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근아 May 24. 2024

마지막 이야기. 온전히 당신만의 숨이니까

오늘이 내 삶의 마지막 날이더라도 괜찮을 것 같아.

15


너의 생을 함께하노라.




신랑은 요즘 이런저런 방송기기를 들여놓고 놀이방을 꾸려가고 있다.

누구보다 본인 스스로에 대한 애착이 큰 사람이라, 그런 본인을 활용한 일을 업으로 삼으면 좋겠다 싶었다. 본인도 그러고 싶어 하고. 유튜브, 패션사업, 예술작품 작가 등 관심 있는 분야가 꽤나 다양했지만 사실 내 안에 있는 생각을 밖으로 꺼내고 세상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어내는 것이 목표가 된다는 것은 공통됐다. 그 부분에 착안하여 방향을 잡아나가는 중이다. 오빠는 참 좋은 사람이고, 재미있는 사람이고, 똑똑한 사람이라 주변으로부터 무조건적인 사랑을 참 많이 받고 있다. 감사할 일이면서도 큰 재능이니 오빠를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인터넷 방송에 관심이 생겨 몇 날 며칠을 그것만 파더니, 꼼꼼하게 가성비를 따져가며 필요한 장비를 세팅 중인 것이다. 귀엽다.




오빠는 12년을 한 회사에서 보냈다. 그것도 업계에서 알아주는 '사람 갈리게 하는 회사'에서. 그곳에서 마음도 병들고 몸도 병들었다. 그런데도 그 세월을 견디게 한 것은 오빠의 책임감 때문이었겠지. 나는 앞으로 그 어떠한 상황에도 오빠가 가진 '책임감 있는 사람'이라는 장점이 오빠의 고통을 지속시키지 않도록 할 것이다. 이제는 그 책임감의 방향을 바꿔 '오빠가 행복한 삶, 우리가 서로를 아끼며 사는 삶'을 유지하기 위한 방향이 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나는 일단 응원.


그 무엇도 자신의 분야가 아니라는 생각에 겸손한 자세로 나가다 보니, 너무 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귀담아듣고 있었다. 조언을 감사히 귀담아듣는 것은 좋지만, 지금 '나로부터'시작하자 해놓고 남들의 말을 너무 듣는 건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남들이 좋아할 만한 게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거 해보자고 시작한 길이다. 나는 오빠에게 이기적이고 또 이기적인 사람이 되어달라 주문했다. 남이 자신의 분야로 넘어오려는 오빠에게 쏟아내는 우려도, 그 분야를 쉽게 생각하는 것 같아 던지는 핀잔도 개의치 말라고. 그렇게 쉽게 생각하지 않았던 오빠를 모르는 그런 말에 귀 기울이지 말라고. 다만 오빠를 향한 애정이 기반이 된 말은 그 마음만 듣고 고마워하면 그만이라고.




행여 나중에 우리 틀렸고, 잘못했고 그래서 큰일이 나도 괜찮다. 그 '착한 아들, 책임감 있는 남편'이 되어야 한다는 마음에서 자유롭게 그냥 응석 부리고 사고도 좀 치고 자유롭게 생긴 대로 사는 삶을 살아보라고. 그 선택에 대한 결과로 돈을 못 벌거나, 손가락질받는 결과가 따라올 수도 있다. 그때가 오면 내가 좀 더 별 든, 더 아끼며 감자 한 조각도 알콩달콩 먹고 손가락질도 같이 받지 뭐. 그런 각오다.


내 삶에 아주 견고한 안정과 행복을 준 사람에게 나는 무엇도 함께 해 줄 다짐을 한다.

오빠답게 꾸려가는 오빠의 생을,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옆에 붙어 함께 하겠노라.





오빠답게 살아.
이 생은 온전히 오빠만의 삶이니까.








하루의 끝, 삶의 끝.


변화무쌍한 날들을 사는 챕터가 끝나고, 반복되는 일상을 사는 챕터가 진행 중인 요즘이다.

인생을 살다 보면 수많은 챕터가 펼쳐지는데 누군가는 그 챕터 하나하나가 길고 묵직하고, 누군가는 짤막해서 휘릭 지나간다. 내 인생은 후자 쪽이다.


신랑을 언제 알게 되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우리 사이에는 수많은 지인들이 겹치는 데다, 그들끼리도 서로 겹치는 인연이 많아서 언제, 어디서, 왜 만나게 되었는지 짐작도 안 간다. 첫인상이 어땠는지 떠올려보고 싶어서 나름 머리를 굴려봤지만 허사였다. 그렇게 5년 남짓한 시간 동안 내게 존재하지만 의미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으로 있었던 신랑. 신랑은 우리가 친했다고 했다. 뭐 그렇게 볼 수도 있다. 강원도로 놀러 간 5명 중에 우리가 있었고, 어느 행사를 가기 전 먼저 만나 함께 가는 인원 5-6명 중 우리가 있었다. 그렇게 소규모 그룹 모임에 함께 끼어있었던 일이 종종 있으니, 나보다 관계에 너그럽고 오픈 마인드인 오빠는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다. 그런데 내 기준에서는 깊은 사담 한 번 나눠본 적 없고, 단 둘이 차 한잔 마셔본 적 없으니 친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저 아무런 감정 없이 바라봤을 때 객관적으로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을 뿐.



