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적 만남이 이끈 곳, 윤동주와 정병욱을 찾아서'
윤동주 유고가 보존되어 있던 정병욱 가옥에서
섬진강 끝 배알도까지, 전라남도 광양 ‘윤동주길’을 걷다
“오뚝하게 솟은 콧날, 부리부리한 눈망울, 한 일자로 굳게 다문 입, 그는 한마디로 미남이었다.”
이건 첫눈에 반한 만남이었다. 깊은 사랑에 빠질 만남이었을 뿐 아니라, 얼마 후 영원히 그리워할 만남이었고, 또 한국 문학의 운명을 바꿀 만남이었다. 정병욱이 조선일보에 발표한 글 ‘뻐꾸기의 전설’을 읽은 그가 기숙사 방으로 직접 찾아왔다. 연희전문학교에서 이름을 떨치고 있는, 동경하는 선배 윤동주가.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한 정병욱은 이 만남 이후 윤동주 최고의 문학적 동료이자 친구가 된다. 그는 윤동주보다 다섯 살 어린 후배이지만 윤동주가 자신의 시에 조언을 구할 정도로 대화가 잘 통했다. 기숙사를 나와서도 둘은 같은 집에 하숙하며 민족의식, 문학의식을 공유했다. 후에 저명한 국문학자가 된 정병욱은 이 만남을 평생 잊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호 또한 윤동주가 쓴 시 ‘흰 그림자’에서 가져와 백영이라고 지었다.
1941년, 전쟁에 뛰어든 일본의 황국신민화 정책은 더욱 강경해졌다. 외국 선교사들이 세운 대학이라 비교적 자유로웠던 연희전문학교마저 조선어 말살 정책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더 이상 한국어 강의도, 한국어로 글을 쓰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다. 하지만 윤동주는 바로 이때 우리 말로 쓴 시집을 내기로 결심한다. 그건 아마도 아파하고 있는 민족에게 위로를 건네고 싶은 마음이며, 독립에 대한 결연한 의지였을 것이다.
윤동주는 자신의 시집을 들고 연희전문학교 스승 이양하 교수를 찾아간다. 그러나 조선어 책을 불온서적으로 간주하는 일제에게 제자가 화를 입을까 염려한 교수는 출간을 만류한다. 시집 출간이 좌절된 윤동주는 크게 낙담했다. 그 옆에서 정병욱은 이 낙담까지 지켜보고 함께했을 것이다. 윤동주는 육필로 쓴 시집을 3권 만들었는데, 그중 한 권은 본인이 간직하고, 다른 한 권은 출판을 위해 이양하 교수에게 전달했다. 그리고 마지막 한 권을 사랑하는 후배 정병욱에게 건넸다.
졸업 후 윤동주는 유학을 위해 창씨개명을 한다.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윤동주 ‘참회록’ 중에서)
그는 이렇게 뼈아픈 ‘참회록’을 남기고 일본으로 떠났다. 정병욱과 윤동주, 그들은 알았을까? 이 이별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시간이 흘러 윤동주는 독립운동 혐의로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되고, 정병욱은 1944년 일제에 의해 징집된다. 전쟁터에 끌려나가기 전, 다급해진 정병욱은 부모님이 계신 전라남도 광양으로 향한다. 윤동주의 육필 시집을 들고서.
# 윤동주 유고 보존, 광양 정병욱 가옥
백두대간의 종착점 광양. 지금은 KTX를 타고 인근 순천까지 서울에서 세 시간이면 다다를 수 있지만, 1944년 정병욱에게는 얼마나 먼 길이었을까?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던 암울한 시대, 그는 전쟁터에 나가기 전 부모에게 인사를 올린다. 그리고 윤동주의 유고 보존을 부탁한다.
“동주나 내가 다 죽고 돌아오지 않더라도 조국이 독립되거든 이것을 연희전문학교에 보내어 세상에 알리도록 해주세요.”
유언처럼 남긴 이 말에 어머니는 시집을 명주 보자기로 겹겹이 싸서 마루 밑에 숨겨둔다.
섬진강변 도로가에 자리한 ‘정병욱 가옥’은 자칫 그냥 지나쳐버릴 수 있는 자그마한 일본식 생활 가옥이다. 빨간 양철 지붕을 이은 목조 슬레이트 건물은 당시 양조장과 주택을 겸용하고 있었다고 한다. 일본식 미닫이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윤동주 육필 원고 복사본을 비롯해 윤동주와 정병욱에 대한 다양한 자료가 전시되어 있었고, 원고를 숨겨두었던 마루가 복원되어 있었다. 마루를 뜯어낸 작은 공간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서늘함과 안도감이 동시에 밀려왔다.
육필 시집은 단 3권.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숨진 윤동주의 것과 이양하 교수에게 준 것은 유실되고 없다. 영원히 사라질 뻔한 시집이 전라남도 광양의 한 가정집에서 다시 발견된 건 기적적인 일이다. 윤동주라는 시인이 오늘 우리 곁에 있는 것도. 해방 후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온 정병욱은 윤동주의 생사를 알지 못했다. 그는 어머니에게서 무사한 원고를 받아 들고 뛸 듯이 기뻐했다.
