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양심, 윤동주와 앨버트 W. 테일러 길
종로구 청운동 윤동주문학관에서 행촌동 딜쿠샤까지
암흑의 시대에 저항한 두 인물을 찾아서
종로구 청운동. 이름 때문일까, 푸른 구름도 지나는 길에 잠시 멈출 거 같은 동네다. 청운동에서도 지대가 높은 인왕산 자락에 자리한 윤동주문학관은 잠시 이 아랫동네에 머물며 이곳에 올라 시심을 가다듬었던 한 시대의 푸른 양심, 시인 윤동주를 기념한다. 부끄러움과 양심. 흔하게 듣는 말이라서, 사는 게 바빠서, 이루고 싶은 게 많아서, 또는 없어서 이 두 단어는 뒷전으로 밀려날 때가 많다. 하지만 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데, 또 역사를 숭고하게 만드는 데 이보다 더 필요한 게 있을까? 암흑의 시대, 일제의 강압 속에서 하루하루 숨쉬고 시를 쓰는 게 죄스럽고 아팠던 청년 시인 윤동주의 거울 같은 마음이 광복절을 얼마 앞둔 오늘, 나를 이곳으로 이끌었다.
# 영혼의 가압장, 윤동주문학관
버스를 타고 ‘자하문 고개 윤동주 시인의 언덕’ 정류장에서 내렸다. 꾸밈없이 모던한 작은 건물, 윤동주문학관이다. 경복궁역에서 서촌을 지나 청운공원을 따라 올라와도 훌륭한 걷기 코스지만, 장마가 채 끝나지 않은 무더운 날씨 탓에 지대가 높은 이곳에서 시작해 서촌의 윤동주 하숙집 터로 내려가는 길을 택했다. 비가 잠깐 그친 틈을 타 매미들이 한껏 목청을 높인다. 언제나 듣기 좋은 이맘때만의 소리지만, 습하고 무거운 공기 탓에 정신이 사납다. 시원한 문학관 안에 들어오니 비로소 머리가 명징 해졌다. 문학이 주는 차분하고 조용한 분위기 덕분이다.
2012년 문을 연 윤동주문학관은 원래 버려진 수도 가압장이었다. 가압장은 느려지는 물살에 압력을 가해 다시 힘차게 흐르도록 도와주는 시설로, 고지대에 수돗물을 원활하게 공급하기 위해 세워졌다. 세월이 흘러 노후된 가압장은 철거해달라는 민원이 빗발쳤다. 그러던 중 이곳을 사용하고 있던 ‘윤동주 시 선양회’를 비롯한 뜻있는 사람들이 모여 이곳을 윤동주문학관으로 탈바꿈시키기로 했다.
당시 설계를 위해 현장을 찾은 이소진 건축가는 점검 중 이상한 걸 발견했다고 한다. 벽을 치는데 퉁퉁 울리는 것이다. 벽 저쪽에 공간이 더 있다는 뜻이었다. 아무도 몰랐던 물탱크 2기가 발견됐다. 천장이 높고 네모 반듯한 콘크리트 공간은 묘한 매력으로 마음을 사로잡았고, 이내 윤동주의 시 세계와 이 장소를 하나로 연결하는 단초가 됐다.
# 윤동주 문학세계를 표현한 세 개의 우물
윤동주문학관은 ‘우물’이라는 키워드로 연결되는 3개의 전시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가압장 사무동이었던 곳은 제1전시실 ‘시인채’, 상태가 나빠 천장을 철거해야 했던 물탱크 2개 중 한 개는 제2전시실 ‘열린 우물’,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또 다른 물탱크는 제3전시실 ‘닫힌 우물’이다.
시인의 생애를 따라가는 ‘시인채’ 중앙에는 윤동주의 생가를 수리하던 중 발견한 우물 목판이 설치되어 있다. 그리고 그 목판에 윤동주의 시 ‘자화상’이 새겨져 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자화상’ 중). 자신을 비추는 우물은 ‘자아성찰’을 상징하는 시적 단어이자 오브제다. 이 우물은 인간적으로 고뇌하면서도 자신을 매섭게 성찰한 청년 윤동주의 정신세계를 비추고 있다.
실외 공간으로 거듭난 ‘열린 우물’은 중정의 형태를 띠고 있다. 우물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면 이런 느낌일까? 잎새에 바람이 이는 게 느껴진다. 밤에 이곳에 선다면 하늘의 빛나는 별도 헬 수 있을 것이다. 윤동주가 나고 자란 북간도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처럼. 그곳은 유독 하늘과 바람과 별이 아름다운 곳이었고, 시인의 세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열린 우물에서 이어지는 ‘닫힌 우물’은 시인의 마지막을 떠올리게 한다. 사방이 막힌 차가운 콘크리트 공간. 천창에서 떨어지는 한 줄기 빛에 그만 마음이 숙연해지고 만다. 윤동주의 짧은 생을 영상으로 상영하는 이곳은 그가 수감됐던 후쿠오카 형무소처럼 죽음의 공간이기도 하지만, 그를 오늘에 되살리는 부활의 공간이기도 하다.
# 어느 저녁, 시인의 언덕에서
윤동주문학관 왼편에 작은 길이 나 있다. ‘시인의 언덕’으로 올라가는 길이다. 완만한 경사를 산책하듯 올라 언덕 꼭대기에 이르니, 인왕산이 한눈에 펼쳐 보인다. 또 다른 한 편에서는 서울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서시’ 시비가 서 있는 이곳은 밤에는 꽤 근사한 야경 포인트로도 유명하다.