그런 5년이 지난 어느 날, 우연한 계기로 둘만의 이야기가 생겼다.

처음으로 둘이 마주한 어느 저녁시간의 5분, 그러고 이어진 둘 만의 연락, 그 결실로 만들어진 둘 만의 식사시간. 그 둘만의 상징적인 순간들 후에 다시 여럿의 시간. 그런데 그 여럿의 시간은 둘만의 시간 뒤에 온 것이라 방향성이 달랐다. 타인이 모은 여럿 중에 우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오빠가 속한 여럿에 나를 데려간 것이었으니 오히려 오빠의 세계에 내가 들어가게 된 것이라 볼 수 있겠다.



그렇게 시작된 '우리'. 그 순간들을 지나 부부가 되기까지 딱 1년 반이 걸렸다. 그리고 그렇게 부부가 된 지 거의 9개월이 다 됐다. 이렇게 글을 쓰며 회상해 보니 한 편의 영화처럼 낭만적이네.




지금까지의 평생을 따로, 남으로 살던 우리는 지금 연인이자 가족인 부부다.

하루의 끝에는 반드시 서로가 있다. 회사에서 퇴근하고 나면 집으로 돌아가 오빠와 보낼 여가시간이 기다려지는데, 그 소소한 일상이 내겐 위로이자 응원이 되는 큰 사랑이다. 물론 오빠와의 시간이 이리도 선물 같은 건 오빠의 세심한 배려와 희생이 밑바탕이 된, 나를 향한 큰 사랑인 것을 안다. 그리고 나 또한 내게 사랑을 주는 오빠에게 진심으로 온 마음을 줄 수 있다. 이것은 오빠에게도 큰 복일 것이다. 이 넓은 지구에서 이렇게 온 마음으로 서로를 향한 쌍방향의 사랑이 가능한 것은 기적이고 축복이다. 우리는 그런 범우주적인 축복을 받는 존재다. 그런 축복을 매일매일 하루의 끝에 확실히 확인할 수 있다.



시작과 동시에 끝을 생각하는 나이기에 행복과 비극을 늘 같이 달고 다녔는데, 이렇게 부부로써의 삶의 시작에 인생의 끝을 생각하니 그리 비극이 아니더라. 왜냐면 나의 삶의 끝에는 신랑이 있을 테니까. 그리고 신랑의 삶의 끝에도 내가 있겠지.



태초에 내가 생명도 무엇도 아닌 그저 어떤 에너지에 지나지 않을 때, 신이 말했다.


너 세상에 내려가볼래? 정말 눈 깜짝할 만큼 짧은 시간 동안만 말이야.
가면 인간이라는 존재로 아주 다양한 감정을 경험해 볼 수 있어.
사랑 고통 환희 절망 열정을 비롯한 모-든 감정, 그런 거.
네! 갈래요.


세상에 내려와 인간이 된 나에겐 그 에너지 그대로였다면 아주 찰나겠지만, 현재는 인간의 몸이라 그리 짧게 느껴지지 않았다. 어떤 감정은 마치 영원히 지속되고 있는 듯하기도 하고. 그렇지만 그 신이라는 큰 존재는 나를 이렇게 고통에 취약한 인간으로 이 세상에 보내면서 사랑과 염려하는 마음을 담아 오빠를 준비해 준 것 같다. 전에는 '부모'라는 존재가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자연스럽게 흘러간다면 내 생보다 짧은 생을 살기에 혼자 남겨질 나를 위해 부모의 뒤를 잇는 또 다른 부모 같은 존재를 준비해 준 게 아닐까. 부모가 나를 생물학적으로 성장시키고, 정신적으로 기초를 쌓게 도운 초등교육 기관이라면, 남편은 생물학적으로 나를 고양시키고, 정신적으로 탈피하게 하는 고등교육기관 같은 거. (엄마 아빠 사랑해)



무튼 나는 오빠가 주는 든든한 사랑에 힘입어 성장하고 좌절하기를 반복하는 삶을 살다가, 어느 날 생을 끝내고 태초의 그 에너지로 돌아갈 것이다. 많은 사람들의 사랑이 만들어낸 나라는 사람의 삶이란 참 빛나는 삶이다. 그렇지만 뭐니 뭐니 해도 하루의 끝과, 내 모든 생의 끝에 이 사람이 있다는 것. 이보다 더 큰 축복은 없을 것이다. 나는 신의 가장 사랑하는 존재인가 보다.




나와 오빠, 우리는 서로를 깊이 사랑하는 연인이자 서로를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버리지 않고 보호해 주는 가족으로 하루의 끝을 함께하고 먼 훗날엔 생의 끝을 지켜줄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 신명 나게 살아보자.



이전 14화 14. 현실이 뭔데, 그냥 꿈속에서 살면 안 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