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르무통 LeMouton Mar 29. 2024

봄이 내려앉은 인천의 골목, 시대를 거닐다


반짝이는 바다 너머

무지갯빛 희망 가득 

인천개항장 거리 


무지갯빛 희망 가득, 개항장거리의 시작


쿵, 쿵. C는 앞 범퍼와 뒷 범퍼가 닿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좁은 공간에 주차를 했다. C의 집 앞 도로 주차선 안쪽으로 길가에 빼곡하게 차가 늘어서 있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오늘 밤 안으로 주차하지 못할 거야. 여기는 다 그래, 차는 그냥 이동수단이지. 범퍼는 충격을 덜 받게 하기 위해 있는 것이고. 스크래치가 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하니까.”


제법 파리 사람 같아 보였다. 일 년 정도면 그 지역에 원래 살았던 것처럼 익숙해지는구나 싶었다. 


“저녁 시간에 괜찮은 레스토랑에서 식사하려면 오래 기다려야 해. 일단 주문하는 것부터 쉽지 않아. 저기요, 여기요, 이봐요, 플리즈, 이런 거 이곳 가르송들이 질색하거든. 은근하게 눈을 마주쳐야 주문을 받으러 오는데, 그 자식들이 쉽게 눈을 안 마주쳐준단 말이지. 오늘은 우리 집에 가서 먹자.”


이번 반려길 산책을 함께한, 나의 반려신발 르무통 메이트 (블랙)


조목조목 설명을 하는 모습이 진짜 파리 사람 같았다. 숙소는 C의 집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C의 주소를 받고 에어비앤비로 가장 가까운 곳을 예약했으니까. 무거운 나무문을 열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니 내 몸 하나 겨우 들어갈 좁은 엘리베이터가 보였다. 짐 때문에 둘이 함께 타지 못해 1층에서 기다리기로 한 뒤 그는 반자동이라고, 덧문을 손으로 닫아야 작동할 거라고 일러줬다. 반자동 엘리베이터를 타고 4층 예약한 숙소로 가 짐을 넣고 조금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고 내려왔다. 파리 사람 같은 C의 등이 보였다. 


“배 많이 고파?”


“아니 비행기에서 주는 대로 다 먹고, 공항에서 여기까지 덕분에 편하게 차로 왔더니 좀 걷고 싶어.”


“그럼 와인 한 병 사서 센 강에서 먹을까?”


8시가 다 되었는데 파란 하늘이 그대로였다. 백야의 계절, 좀 걸어두는 것이 시차를 적응하는데도 도움이 될 것이었다. 우리는 동네 마트에 가서 샌드위치와 잘라 놓은 소시송 한 봉지와 스크류캡 와인을 한 병씩 샀다. 각자 마실 와인을 한 병씩 들고 마치 이곳에 사는 사람들처럼 천천히 걸어 강가로 갔다. 따뜻한 밤바람이 부는 강가에는 사람이 가득했다. 적당한 곳을 찾아 털썩 주저앉아 와인을 열어 병째 부딪혔다. 


이번 반려길 산책을 함께한, 나의 반려신발 르무통 메이트 (블랙)


“환영해”


“브라보! 진짜 재밌다. 센 강에서 병나발이라니. 수능 100일 전 생각나네.”


그때도 병을 들고 있었다. 파이팅이라고 동시에 외치면서 소주병을 부딪혔다. 수능 100일 전이었다. 우리는 큰 전투를 앞두고 있는 병사들처럼 비장했다. 


“잘될 거야.”


“잘 돼야지.”


따뜻한 봄 날을 즐기는 녀석. 오드아이다.


집에서 멀지만 비교적 가까운 인천행을 제안한 건 C였다. 지하철을 타고 바다를 보러 갈 수 있다면서. 가방에 몰래 소주병을 숨겨 온 것도 C였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술이 다 깰 거라면서. 

인천역에서 내려 차이나타운을 지나 청일조계지 계단 앞에 섰을 때 C가 앞만 보고 걷는 내 몸을 돌려세웠을 때, 저 너머 반짝이는 바다가 보였다. 입을 벌리고 감탄을 하는 내게 C는 이건 아무것도 아니라면서 더 걷자고 했다. 야, 충분해. 완전 바다잖아. 저기 계단 어디쯤에 앉아서 마시자. 진절머리 나는 불투명한 미래를 빨리 잊고 싶었다. 급하게 서두르는 내게 C는 거기 앉아 마시면 고딩이 술 마신다고 광고하는 거라면서 다 봐둔 곳이 있다고 했다. 


개항의 흔적이 잔존하는 거리


우리나라 최초의 국제항답게 인천은 개항의 흔적이 여기저기 남아 있었다. 오래된 적산가옥, 옛 영사관터였다는 으리으리한 기와집, 높은 축대 아래 오밀조밀 모여 있는 집들을 지났다. 어느 여고가 보였고 그리고… C가 마치 자신이 준비한 선물이라는 듯 양팔을 벌리면 짜잔 하고 길 가운데로 걸어갔다. 위험해, 라고 외치며 돌아본 그의 손끝에는 아치형 터널이 있었다. 


U자형 자석을 세워놓은 듯한 모양의 폭이 좁은 터널이었다.


무지개를 닮은 홍예문


“무지개 홍(虹) 무지개 예(霓)자를 써서 홍예문이래. 무지개를 닮았다고 그렇게 지었대.” 


무지개라고 하기에 바위를 뚫어 돌로 마무리한 칙칙한 색이었다. 