윤동주는 끝내 돌아오지 못했지만 1948년 1월,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발간됐다. 정병욱이 보관하고 있던 19편과 윤동주의 또 다른 절친 강처중이 윤동주의 유학 시절 편지를 통해 받은 12편을 묶은 시집이다. 시인 정지용은 그 유고집 서문에
“무시무시한 고독에서 죽었구나! 29세가 되도록 시도 발표하여 본 적도 없이!”라고 썼다.
비탄이 절로 나오는 말이다. 그러나 역사는 두 청년의 운명적 만남을 통해 결국은 세상에 윤동주를 내놓았다.
# 선소리에서 망덕리까지, 윤동주길
정병욱 가옥을 나오면 건너편 섬진강을 따라 나무 데크 길이 죽 이어져 있는 게 보인다. 2020년에 조성된 ‘윤동주길’이다. 선소리에서 망덕리까지 약 2km 거리로, 섬진강과 소박한 망덕 포구가 마음을 붙잡는다. 전어가 유명한 이곳은 가을이면 전국에서 미식가들을 끌어들이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는 또 선소마을이라고 배를 만드는 마을도 있는데, 이순신 장군이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부임해 있을 때 이곳에서 판옥선 네 척을 건조했다고 한다.
윤동주 길의 북쪽 끝인 선소리에는 ‘윤동주 시 정원’이 조성되어 있다. ‘별 헤는 밤’을 제외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수록된 30편이 모두 시비로 세워져 있어, 자연 속에서 시집을 읽는 듯한 색다른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한 편 한 편 천천히 음미하고 윤동주 길 남쪽으로 내려오다 보면 ‘윤동주 쉼터’, ‘정병욱 가옥’, ‘별헤는다리’ 등 윤동주와 정병욱을 기념하는 다양한 포인트들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 끝에서 섬진강이 남해와 합쳐지는데, 배알도라는 귀여운 섬이 반겨준다.
# 섬진강과 남해가 만나는 곳, 배알도
‘윤동주길’을 따라 망덕포구에 다다르면, 배알도로 걸어 들어가는 ‘별헤는다리’가 나온다. 0.9ha의 작은 섬이지만, 배알도는 섬진강과 남해가 만나고, 전라도 광양과 경상도 하동이 한데 어우러지는 묘한 공간감을 갖고 있다. 섬에 들어가면 뜨거운 여름에도 바람이 사통팔달로 불어오는 작은 공원이 있다. 잠시 쉬어가거나 시를 읽기에도 좋은 장소다.
배알도 정상까지는 25m, 118개의 계단을 올라야 한다. 정상에 서면 물길 너머 하동 땅이 훤히 보인다. 550리를 달려온 섬진강이 바다와 만나는 곳에 마치 마침표처럼 찍은 것처럼 작은 섬 배알도가 자리한 것이다. 강물은 멀리 섬진대교를 지나 남해로 모험을 떠난다. 윤동주의 시와 삶이 이끈 이곳은 뜻하지 않은 낯선 곳이지만, 왠지 납득이 가는 곳이기도 했다. 자칫 영원히 모르는 이름이 될 뻔했던 윤동주. 그가 태어난 백두대간 북쪽 끝 북간도와 그의 시가 살아남은 남쪽 끝 배알도가 이어진 건 단순한 우연이 아닐 거다.
섬에서 ‘배알도 수변공원’으로 나가는 또 다른 다리도 있다. ‘해맞이다리’다. 다리 가운데 원형 광장은 일출 명소로도 유명하다. ‘배알도 수변공원’은 500여 그루의 해송이 멋진 모습을 자랑하며 시원한 그늘을 드리워준다. 작은 백사장이 있어 캠핑족들도 즐겨 찾으며, 150km ‘섬진강 자전거길’의 시작점이자 종착지이기도 하다. 배알도 해변이라고 불리는 작은 백사장에서 바다로 걸어 들어가 발을 담근다. 뜨거운 여름날 제법 걸은 탓에 쌓인 피로가 시원하게 씻겨 내려간다.
“내가 평생 해낸 일 가운데 가장 보람 있고 자랑스러운 일이 무엇이냐고 묻는 이가 있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동주의 시를 간직했다가 세상에 알려줄 수 있게 한 일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정병욱, <잊지 못할 윤동주 형> 중에서
정병욱 교수는 해방 후 서울대학교 국문학과에 재직하면서 수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는 한국 고전문학 연구의 초석을 놓았고 국어국문학회와 판소리학회를 창립하는 등 문학 연구에 평생을 바쳤다. 그런 그가 자신보다 윤동주를 앞세워 평생 가장 보람 있는 일이 윤동주의 시를 알린 것이라고 하니, 그 겸손과 사랑에 고개가 숙여진다. 이어령 전 장관은 정병욱 교수를 ‘보이지 않던 별들을 찾아내 그 빛을 우리에게 주신 고마운 분’이라고 표현했다.
역사는 이렇듯 운명적 만남을 통해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기도 한다. 한반도 남단, 낯선 길을 걸으면서 ‘만남’에 대해서 질문을 던지고 또 대답을 해본다. 이번 여행은 윤동주의 시만큼이나 가슴 뭉클한 두 청년의 우정과 그 우정이 가져다 선물을 더 깊이 만나게 해주었다. 무작정 걷다가 예상치 못한 것들을 만나게 해주는 것이 여행이라면, 여행은 우리를 또 어느 방향으로 이끌까?
광양을 거닐은 르무통 메이트 ↓
벗고 싶지 않은 편안함, 르무통 (lemouto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