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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르무통 LeMouton Aug 12. 2024

최준선생의 마음을 닮은 해바라기 바다, 경주 교촌마을


최준 선생이 우리에게 남긴 길, 경주 교촌 


경주 교촌마을 최부자댁에서 위대한 부자, 숭고한 독립운동가를 만났다. 



신라라는 화려한 계급장을 뗀, 또 다른 경주를 만나러 왔다. 1000년 고도 경주의 역사에서 결코 빼놓아서도 잊어서도 안 될, 400년 조선 반가 최부자댁 이야기다. 기차역에서 목적지로 향하는 내내 경주는 한여름의 짙푸른 녹음을 뿜어냈다. 정겹게 흐르는 남천을 건너자, 시대를 거슬러 조선의 옛 마을에 도착했다. 최부자 고택과 향교를 중심으로 전통 한옥들이 마을을 이루고 있는 이곳은, 교촌마을이다. 향교가 있는 곳이라 붙여진 이름으로 교동, 교리라고도 불린다. 





#오래되었지만 세련된 전통이 있는, 교촌마을 

아름다운 고택 사이사이를 거닐며 오래된 곳이지만 오늘 생생히 살아 있는 장소라는 데 마음을 빼앗겼다. 한옥 하나하나가 옛 전통을 꺼내놓고 있었다. 토기, 누비, 한식, 떡, 전통주, 그리고 예악당의 국악까지, 모두 이곳에서 직접 보고, 만지고, 맛보고, 경험할 수 있는 살아 있는 전통이다. 조상이 물려준 삶의 방식을 요즘 스타일로 내어놓는 젊은 후손들 덕에 교촌마을은 그 어느 곳보다 세련되게 다가왔다. 그중에서도 교동법주와 요석궁 1779는 꼭 들러보아야 할 곳이다. 


#오래되었지만 세련된 전통이 있는, 교촌마을


18세기에 지어진 교동법주 고택은 이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종가인 최부자댁 옆에 위치하고 있어 작은댁이라고 불렸다. 이곳에선 최부자댁에서 대대로 빚어온 경주 교동법주를 계승하고 있다. 교동법주는 숙종 때 사옹원 참봉을 지냈던 최국선이 낙향하여 사가에서 처음 빚은 가양주로, 감미로운 곡향과 깊은 맛을 자랑한다. 오래됐지만 품격 있는 집, 사계절 자연의 신비를 드러내는 작은 마당, 350년을 내려온 술…. 시간은 이렇듯 이곳을 특별한 공간으로 만든다.


최부자 반가의 상차림을 내놓는 한식당 요석궁은 최부자댁 12대손이자 독립운동가로 유명한 최준의 동생 최윤이 분가하면서 지은 집이다.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한옥으로, 교촌에선 비교적 새집이지만, ㄷ 자형 안채와 중문채, 사랑채가 붙어 있는 구조가 최부자댁과 비슷하다. 대문 안으로 발을 디디면 시간과 역사를 간직한 고풍스러운 마당이 펼쳐진다. 식당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원래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어 고택의 화려했던 시절을 느껴볼 수 있다.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경주 최부자댁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경주 최부자댁 

