려고 해. 사실 언제까지 이곳에 있을지 아직도 결정하지 못했어. 와보니 정말 좋아서 계속 이곳에 있고 싶은데 그렇게 되면 처음 여행의 목적과 너무 멀어져서 고민이 되거든. 내가 휴직을 하고 이 여행을 시작한 이유는 꽃 때문이야. (사실 내 말을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은 L뿐이라고 생각해서 이렇게 편지를 보내.)
지난해 봄이었어. 일을 하다 정신 차리니 어느 순간 온 세상이 꽃이더라고. 학교 일이라는 게 그래, 새 학기가 시작되면 그즈음이 제일 바빠. 게다가 1학년을 맡아서 더 신경 쓸 게 많았었어. 반에 사건사고도 생겼지. 수업을 하고 수습을 하고 행정처리까지 마친 뒤에 다 늦어서 집에 가는데 발등으로 후두둑 꽃잎이 떨어지는 거야. 며칠간 꽃이 핀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금방 질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어서 좀 놀랐어. 꽃이 지는 줄도 모르고 한 해를 보낼 뻔한 거지.
서른이 된 이후부터 나는 매년 꽃이 피면 내 인생에 앞으로 몇 번 더 이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있을까 가늠해봐. 마흔 번, 쉰 번 아무리 최대한 늘린다 해도 그게 100번은 안되는 거잖아. 그걸 생각하면 그 순간이 너무 아까웠어. 고작 몇십번이니까. 그 귀한 한 번을 지나칠 뻔할 만큼 나한테 중요한 게 무엇일까. 며칠을 고민했어. 없더라고. 아이들도 소중하고 교사로서의 사명감도 중요한데 그게 내 인생에 몇십번 중 한 번을 바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어. 돌아보니까 나는 자꾸 중요한 걸 잃어버리는 중이었어. 안 되겠더라고.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어. 꽃을 보려고 휴직을 했다는 걸 이해하지 못할 테니까. 부산에서 시작해서 위로 위로 꽃을 따라 올라가는 여행을 하려고 했어. 그러면 4월 한 달, 인생에 꽃구경 횟수를 서른 번 늘리는 거잖아. 꽃이 나에게 오길 기다릴게 아니라 내가 꽃을 찾아 떠나보자 마음먹고 시작한 여행이야. 그런데 자꾸 이곳에 가만히 있고 싶어지네.
따뜻한 바람이 부는 남쪽이 너무 좋아. 지금 이곳은 꽃이 막 피어나기 시작했어. 이제 곧 더 빽빽하게 하늘을 핑크색으로 메우겠지. 그 꽃그늘 아래로 사람들이 저마다의 삶으로 지나갈 거야. 그 사람들 틈에서 몇 번이고 걸으면서 내 인생에 꽃을 볼 수 있는 횟수를 늘려볼까? 학생들에겐 정도를 가라고 잔소리하면서 나는 이렇게 잔머리를 굴리고 있네. 어쨌든 L, 실컷 꽃을 보고 다시 학교로 돌아가면 아이들이 꽃으로 보일 것 같아. 정말 다행이지?
J의 편지는 이렇게 끝났다.
“이곳은 사랑하던 것들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게 되었을 때 와야 할 곳이야.”
나는 편지지를 잘 접어 봉투에 넣었다. 오랜만이었다. 종이를 접는 손의 감각이 어색했다. 잊고 사는 것들, 잊혀지는 것들이 너무 많다. 꽃이 지기 전에 광안리로 가야겠다. 잊었던 모든 것들이 꽃처럼 피어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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