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관파천에서 을사늑약
3.1 만세운동을 거쳐 광복까지
정동에서 역사의 길을 걷는다
어딘가를 사랑하는 방법? 누군가는 지역의 아름다움을 음식과 특산물을 통해 보여주기도 하고, 또 누군가는 사진과 영상으로 담아내기도 하며, 전해 내려오는 오랜 이야기나 노래를 채집해서 들려주기도 한다. 하지만 별다른 재주가 없는 나는 사랑하는 장소에 대한 나의 마음을 ‘걷기’로 전하곤 한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디면서 내 나름의 연서를 써 내려가는 것이다.
파리, 런던, 뉴욕, 온갖 유명 도시를 돌고 돌아 요즘 내가 가장 사랑하는 도시는 서울이다. 예전에 인터뷰했던 덴마크에서 온 조지 젠슨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는 북한산 등반 취재를 요청했다. 그는 비봉에 올라 서울 시내를 내려다보며 이렇게 큰 도시에 이렇게 웅장한 국립공원이 자리하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며 연신 감탄했다. 그때는 몰랐지만, 서울은 매력적인 도시다. 산이면 산, 강이면 강, 궁궐과 고층 빌딩, 전통과 첨단, 개발과 난개발, 중세에서 근대를 거쳐 현대, 미래까지, 이렇게 다채로운 얼굴을 지닌 도시는 세계적으로도 손에 꼽을 정도다. 걷기에도 좋은데, 특히 테마를 정해 걷기로 작정한다면 100개도 넘는 코스를 직접 만들어볼 수 있다.
# 광복의 길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한국의 8월은 가장 걷기 어려운 달이다. 이런 때 나를 밖으로 내보낼 수 있는 테마가 없을까? 고생스럽지만 의미를 찾을 수 있는 8월의 걷기라면, ‘광복길’이 적당할 것 같다. 풍전등화 같았던 조선 말기부터 저항의 나날이었던 일제강점기, 그리고 마침내 광복까지, 역사를 되짚는 길은 두려움과 고난, 그리고 그것이 기쁨으로 거듭나는 역사 속의 감정을 걷기의 여정에 그대로 되살려줄 것이기 때문이다.
신발 끈을 단단히 묶고 가장 먼저 향한 곳은 덕수궁이 있는 정동이다. 한강과 산, 공원과 쇼핑가도 좋지만, 서울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곳은 옛 사대문 안이다.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서울의 심장부인 이곳을 이젠 구 도심이라고 불러야 할까? 역사가 켜켜이 쌓인 사대문 안은 흉내 낼 수 없는 품격이 있다. 특히 덕수궁 돌담을 따라 올라가는 정동 길은 서울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길로 손꼽히며, 우리나라 근대 역사를 품고 있는 건축물을 배경으로 사계절 다양한 얼굴을 보여준다. 조선 말기, 덕수궁을 둘러싸고 해외 공관이 줄지어 있던 정동은 당시 정치외교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 아관파천, 고종의 길에서 구 러시아 공관까지
캄캄한 어둠이 내려앉은 1896년 2월 11일 새벽, 두 대의 가마가 경복궁을 빠져나오려 하고 있다. 일본이 장악해버린 경비병들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을까? 가마꾼들도 가마 안의 사람들도 숨을 죽인다. 다행히 경비병들은 가마를 보내준다. 궁녀들이 타고 다니는 가마였기에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은 것이다. 경비병의 눈을 벗어난 가마꾼들은 전속력으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달려 도착한 곳은 서울 정동에 위치한 러시아 공사관. 가마에서 내린 사람은 경복궁의 주인, 조선의 26대 왕 고종과 왕세자였다.
을미사변 이후 고종에 대한 일본의 감시는 더욱 숨통을 조여왔다. 경복궁에 감금된 고종은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며 잠을 이루지도, 수라를 들지도 못했다. 이를 돌파하기 위해 탈출을 감행했다. 목숨을 건 이 탈출 길은 얼마나 긴박했을까? 긴박했던 이 길을 오늘 난 한가로이 거닌다. 복원을 마치고 2018년 개방된 ‘고종의 길’은 북적이는 정동 길에서 벗어나 있고, 또 길 양쪽으로 기와를 이은 돌담이 이어져 고졸하고 조용하다. 돈덕전이 있는 덕수궁 북서쪽 바깥에서 시작되는 ‘고종의 길’을 따라 올라가면 그 끝에 정동공원과 구 러시아 공관으로 들어가는 빨간 대문이 나온다.
정동에서 제일 높은 언덕에 위치한 러시아 공관은 러시아인 사바틴(Sabatine)이 설계한 건물로 1890년 준공됐다. 당시에는 르네상스 양식의 우아한 2층 벽돌집으로 한쪽에 3층짜리 탑이 있었지만, 6ㆍ25전쟁 때 건물은 불타고 현재는 탑 부분만 남아 있다.
고종은 어떤 마음으로 이곳에서 1년을 보냈을까? 홀로 남은 탑을 바라보며 쓸쓸한 상념에 잠긴다. 세상 어느 곳에도 영광만 간직한 나라는 없다. 아프고 힘든 시간을 견뎌내고 상처를 치유하면서 한 나라의 역사는 오늘이 된다.