교촌마을 골목길은 큰 솟을대문으로 발걸음을 이끈다. 경주 최부자댁이라고 불리는 경주 교동 최 씨 고택이다. 1700년경에 지어진 400년 만석꾼 가문의 대저택이지만, 화려하거나 웅장하지 않다. 그보다는 겸허하고 기품 있다는 편이 더 적합한데, 그것만으로도 다 설명할 수 없다. 이 고택에는 마음을 숙연하게 만드는 이곳만의 기운이 있다. 정신과 염원도 공간에 깃들어 분위기를 만든다. 기도가 모이고 모인 고찰이나 성당이 그런 것처럼. 경주 최부자댁도 오랜 시간 실천해온 절제와 애민(愛民)의 정신이 큰 기운이 되어 집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최 씨 고택은 사당과 사랑채, 안채, 대문채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안채는 트인 ㅁ 자, 사랑채는 ㄱ 자, 중문채는 ㅡ 자형으로 조선시대 양반집의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다. 대문채에 위치한 큰 곳간은 집안의 경제 규모를 엿볼 수 있게 해준다. 반면 바로 이웃에 위치한 경주향교보다 건물을 낮게 보이게 하기 위해 집터의 흙을 1미터 파낸 데서는 유학자, 사대부로서의 겸양을 느끼게 한다. 안채 뒤편으로는 꽃밭이 있어 아름다움을 더하고, 사랑채와 별당 사이에 조용하게 자리한 사당은 최부자댁의 유교적 정체성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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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와 명예를 400년이나 이어왔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그 계속된 부가 탐욕과 착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혁신과 절제, 상생을 위한 노력으로 가능했다는 건 더 놀라운 일이다. 이양법이라는 모내기 방법을 고안해 수익을 증대한 건 최부자댁의 유명한 혁신이다. 또, 소작인과 3:7이 아닌 5:5로 나눔으로써 농민들의 동기를 높여 오히려 생산량을 늘리고 수익도 증대했다는 것은 상생에 대한 탁월한 직관이다. 주변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고, 흉년기에는 땅을 사지 말며, 만석 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라는 등 경주 최부자댁의 육훈은 정당한 방법과 인류애로도 부를 일구고 유지하는 게 가능하다는, 위대한 이정표를 남겼다. 



#나라 없이는 부자도 없다, 독립운동가 최준


#나라 없이는 부자도 없다, 독립운동가 최준 

경주 최부자댁의 이러한 정신은 일제강점기에도 빛을 발한다. 최준 일가는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에 투신하는데, 조선의 3대 부자 중 유일하다. 최준은 백산 안희제 선생과 함께 세운 백산무역 주식회사를 통해 전 재산을 독립 자금으로 내놓았고, 그의 아우 최완은 상해임시정부 활동 중 일제에 붙잡혀 순국했다. 최준과 함께 독립운동의 시작과 끝을 함께한 사촌 매형 박상진은 격렬한 무장투쟁을 한 광복회의 총사령관을 지내기도 했다. 국채보상운동, 조선국권회복단, 광복회, 백산무역주식회사 등 최준은 독립운동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 


최완이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하기 위해 상해 임시정부를 찾았을 때 그가 들고 온 현금은 2만 원이었다. 당시 임시정부의 1년 예산이 6만 2천 원이라고 하니, 임시정부에 얼마나 큰 기여가 됐는지 알 수 있다. 최준은 백산무역을 통해 100만 원이 넘는 독립자금을 보냈는데, 이는 현재 가치로 1000억 이상이며, 한때 임시정부 예산의 60% 이상을 감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백산무역은 표면적으로 무역업을 하고 있었지만, 주목적은 상해 임시정부에 자금을 지원하는 것이었다. 사업의 이윤과 상관없이 자금을 보내다 보니 결국은 경영난으로 파산하고 마는데, 이때 부채를 떠안은 최준은 자신이 소유한 부동산의 권리를 조선신탁주식회사에 이관해야 했다. 


그의 후손과 우리는 모두 막대한 유산과 새로운 미래를 물려받은 셈이다


독립운동 과정에서 전 재산이 소진되고 일제의 감시 아래서 숨도 쉴 수 없는 나날이 이어졌지만, 마침내 해방을 맞았다. 해방과 함께 그의 재산도 일부 돌아왔다. 일본 금융기관과 맺은 담보 계약이 무효화됐기 때문이다. 최준은 이렇게 되찾은 재산으로 여생을 편안히 지내는 대신 교육사업에 투신한다. 우리가 일제강점기 같은 비극의 시대를 맞은 것은 근대 교육을 받지 못한 탓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제 새로운 나라가 시작되었다. 이 나라의 희망은 우리 뒤에 오는 사람들의 몫이다”라며 전 재산을 대구대학(현 영남대학)에 기증했다. 


