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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근아 Apr 24. 2024

10. 오늘부터 계획 없기로 계획했다

나 J 된 건가 혹시?

10


방향설정




결혼식 바로 다음날 떠난 신혼여행. 그리고 그곳에서 보낸  14일의 시간은 전생이었나 싶을 정도로 아련하지만 또렷하게 기억으로 남아있다. 브이로그를 만들어 유튜브를 해 보고자 사진도 많이 찍어두었고, 오빠가 영상으로도 많이 남겨준 덕이다. 평소 같았으면 눈에 담고 피부로 느끼는 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여 기록하는 것에 시간을 많이 쓰지 않았을 텐데, 나이를 한 살 한 살 먹으니 기록하지 않으면 아예 잊는다. '까먹는다'라는 말이 딱이다. 아주 싹싹 긁어 까먹는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와 보낸 3개월 남짓의 시간이 그랬다.


오자마자는 즐거움에 잊고 있었던 피로감이 몰려와 요양을 하며 보냈다. 넓은 집 안에서 극히 일부의 구역만 오다녔고 현관 근처는 가지도 않았던 것 같다. 피로감이 좀 가신 후에는 미뤄두었던 집을 손보는 일을 시작했다. 페인트칠 한 곳을 보수하고, 거의 창고로 사용 중이었던 작은 방에 놓을 책상과 조명 등 레퍼런스 찾기로만 끝냈던 놀이방 만들기를 드디어 시작했다. 티는 안 나지만 자잘하게 구매해 놓아야 할 것들도 많고, 불편한걸 꾸역꾸역 사용했던 주방 수전을 찾아보고 구매하고 끝이 없는 셀프 인테리어의 영역이다. 심지어 나는 디자인이 매우 중요하고, 오빠는 그 디자인받고 실용성 얹어 가는 사람이라 서치가 정말 오래 걸렸다. 이 집에 입주한 지 6개월이 넘었는데 아직 완성률 60% 되려나..?



사야 할 것들의 극히 일부. 이거 아마 어떤 하루를 위해 급하게 구매해야 할것을 정리해 두었던 것 같다. (좌)



하지만 행복했다. 그 많은 고민과 선택 속에서 혼자가 아니었기에 놀이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많았다. 물론 순간순간 줄어들지 않는, 아니 오히려 늘어나는 일거리에 지치기도 했지만 그런 날은 싱싱한 채소 잔뜩과 맛있는 빵, 부드러운 달걀을 곁들인 홈메이드 브런치 한 끼면 다 해결됐다. 그러나 위기는 외부에서 도래했다.

바로 통장의 벽이 긁히는 소리.


다행히 바닥은 아직 보이지 않았고, 가득 차 있던 통장의 중앙부터 푹푹 떠서 썼는데 그 중앙의 푼 자국이 넓어졌는지 벽에 닿기 시작한 것이었다. 앞으로 얼마나 더 깊이 퍼 쓸 수 있는지는 어쩔 수없이 신경이 많이 쓰였다. 다행이다. 계획 없기로 마음먹었으나 그 또한 몇 가지의 세부사항을 체크해 계획 없기로 한 '계획'으로 만드는 나였다. 그동안 스스로가 고생해서 번 돈이니 그 스스로를 위해 편하게 쓰자고 했던 돈도 정말 편하게 쓰기 위해 '백업'을 생각하며 쓰고 있었다. 자유가 방관으로 가지 않을 수 있는 쫄보성향을 가지고 있어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고 그런 나를 좀 믿어도 되겠다는 자신이 생겼다. 그렇다. 마음 편히 계획 없기 위한 '계획'과 돈을 마음껏 쓰기 위해 '백업'을 마련해 놓았다.



맘에 드는 액자 못찾아 임시 방편으로 (좌), 탐나던 철제 바스켓 (우)



우리의 경제권은 우리 모두에게 있다.

각자의 돈은 그대로 각자 관리 하되, 공용 통장에 똑같이 생활비를 입금 후 사용하는 중이다. 신용카드와 체크카드를 두고 신용카드 사용료는 그 부부통장에서 이체되도록 했다. 통장을 합치치 않은 이유는 서로가 조금 달랐다. 오빠는 자유를 찾아 퇴사를 했기 때문에 그 모든 자금이 공용으로 묶이면 하고 싶은 것을 편하게 할 수 없을 것 같아 그렇다고 했고, 나는 이제껏 거금을 관리해 본 적이 없기에 좀 겁이 난 이유였다. 사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서로 더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우리는 우리가 함께하기로 한 후부터 이 관계에 지나친 부담감이 생기지 않도록 조절하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


하지만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은 설정해 두었다.

나는 작은 돈도 새어나가지 않도록 잠그고 적재적소에 필요한 만큼만 배분하는 것을 잘한다. 반면에 오빠는 큰돈을 어딘가에 투자해서 투자수익을 얻는 등의 배팅 능력이 있다. 그래서 평소에는 내가 전부 관리를 하고, 우리가 여유롭게 운용할 수 있는 일정 금액은 오빠에게 맡겨 투자수익을 얻을 수 있도록 하는 방향이다. 그러려면 내가 먼저 섬세하게 기본 자금을 잘 운용해 두고, 거기에서 설령 100%다 잃더라도 현재와 미래의 우리 가계에 지장이 없는 자금을 설정해야 한다. 그다음은 오빠의 큰 배포가 제 몫을 할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방향으로 갈 것을 합의했고 동시에 당분간은 인생을 즐기는 것에 열심을 내기로 했다. 되게 오래 쉰 것처럼 느껴졌지만 한 회사에서만 11-12년을 보낸 오빠에게 4개월간의 휴식은 아마 회사에 안 나가도 된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정도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나는 일단 오빠가 최소 1년은 쉬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거의 10년은 잦은 새벽퇴근과 쏟아지는 일로 하루종일 정신없었고 그나마 좀 나아진 그 이후의 회사생활도 단지 그전보다 나아졌을 뿐이지 일반적으로 다닐 만한 상황은 아닌 그런 생활이었다. 그런 삶을 살아온 사람이 단 1년도 맘 편히 못 쉰다는 건 말도 안 됐다. 그리고 그 이후에 어떤 일을 하게 되더라도 '더 이상은 일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정도의 조바심이랄지, 에너지가 생겨야 초반 추진력이 생길 것 같고 그래야만 뭐든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현재 우리의 경제부문의 계획은 '계획 없음'이다. 혼자 지낼 땐 나의 계획이 일반적으로 지지받을 만 한가가 중요했는데, 우리 둘이 되니 그건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우리가 서로에게 설득력이 있으면 됐다. 우리만의 삶이니까.


그러고 얼마 후 우리는 발리에서 일본을 거쳐 한국으로 들어오는 3주간의 여행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우리 부부가 로또에 당첨되었다는 설이 돌기 시작한 것이.



펑펑내린 눈으로 만든 눈사람을 뒤로하고 여름나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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