# 을사늑약의 현장, 중명전
구 러시아 공사관에서 정동공원을 따라 죽 내려오면 예원학교를 지나 국립정동극장에 이른다. 극장 옆 작은 골목으로 진입하면 그 끝에 중명전이 있다. 덕수궁 담 안에 있지는 않지만 엄연히 덕수궁의 일부로 한국 근대 건물의 위용을 자랑한다. 깔끔하게 구획한 서양식 잔디 정원, 아름다운 붉은 벽돌, 3면이 모두 아치형 회랑으로 이루어져 탁 트인 개방감을 주는 외부와 서양식 벽난로, 샹들리에로 장식한 내부. 역사적 맥락 밖에서 본다면 낭만적이고 이국적인 장소다.
그러나 이곳은 1905년 일본의 강압 속에 고종의 승인 없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긴 을사늑약이 체결된 비운의 장소이기도 하다.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 당시 고종은 자주 국가 대한제국 설립을 결심했고, 경복궁으로 돌아가는 대신 경운궁을 택해 개축했다(후에 순종에 의해 덕수궁으로 이름이 바뀐다). 그러나 자주 국가에 대한 원대한 꿈은 을사늑약으로 가로막히고 만다. 현재 전시관으로 공개되는 중명전 1층 한쪽에는 고종의 비밀 도장인 황제어새의 복제품이 전시되어 있다.
헤이그 특사 위임장을 비롯해 여러 외교 문서에 찍어 보낸 황제어새는 을사늑약의 무효화를 위해 백방으로 힘쓴 고종의 노력과 근대사의 아픔이 서려 있다. 이는 또한 조선왕조가 맥없이 무너진 것이 아니라는 방증으로,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위로를 전한다.
# 여성교육과 항일운동의 꽃, 이화학당
을사늑약 체결 후 매일 오후 3시면 중명전 건너편에 위치한 이화학당에서 여학생들의 기도 소리가 흘러나왔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위태로운 나라의 운명. 이화학당 교사들과 학생들은 잠시 수업을 중단하고 15분간 구국기도회를 가졌다. 오늘날 이화여고가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이화학당은 1886년 이곳 정동에서 한국 최초의 근대 여학교로 설립됐다. 이화여고 정문으로 들어가면 오른쪽엔 100주년 기념관이, 왼쪽에는 심슨 기념관이 자리하고 있다. 모두 이화의 오랜 역사를 말해주는 건물이다. 특히 1915년 지어진 심슨 기념관은 이화학당 시절부터 유일하게 남아 있는 근대 건축물로 현재는 이화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점심시간의 정동은 쏟아져 나온 직장인들로 북적인다. 한여름의 땡볕과 인파를 피해 이화박물관으로 들어서자 마치 시간과 공간을 동시에 이동한 듯 조용하고 시원하다. 근대 건물 특유의 아름다움은 어딘지 향수를 자극한다. 이화박물관은 학교와 여성교육의 발자취를 돌아보고 있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화학당 학생이었던 유관순 열사를 비롯한 알려지지 않은 여성 독립운동가들을 기념한다.
이화학당은 3.1 만세운동의 뜨거운 현장이기도 했다. 많은 학생들이 교내외에서 만세 시위에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교사들 또한 이화학당 기숙사에서 여성 독립운동가 회합을 가졌다.
이 회합으로 인해 교사 박인덕은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는데, 그곳에서 유관순 열사와 재회한다. 유관순은 감옥에서 만난 스승에게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저는 나라에 몸 바칠 각오를 하였습니다. 이천만 동포의 십분의 일만 순국할 결심을 하면 나라는 독립될 것입니다.”
여학생들의 청량한 웃음을 뒤로 하고, 정동 길을 따라 내려왔다. 뜨거운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오면 이곳은 은행 나뭇잎으로 온통 노랗게 변할 것이다. 덕수궁 담장을 마지막으로 길이 끝나는 곳에 다다르면 건너편 서울광장으로 공간이 시원하게 열린다. 옛 서울특별시 청사였던 지금의 서울도서관은 오랜 시간을 달려 시민의 공간이 됐다. 1926년 준공되어 일제의 경성부 청사로, 해방 이후 2008년까지는 서울특별시 청사로 사용됐다.
서울도서관 5층 하늘뜰은 의외의 전망 포인트다. 이곳에선 서울광장과 그 일대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1945년 8월 15일과 16일, 광복을 맞아 시민들이 운집한 곳도 바로 서울광장이다. 또, 4.19 혁명, 6월 항쟁 등의 쟁쟁한 역사를 맞이한 현대사에서 가장 의미 있는 장소다. 2002년 월드컵의 열기, 책과 노래, 재즈, 아티스트들이 있는 축제의 현장, 겨울날 어린이들을 동심으로 이끄는 스케이트장. 서울광장은 시대를 반영하며 그렇게 우리와 함께해왔다.
생각해보면 불과 100여 년 전 일이다. 그러나 그때는 아무도 몰랐다. 오늘 이런 날이 있을 거라고는. 어떤 사람들은 일본의 위세가 영원히 계속될 거 같아 저항을 멈추고 순응했다. 또 어떤 사람들은 희망을 잃지 않고 불확실한 미래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쳤다. 긴긴 과거에서 미지의 먼 미래로 이어지는 역사상에서 우린 오늘 어떤 길을 걸어야 할까?
정동을 거닐은 르무통 포레스트 ↓
벗고 싶지 않은 편안함, 르무통 (lemouto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