후손들에게 1원도 상속하지 않음으로써 수백 년 이어온 최부자댁의 부는 12대 최준 선생에 이르러 막을 내렸다. 한 가문이나 왕조, 기업이 막을 내리는 것은 우리 기억 속에 대체로 아름답지 못하게 남아 있다. 망하거나 몰락하거나 파산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경주 최부자의 경우는 다르다. 세상에서 가장 숭고한 끝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아니, 과연 끝이라고 할 수 있을까? 최부자의 진짜 부는 경제 규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뜻과 정신에 있는 것이 아닐까? 그의 후손과 우리는 모두 막대한 유산과 새로운 미래를 물려받은 셈이다. 



#시간의 아름다움을 품은, 월정교


#시간의 아름다움을 품은, 월정교

최부자댁과 경주향교를 나와 남천 쪽으로 걸어 내려오면 눈을 사로잡는 아름다운 목조다리가 있다. 신라시대 것을 복원한 월정교다. 교촌 고택과 향교에서 조선의 절제미, 미니멀리즘을 봤다면 월정교는 신라 예술의 찬란함과 화려함을 펼쳐놨다. 사실 교촌마을 주변은 신라 유적이 집중되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경주향교는 신라 최초의 국립대학인 ‘국학’이 있던 곳으로 고려 시대에는 향학으로, 조선시대에는 향교로 이어졌다. 교촌과 남천을 따라 김알지가 태어난 계림, 김유신이 살던 재매정, 선덕여왕의 첨성대 등 <삼국유사> 속 유적이 흩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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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에 의하면 월정교는 통일신라시대 경덕왕 19년(760)에 지어진 것으로,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설화가 깃든 사랑의 다리로 알려져 있다. 월정교는 다리 위의 긴 회랑과 화려한 지붕이 특히 아름다운데, 발굴 당시 교각 사이에서 불탄 목재와 기와 편이 출토되어 교각 윗면이 누각과 지붕으로 구성된 누교라고 추정했다. 조선시대에 유실된 월정교는 10년에 걸친 복원 끝에 2018년 완성된 모습을 드러냈다. 


월정교에 올라오면 생각보다 더 웅장한 모습에 놀라게 된다


월정교 전체를 담을 수 있는 포토 포인트는 남천을 가로지르는 징검다리다. 줄 서서 차례를 기다려야 하지만,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즐겁다. 월정교에 올라오면 생각보다 더 웅장한 모습에 놀라게 된다. 붉은 기둥이 줄이어 있는 긴 회랑도 멋진 인생 샷을 선물할 것이다. 다리에서 바깥을 내다보면 교촌마을과 남천이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어둠이 내리면 다리를 비추는 색색의 조명이 밤의 정경을 운치로 물들인다. 해바라기가 핀 여름에도, 단풍 든 가을에도, 함박눈 내리는 겨울에도, 그리고 벚꽃이 흐드러진 봄에도, 이렇게 아름다울 것이다.



뜨거운 여름, 순례와 같았던 광복길을 마치며


교촌마을을 나오는 길, 남천을 따라 해바라기가 한여름의 태양만큼이나 함빡 피어 있다. 그냥 아무 일 없이 평화롭다. 그래서 안심이 됐다. 뜨거운 여름, 순례와 같았던 광복길을 마치며, 나라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숭고한 분들을 떠올려본다. 눈앞의 대가를 바라지 않고 옳을 일을 한 분들. 그중에는 유관순, 윤동주, 최준, 안희제처럼 이름 있는 분들도 있지만, 이름 모를 수많은 분들도 있다. 최부자댁 창고에서 발견된 국채보상운동 장부에 이름을 올린 평범한 사람들처럼. 집 팔아 50냥, 소 팔아서 100냥, 노동 품삯으로 30냥…. 말 못하는 농아도, 누군가의 첩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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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를 거닐은 르무통 스타일2 ↓

벗고 싶지 않은 편안함, 르무통 (lemouto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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