윤동주는 연희전문학교에 다니던 1941년에 종로구 누상동에 있는 소설가 김송의 집에서 후배 정병욱과 잠시 하숙을 했다. 이때 그는 이 일대를 산책하며 시상을 떠올렸다. 그가 누상동에 머문 것은 짧은 기간이었지만 ‘서시’ ‘별 헤는 밤’ ‘또 다른 고향’ 같은 대표작이 나왔다.
저녁 무렵 하숙집 근처 이 언덕에서 해지는 서울 풍경을 바라보며 그는 어떤 생각에 빠졌을까?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헤는 밤’ 중). 어느 밤엔 이렇게 별을 헤고, 또 어느 저녁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서시’ 중)고 아픈 고백을 했을 것이다.
# 서촌 윤동주 하숙집 터
시인의 언덕을 내려와 서촌으로 향했다. 경복궁 서쪽에 위치해 ‘서촌’이라 불리는 이곳은 한옥과 좁은 골목이 잘 보존되어 있어 걷는 재미가 남다르다. 한옥과 오래된 주택 건물에 들어선 아기자기한 가게와 카페, 갤러리가 즐비해 언제나 북적인다. 서촌의 수성동 계곡은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삼복더위를 피해 즐겨 찾던 피서지이기도 했으며, 일제 강점기에는 이상, 청전 이상범, 박노수, 천경자 등 다수의 예술가들이 이 일대에서 생활하고 창작했다.
수성동 계곡에서 멀지 않은 종로구 누상동 9번지. 비운의 천재 시인 윤동주가 연희전문학교 재학 시절 5개월간 머물렀던 하숙집 터다. 이곳은 윤동주가 존경하던 소설가 김송의 집으로, 그가 살던 당시 집의 원형은 없고 나중에 지은 다세대 주택이 자리하고 있다. 그럼에도 시인을 기리는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짧은 기간 ‘자화상’ ‘별 헤는 밤’을 포함해 주옥같은 열 편의 시가 탄생한, 윤동주 문학세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 딜쿠샤를 지은 이방인의 양심
윤동주 하숙집 터에서 걸어 내려와 필운대로를 따라 사직대로로 나왔다. 사직 터널 위쪽 동네 행촌동으로 올라가자 옛날 서양식 붉은 저택이 눈에 들어왔다. 딜쿠샤라고 불리는 앨버트 W. 테일러 가옥이다. 딜쿠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어딘지 달콤하고 이국적인 이 단어는 이 집의 안주인이었던 매리 L. 테일러가 붙인 이름으로 산스크리트어로 ‘기쁜 마음의 궁전’을 뜻한다고 한다. 1923년 처음 지어진 딜쿠샤는 이름처럼 테일러 가족에게 큰 기쁨도 주었지만, 암흑의 시대를 거치며 갖은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 딜쿠샤가 복원을 마치고 역사 전시관이 된 것은 2021년이다.
앨버트 W. 테일러는 1897년에 조선에 들어와 광산업과 상업에 종사했다. 그의 아내는 1919년 2월 28일 첫아이를 출산하기 위해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하는데, 간호사 한 명이 갓 태어난 그녀 아들의 침대 밑에 무엇인가를 밀어 넣었다. 침대 밑에 숨겨둔 것은 다름 아닌 3.1 독립선언서였다. 앨버트는 이 선언서를 못 본 척할 수 없었다. 그는 위험을 감수하고 해외로 나가는 동생의 구두 뒤축에 독립 선언서를 숨겨 반출했고, 3.1 운동을 세계에 알렸다.
앨버트는 AP 통신사의 통신원으로 활동하며 고종의 국장과 3.1 운동, 제암리 학살사건 등 일제의 만행을 전 세계에 고발했다. 계속해서 조선의 항일독립운동을 돕던 그는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고 이후 추방됐다. 1948년 미국에서 사망한 그의 유해는 그가 그토록 돌아오고 싶어 했던 한국으로 돌아와 지금까지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 묻혀 있다.
기품 있는 딜쿠샤 내부를 구경하고 밖으로 나왔다. 붉은 저택 옆에는 한여름에도 시원한 바람을 일으키며 그늘을 만들어주는 큰 은행나무가 서 있다. 테일러 부부가 이곳에 집을 짓기로 결정한 데 큰 역할을 한 나무로 행주대첩을 이끈 권율 장군이 자신의 마당에 직접 심었다고 전해진다. 400년도 넘는 긴긴 세월을 사는 동안 이 은행나무는 무엇을 지켜봤을까? 혼란스러운 일제강점기, 타국에서 벌어진 불의에 눈 감지 않고 양심에 따라 옳은 일을 한 테일러 가족도 그중 하나일 것이다.
어쩌면 역사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여정이 모이고 모인 것인지도 모른다. 괴로움과 부끄러움을 토로한 윤동주 시인의 길은 꽤나 아픈 길이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이 길의 끝에서 생각난 것은 그가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지은 ‘새로운 길’이다. 설렘과 희망을 가득 담은, 새로운 길. 아픈 과거의 길을 지나 고단한 오늘의 길을 걷다 보면 우리는 어떤 길을 만나게 될까? 그 길은 새로운 길, 윤동주 시인이 노래한 것처럼 언제나 설레고 희망찬 길이었으면 좋겠다.
새로운 길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내일도…” –새로운 길, 윤동주
종로를 거닐은 르무통 클래식2 ↓
벗고 싶지 않은 편안함, 르무통 (lemouto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