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이라 더 행복하다는
-할 돈을 안 가져왔다. 체크카드도 안 가져왔다. 생각하는 머리를 안 가져온 걸까?
발리에서의 2주와 일본에서의 1주를 위한 여행을 떠난 첫날. 아침부터 예쁘게 내리는 눈 속을 까르르 뛰어내며 공항버스를 탔고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그러다 문득 머리에 떠오른 두 글자. 환전.
그렇다. 우리는 짐을 챙기는 일, 아침의 여유로운 일과를 보내는 일 등을 순조롭게 끝냈다고 생각했지만 중요한 한 가지를 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큰 걱정은 되지 않았다. 어떻게든 해결될 거니까. 이게 무책임하게 어찌 되겠지 하는 마음이 아니라 나 자신으로 오랜 세월 산 덕에 얻게 된 나의 '임기응변' 능력에 대한 신뢰랄까하는 것이다. 하하.
결국은 오빠가 좀 더 여유 있게 챙겨 온 카드들과, 내가 핸드폰에 설치해 두었던 은행 어플을 사용해 무통장 무카드 인출이 가능했다. 계획했던 예산만큼 인출은 못했지만 충분할 정도로는 인출에 성공했고, 오빠가 노련하게 달러와 엔화 등의 비율을 따져 환전을 해왔다. 어쩔 수 없이 긴장하긴 했던 터라 일을 끝 마치고 나니 얼굴이 화끈거렸다. 오빠도 긴장감에 예민해져 한 껏 올라있던 텐션이 낮아지고 있었다. 여유 있게 공항에 도착했는데 환전사태를 해결하고 나니 천천히 탑승하면 되는 정도의 시간이 남았다. 앉아있던 환전소 앞 벤치에서 '헛 둘'하며 동시에 일어나 탑승구를 향하던 순간이 아직도 생생하다. 아 우리 신혼 되게 스펙터클 하고 흥미진진하다. 하지만 우리는 늘 그래왔듯, 서로를 탓하지 않고 그저 힘을 모아 난관을 헤쳐나갔다. 물론 만나지 않았을 수 있는 난관이었고, 오빠는 나보다 좀 더 스트레스를 받았겠지만 그보다 해결과정이 좋았다. 그리고 다음 여행 때 환전할 현금 챙기는 일은 더 이상 잊지 않겠지. 그거면 됐다.
근데 우리 여행의 스펙터클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여행 내내 몰랐지만. 허허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8시간을 날아 도착한 발리!
한 달 살기를 해왔던 터라 내게는 그리움의 대상지였고, 그곳에 도착하니 익숙한 모습들이 보여 반가웠다. 자주 갔던 도넛가게도 잘 있는지 궁금하고, 맛있게 먹었던 브런치 집도 오빠랑 꼭 가리라 마음먹었다. 그리고 '서핑'. 잘 못하지만 그 물살과 호흡을 함께하며 뒤집히고 빠지고 날아오르기를 반복하는 역동적인 순간들이 그리웠는데 드디어 왔다, 이곳에. 늘 운이 좋은 것인지 그냥 좋다 생각하니 좋은 것인지 모르겠지만, 일단 우리는 운이 좋았다. 어딜 가나 친절한 사람들뿐이었고, 열악한 환경을 겪는 일도 없었다.
특히나 첫 숙소도 급하게 정해서 결제하느라 나름 꼼꼼히 고른 숙소였지만 여전히 미지의 세계였다. 하지만 늦은 시간에 체크인하는 우리를 반겨주는 직원분의 친절로 시작해, 아주 저렴한 가격으로 배달시킨 음식으로 이어진 날들은 발리를 떠나는 날까지 우리를 행복하게 했다. 첫 숙소인 '마이라쿠 하우스'는 인자한 아저씨 주인분이 운영하는 곳이다. 각 숙소가 독채로 되어있고 그 앞은 공용 풀이 있었다. 물 색을 보고 냄새를 맡아보아도 깔끔하게 관리되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리고 아주 여러 명의 직원들이 오다녔는데 그들 모두가 눈만 마주쳐도 순수한 얼굴로 눈인사를 보내는 좋은 사람들이었다. 숙소 안에 있는 식당은 수영장을 바라보며 식사할 수 있도록 되어있었는데, 음식이 정말 맛있었다. 가격이 밖에서 먹을 때의 2/3 가격밖에 안 됐는데 훨씬 맛있었다. 게다가 풀 앞에 선베드가 3개 있고 그 옆에 테이블과 의자도 있어서 수영하다 바로 밥 먹고, 또 들어가서 수영하기를 반복할 수 있도록 되어있었다. 친절한 사람들과 깨끗한 환경 저렴한 식사비용까지.. 천국이다.