“무슨 무지개가 이렇게 날씬해?”


홍예문을 지나는 자동차. 이 문은 뭔지 모를 아련함이 묻어있다


코웃음을 치며 C를 따라 그 터널을 지났다. C는 터널을 통과해 10미터쯤 내려가더니 나에게 뒤를 돌아보라고 했다. 그 순간 오후의 햇살이 길게 터널을 지났다. 건너편의 세상이 빛 속에 가려졌다. 황홀했다. 이미 지나온 곳인데 다시 건너가면 왠지 아름다운 세상이 있을 것 같았다. 무지개 너머의 세상이 그렇듯. 


“무지개 닮은 거 맞지?” 


아직은 이른 봄. 곧 따스한 풍경이 펼쳐지겠지 


C는 픽 웃으며 뒤돌아 가파른 길로 올라갔다. 자유공원 입구 쪽이 아니라 파랑돌이라는 카페가 있는 사잇길을 지나니 제물포구락부로 올라가는 계단이 보였다. 여기가 20세기 초반의 클럽이었다는 거지? 어떤 사람들이 이곳에서 시간을 보냈을까? 성큼성큼 올라가는 C에게 소리치듯 물었다. C는 뒤돌아 조용히 하라며 검지를 입술로 가져갔다. 봄의 시간 동안 꽃을 피웠을 나무에는 초록색 나뭇잎만 무성했다. 계단의 위쪽 미성년자가 들키지 않고 술을 마실 수 있는 적당한 곳을 찾는 C의 등이 나뭇잎의 그림자로 얼룩졌다. 


윤슬이 아름답게 일렁이던 곳


그림자와 빛으로 아른거리던 C의 등과 계단 구석에서 부딪혔던 소주병의 초록빛과 계단 너머 아래 여전히 반짝이던 바다. 꿀꺽 꿀꺽 꿀꺽 세 번으로 온몸이 타들어 갈 것 같아 두 손 들고 포기해버린 100일주(酒). 낯선 알코올의 감각을 느끼며 아이와 어른의 경계에서 어쩔 줄 모르던 우리. 그날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그날 우리는 그 계단 위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서로에게 무한 응원을 보내줬다. 잘할 거야, 잘될 거야, 할 수 있어, 해낼 거야. 자기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을 남들에게 듣고 싶었던 말을 서로에게 실컷 해줬다. 우리는 위태로움을 간신히 극복하며 무사히 100일의 경주를 마쳤고, 원하는 학교에 진학하진 못했지만 그럭저럭 무지개 너머 어른의 삶에 진입했다. 


이번 반려길 산책을 함께한, 나의 반려신발 르무통 메이트 (블랙)


“이젠 소주 한 병쯤 거뜬한데.”


“와인 한 병으로 대신 하자. 짠.”


“여기는 기분이 안 난다. 위로나 응원이나 다짐이나 뭐든 하려면 적어도 바다는 앞에 있어야지.”


강이 너무 좁다는 말에 C는 주말에 노르망디에 다녀오자고 했다. 파리에서 멀지만 비교적 가까운 바다라면서. 나는 주말에 인천행 비행기에 올라있을 예정이면서 그러자고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 네가 최고라고 거짓말 해줬던 그날을 생각하면서. 


주말이 오기 전까지 우리는 매일 백야의 환한 밤, 함께 와인병을 들고 센강으로 갔다. 소주 한 병도 못 마시던 때의 고민이 얼마나 작고 귀여운 것이었는지에 대해, 고요한 바다를 보며 함께 걸었던 인천의 골목들에 대해, 좀처럼 무지개를 볼 수 없는 밋밋한 삶에 대해 그리고 그 시절과 많이 달라진 인천개항장 거리의 골목골목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개항의 흔적이 남아있는 골목 골목


“그래서 한국엔 돌아오지 않을 생각이야?”


“일단 공부를 마쳐야지. 그리고 나서 여기서 일을 시작해야 하나 돌아가야 하나 고민중이야.”


“한국에 오면 다시 인천에 꼭 같이 가자. 이번엔 소주 한 병 다 마시고 오는 거다?” 


완전히 달라진 세상을 살아낸 그들에게, 건배.


인천개항장 거리를 걸을 때면 이상하게 청춘의 시간을 상상한다. 나의 청춘 뿐 아니라 20세기 초반 최초의 국제항이 개항했던 그 시대에 살았던 청춘의 삶을 생각하게 된다. 20세기 초 새로운 시대를 맞은 청년들도 무지갯빛 희망을 품고 살았으리라 믿고 싶다. 반짝이는 바다를 보며 더 멀리 나아갈 꿈을 꾸었기를. 부디 그들에게도 한조각 행복한 시간이 존재했기를. 완전히 달라진 세상을 살아낸 그들에게, 건배. 





반려길이란?

길을 입양해서 가꾸며 평생을 돌보는 나의 반려길 프로젝트, 르무통이 시작합니다. 


* 나만의 반려길을 소개해주세요

댓글에 나만의 반려길을 소개해 주세요. 그 길을 사랑하고 아끼는 이유, 길의 위치, 역사, 길에 얽힌 이야기 등을 자유롭게 적어주세요. 에디터 L씨가 그 길을 소개합니다. 매주 3명의 당첨자를 선정해 르무통 공식몰 적립금 5만원과 르무통 매거진을 드립니다.

이전 03화 3월의 바람처럼 천천히 흐르는 무의도 천천히 걷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