다만, 도마뱀이 방 안에서 발견되어 그 새벽에 주무시는 주인아저씨를 호출하고 난리를 좀 피웠었다. 이곳에는 도마뱀이 정말 많고, 사람에게 해를 입히는 동물은 아니라 괜찮지만 익숙하지 않은 나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시력이 좋지 않은 게 축복처럼 느껴졌다. 내가 시력이 좋아 도마뱀의 세세한 부분을 다 볼 수 있었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이렇게나 싫어해서 죄 없는 도마뱀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 새벽에 고작 작은 도마뱀 한 마리 치워달라고 주인분을 깨운 게 정말 죄송했고, 연거푸 사과를 했다. 주인분은 또 그 특유의 인자한 웃음을 지으며 괜찮다고 몇 번을 말씀하셨다. 쫓는 도구도 하나 주시고.
첫 숙소에서 지내는 동안 우리에게는 루틴이 생겼다. 일단 오후 12시~4시까지는 햇볕이 너무 뜨거워서 거리를 다닐 수가 없었다. 우기인터라 습하고 덥고 햇볕은 정수리에서 끓어오르는 그런 날씨였다. 그래서 그 시간은 느지막이 숙소에서 일어나 식사를 하고 수영을 했다. 낮잠도 한숨 자고 일어나면 뜨거운 기운이 가신 오후가 된다. 그때 우리는 거리로 나갔다. 제일 익숙한 짱구로 며칠을 다니고, 브라와로도 놀러 다녔다. 평소에도 오토바이를 타고 다녔기에 오빠가 나서서 컨디션 좋은 오토바이를 렌트했고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발리 곳곳을 누볐다. 특히 내가 좋아하는 과일이 저렴한 나라라서 너무 좋았다. 오빠랑 입맛이 비슷해서 얼마나 다행인지 또 한 번 느꼈던 여행이었고.
발리는 구석구석 천국이 아닌 곳이 없다. 하지만 내게 가장 익숙한 곳 짱구가 나에게는 홈타운이 맞는 것 같다. 역시 집이 제일 천국이고. 소소하게 보내고 싶은 하루는 집 앞을 산책하듯 근거리를 왔다 갔다 하며 보냈고, 좀 더 즐길거리를 보자 하면 짱구나 브라와 쪽으로 나가서 피자에 맥주를 마시거나, 바다를 구경했다. 그리고 또 좋은 서핑샵을 골라 서핑도 했다. 그곳에서 만난 인스트럭터 아구스. 빼빼 마르고 까맣게 그을린 피부의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였는데 하늘을 보면 다가올 계절도, 날씨도 다 알 수 있다고 했다. 자연에서 배운 건 서핑뿐 아니라 인생이라는 아구스의 말씀이 인상 깊었다. 황금빛으로 물드는 바다의 해 질 녘을 바라보고 있었고, 서핑을 마친 내 머리칼에는 모래와 바다가 뒤섞인 향기가 났다. 시원해진 온도에 낮잠에서 깨어나 서로 다시 만나 반가운 듯 이리저리 노니는 동네 강아지들도 참 보기 좋았다.
왜 사람들이 발리를 그렇게 좋아하는지 이제야 알겠다던 이때만큼은 금빛으로 빛나던 긴 머리칼을 가진 신랑의 얼굴도 아름다웠다. 유달리 뛰어난 친화력 덕분에 내가 서핑하고 나오는 사이에 먼저 나와 여러 친구들을 사귀었더라. 홍콩사람으로부터 파티 초대도 받고. 내가 인도하며 여행해야 한다 생각했는데, 어느새 저만치 앉아 새로 만난 사람들과 즐겁게 웃으며 그리 좋아하는 음악 이야기를 꽃피우고 있었다. 이 사람도 참 자연스럽다. 깊게 들이마신 숨을 맘껏 내쉬어 보았다. 이 한 몸이 깃털처럼 가볍게 느껴졌고 내 머리를 가득 채웠던 숱한 생각들도 그게 어떤 것들이었는지 다 잊게 되는 날숨이었다. 그 날숨에 일단은 다 떠내려 보냈다. 여행, 그중에서도 발리여행이 주는 축복이다. 이런 바다향기 물씬 나는 날숨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